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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20화 (20/92)

20화. 아! 인수야

왕은 숨겨진 아들인 목선후가 위험에 빠지는 일은 미리미리 막으려 애를 썼다.

목선후는 왕의 첫사랑이 낳은 첫아들이다. 왕에게 목선후는 누구도 손댈 수 없는 마음속의 보물이다.

목선후는 그 사실을 잘 알았고 안안용이 아직은 자신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음도 알았다. 억지로 동침하면 그녀의 마음을 얻기는 더 어려워진다.

그러니 시간이 필요한데 부왕은 조바심을 내며 무석을 보냈다. 부왕을 속이는 것 같아 꺼려졌지만 안안용을 배려해서 간신히 이런 꾀를 냈는데 목선후의 고뇌를 모모르는 안안용은 철없이 장난을 쳤다.

하아, 아슬아슬하고 피가 마른다.

“공자님, 물이 준비되었습니다.”

“오늘은 나 혼자 할 테니 시중들 거 없다. 나가거라.”

욕탕이 놓인 상방에서 팽문을 몰아내고 문을 꼭 닫은 다음 옷을 벗었다.

어깨의 상처가 아물기까지는 이러는 수밖에 없다.

자신이 아무리 숨기려 해도 이런 식이면 언젠가는 들통이 날 텐데. 안안용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무슨 수든지 내야겠어. 물속에 몸을 담그며 목선후가 다짐했다.

***

봄이 지나갔다. 팽나무 꽃도 다 떨어지고 무성한 잎만 남았다. 환성은 상장군의 아들 진남과 예부상서댁 둘째아들의 사건으로 한동안 어수선했다.

사건을 파헤치다 보니 진남이 저지른 죄악이 끝없이 드러나서 상장군은 스스로 사직했다.

이씨 공자도 구린 데가 많아 두 가문은 서로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일을 마무리 지었다.

이 사건으로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는 안씨네 아들들도 끼어 있었다.

“형들이 엄청 좋아해. 누이. 그 나쁜 형들 이제 안 보게 됐다고. 그 형들은 이제 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있대.”

점심시간에 내 방에 온 넷째가 팔짝팔짝 뛰며 보고했다. 아주 좋아 죽는다. 고대에 살지만 현대의 아이 같은 넷째와 있으면 내가 현대로 돌아간 느낌이라 좋다.

“앉아 봐. 물어볼 게 있어.”

나는 넷째를 상 앞에 앉히고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한 공자가 잘 가르쳐?”

“응.”

“어떻게?”

“몰라.”

하긴 일곱 살짜리가 뭐라고 설명할 수 있겠어?

“어서 먹어. 오후 수업 있잖아.”

“응.”

넷째가 밥을 다 먹자 아이의 손을 잡고 학당으로 향했다.

“누이, 나 혼자 갈 수 있어.”

“알아. 내가 선생님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매형에게 물어봐. 매형이 제일 많이 안대.”

“누가 그래?”

“정 선생님께서.”

“매형이 학당에 오기도 해?”

“아니.”

“그럼 됐어.”

그날 밤 이후 목선후를 만나지 못했다. 별당이 크지도 않은데 어떻게나 잘 피해 다니는지 꼭 숨바꼭질 같다.

내가 가만 안 두겠다고 천장을 보고 소리친 걸 들은 걸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목선후가 학당에 발걸음을 하지 않으니 나는 편한 마음으로 한인수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며칠 동안 죽은 듯이 조용했으니 어머니도 이해해 주실 거라 믿으며.

솔직히 김인수일지도 모르는 이를 보고 싶은 마음을 더 이상 억누를 수가 없었다.

***

잠시 후 안씨 학당 뜰안.

아! 인수야!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처마 밑에 서 있는 길쭉한 형제를 쳐다보았다. 어쩌면 저렇게 똑같을까?

눈 주변이 뜨뜻해져서 얼른 고개를 숙였다.

눈물을 말리기 위해 다른 생각을 하려고 이리저리 머릿속을 헤집다가 며칠 전 밤에 왔던 목선후가 생각났다. 아직도 그가 왜 이불속을 벗어났는지 모르겠다.

결국 거절한 사람은 목선후이므로 내가 지금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이 한인수의 껍질을 뒤집어쓴 김인수든, 안안용과 입맞춤을 한 원래의 한인수든.

“선생님!”

내 손을 놓은 넷째가 한인수에게 달려갔다.

“선생님, 누이가 왔어요. 물어볼 게 있대요.”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는 한인수의 눈빛은 딱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려웠다. 반가운 듯, 안타까운 듯, 슬픈 듯. 어쨌든 심하게 흔들리는 눈빛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인수야.”

우리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한인수의 등급이 팟! 떠올랐다.

일 등급!

일 등급이야!?

진짜 우리 인수였어!

계속 생각해 왔다. 한인수가 현대의 김인수라면 하고.

우리가 현대로 돌아가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망망대해 한가운데 튜브 하나 가슴에 감고 떠 있는 기분은 떨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너무 감격스러워 말이 떨려 나왔다.

“너, 너, 인수구나. 맞지? 인수지?”

“…….”

인수는 너무 당황해서인지 아무 말도 못 했다.

안안용의 껍질을 쓴 나를 알아보지 못하니 당연하다. 지금 인수의 눈에 나는 소꿉동무를 만나 감격한 안안용이란 고대의 여인일 뿐이다.

예쁘고 무식한 부잣집 딸 안안용.

그러다 문득 원래의 한인수도 일 등급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일 등급이라고 무조건 김인수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상인 집안이어서 과거를 안 봤을 뿐 한인수는 진정한 숨은 실력자일 수도 있다.

아니다. 일등급이 그렇게 흔할 리 없다.

일단 차분히 대화를 하면서 하나씩 팩트를 짚어 보기로 했다.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겠어?”

한인수가 미간에 세줄 주름을 잡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음성은 점잖고 부드러운 이 시대 선비의 음성이다.

“안용아, 나는 미치지 않았어. 가난해졌을 뿐이야. 왜 이러는 거야? 어디서 이상한 소문이라도 들었어? 아니면 네 신랑이 나를 모른 척하래? 나를 만나지도 못하게 한다는 말은 들었어. 우리가 모르는 사이처럼 살기를 바란다면 그렇게 할게.”

“그게 아니야. 너 내가 누구로 보여?”

이런, 내 질문이지만 내 귀에도 이상하게 들리잖아. 한인수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고대의 복장을 하고 있어도 내 눈에는 여전히 고3 학생 김인수인데 삐딱하게 비웃는 표정은 좀 낯설었다.

김인수는 그 나이 또래의 남자아이들처럼 늘 어둠이 엷게 깔린 표정이었으나 나는 언제나 아이의 의도를 읽었다. 김인수는 평범하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조금 민감한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사람이 말을 하기 시작하자 표정을 읽을 수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네가 이제는 혼인해서 목선후의 아내가 됐다는 말이 듣고 싶어? 내 입으로 그렇게 확인을 받아야겠어?”

눈앞의 남자는 김인수라는 자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우연히 김인수를 닮은 한인수란 말? 그런데 일 등급이라고?

그런 우연이 있을 수 없지. 게다가 일 등급은 이 세계로 와서 단 두 사람을 봤는데 청운각에서 본 부채남과 목선후였다. 학문이 깊기로 이웃 나라에까지 이름을 떨치고 있는 어사중승도 이 등급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이 아니야.”

정말 아니라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게. 하지만 당장은 못 하겠다.”

이렇게 말한 한인수가 상처받은 눈으로 몸을 돌려 교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우리 두 사람을 멀거니 쳐다보던 넷째가 호기심이 깃든 눈을 반짝이기에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 계피 과자 사다 줘.”

평소의 넷째가 아니다. 어느 건물 구석에서 쫄쫄이로 갈아입고 스파이더맨으로 변한 어리숙한 청년처럼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너 지금 누이를 협박하는 거야?”

“거래야.”

이 조그만 녀석을 확!

“계피 과자를 어디서 사는데?”

“중문에 있는 우리 가게.”

“우리 가게?”

“의 맞은편 가게. 우리 경쟁 가게거든. 거기서 사 먹는 걸 들키면 아버지가 손바닥을 때리신단 말이야.”

나는 그 유명한 중문 상가를 한 번도 못 가 봤다. 중문 상가 사수 안씨 학당을 만든 사람이 난데. 내가 뭘 살리고 있는지는 알아야지.

“알았어. 너도 약속 지켜.”

갑자기 작은 악마로 변한 넷째를 교실로 들여보내고 학당을 벗어났다. 계피 과자든 뭐든 중문 상가를 가 보긴 해야겠다 싶어서 정오와 말순을 불렀다.

***

서재에서 책을 보고 있는 목선후에게 아씨가 한인수를 만나고 왔다고 일선이 보고했다.

“그런데 아씨가 이상했습니다. 마치 한인수를 처음 만난 사람처럼 행동하셨습니다.”

“처음 만난 척한 게 아니고?”

안안용의 태도를 보면 얼마든지 그럴 여인이다. 어떤 여인이 남편 앞에서 정사를 그렇게 실감 나게 흉내 낼 수 있단 말인가. 부끄럼도 없이.

그 밤에 무석이 너무 늦게 와서 명을 전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고 있는 안안용의 방에 조용히 들어갔다.

문밖에서 불렀다면 문도 열어 주지 않고 거절했을 게 뻔했다. 그리고 무석은 본 그대로 보고했을 거고 그분께서는 불같이 화를 내셨을 거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하지만 방으로 스며든 이후에도 쉽지는 않았다. 목선후는 안안용의 신음소리에 온몸이 화르륵 타올라서 숨을 쉬기도 힘들고 다리를 오므리기도 힘들었다.

돌아누워 망나니 진남의 행동을 떠올리고서야 간신히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최근 안안용은 과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니 초야에 한 말도 바뀔지 모른다.

한인수를 처음 본 사람처럼 대한 것도 좋은 징조다. 안안용이 말한 대로 두 사람 사이가 어린 시절 친구일 뿐이라면? 그렇다면 좋을 텐데.

“정말 처음 본 사람 같았습니다. 소인도 이상합니다.”

“음, 알았다. 궐향은?”

“궐향에 관해서 단서가 나왔습니다. 공자님과 아씨께서 청운각에 간 날 궐향도 청운각에 갔답니다.”

자연스럽게 청운각 내부가 목선후의 머릿속에 펼쳐졌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바글거리던 사람들. 단상 위에서 시를 읽던 어린 생원. 시선은 이 층으로 가서 화려한 비단을 걸친 귀족 자제들을 훑었다.

그리고 부채로 얼굴을 가린 사내와 둘러싼 호위들까지.

그 사내였던가? 생각해 보니 안안용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그때는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는데.

“청운각에 가서 물어보아라. 그날 이 층 동편 난간에 앉아 있던 사람이 누구였냐고 말이다. 부채로 눈 아래를 가린 자다.”

“네.”

일선이 먼지 한 톨 일으키지 않고 밖으로 나가자 목선후는 다시 책을 폈다.

***

중문에 있는 안씨 상가는 예상보다 대단했다. 거리 한편을 몽땅 안씨 상가가 차지했다.

유명 메이커 한정판이 출시하는 날 백화점 쇠창살 앞에 늘어진 고객의 줄처럼 길지는 않았지만 이 시대 구매력을 고려할 때 엄청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규모도 크고 화려한 상가들. 그런데 뭔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조명이 문제군. 조명이 없으니 도무지 분위기가 안 산다. 이 시대 조명은 기름을 채운 유등이나 촛불이 전부다.

가게 안에 불을 켜지 않기 때문에 햇빛이 들지 않는 곳은 낮인데도 은근히 어둑어둑하다.

“아씨, 오셨습니까?”

첫 번째 상가의 점주가 튀어나와 인사를 했다. 그 옆에서 같이 인사를 하던 부점주가 팔꿈치로 점주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제 부인이라고 하셔야죠.”

으웩, 부인이라니. 팍 늙은 기분이어서 손사래를 쳤다.

“그냥 전처럼 아씨라고 하세요.”

“네, 아씨.”

상가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포목점이라 산처럼 쌓인 천들 사이로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안부자의 금지옥엽이다. 아들들에게는 예법과 규율을 따지는 안부자도 외동딸에 관해서는 하이패스인 것을 아는 까닭에 안씨 포목점에 비상이 걸렸다.

“아씨,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신지요? 고르기만 하시면 바로 댁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두 손을 비비며 점주가 물었다.

“어두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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