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마
“들어가거라. 사랑채에 갈 생각은 마라. 인수가 왔으니 당분간은 학당도 나가지 말고. 공부도 그 정도 했으면 됐다. 네가 과거를 볼 것도 아니잖니. 네 동생들을 위하는 건 좋다만 네 인생을 망쳐서는 안 되지.”
“네.”
도저히 거부할 수 없어서 내가 뒤로 한발 물러서자 내 눈 앞에서 어머니가 방문을 탁! 야멸차게 닫았다.
닫히는 문 사이로 등롱을 들고 마당에 서 있는 안 총관의 얼굴이 보였다. 뭔가 할 말이 잔뜩 있는 듯한 표정인데.
완전히 변한 오 여사의 태도에 조금 질린 나는 조용히 침상에 누워 잠을 청했다.
생각해 보니 그리 조급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리 이 집이 크고 복잡해도 한 집 안에 살면서 마주칠 일이 없을까? 아프리카의 초원을 달리는 사자처럼 조용히 풀숲에 숨어서 때를 기다리자.
김인수나 나나 어차피 돌아가지 못할 테니까 시간은 많다.
***
다음 날 아침.
“아씨! 아씨! 죽었대요!”
정오가 저렇게 큰 소리로 부르는 걸 보니 또 늦잠을 잤구나.
눈을 비비는데 방문이 발칵 열렸다.
늦봄 아침 햇빛이 들이닥치고 이마에 땀이 맺힌 정오가 콧김을 내뿜으며 다가왔다.
“아씨, 인과응보가 정말 있나 봐요!”
정오 뒤로 말순도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죽었대요! 어제 그 나쁜 놈이 죽었대요!”
“누구?”
“청운각에서 공자님께 시비 걸던 나쁜 놈이요.”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났다. 진남이 죽었어? 무슨 사람이 집중 마킹 당하는 메르시야? 하룻밤 사이에 죽게?
“그럴 리가!”
“정말이에요. 어제 청운각에서 나가서 집으로 가던 중에 다른 공자님과 시비가 붙었는데요. 싸우다가 죽었대요. 상대 공자님은 쓰러져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고요.”
“상대 공자가 누군데?”
“예부상서댁 공자래요. 그 집은 아들들이 많아서 몇째인지는 모르겠어요.”
안신이를 자꾸 놀린다던 이씨네 아들들이 예부상서의 자식들이라 했지.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지?
“사람들이 아무도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정오의 말에 말순이 맞장구를 쳤다.
“죽고 나니까 그동안 억울하게 당하고 말도 못 했던 사람들이 모두 관아에 몰려갔어요. 그놈이 사람도 여럿 죽였대요.”
“여인도 겁탈하고요. 환성 사람들이 아주 난리예요. 천벌을 받았다고요.”
머리가 너무 복잡하다. 현대인인 나는 진남에게 큰 원한은 없다.
우연히 마주친 소시오패스에게 몇 마디 들었다고 펄펄 뛰며 원한 어쩌고 하는 성격이 아니다. 어제 나는 남의 편이 된 남편 목선후 때문에 화가 났었다.
하지만 오늘은 오히려 그렇게 생생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죽었다는 사실이 소름 끼쳤다.
현대에서 나는 죽은 사람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부모님의 시신도 나 대신 외삼촌이 확인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나는 거의 정신줄을 놓고 있어서 지금까지도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죽음이나 시체는 영화 속에서나 보던 사람이 나다.
내 앞에서 일어난 유일한 죽음의 사건이 김인수였다. 그래서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공자님께 말씀드렸니?”
“팽문이 아니까 말씀드렸을 거예요. 마님께서 아씨는 오늘 방에 얌전히 있으시래요.”
“알았다.”
밥을 먹고 그동안 배운 천자문을 복습했다. 한 달도 못 돼서 끝낼지도 모르겠다. 천자문을 쓰다가 나도 모르게 마인드 맵을 그리기 시작했다.
다 그리고 나니 여러 단어들 사이에 뚜렷한 선이 그어졌다.
진남 - 목선후 - 안안용 - 안씨 - ?
이씨 공자 - 안씨 아들들 - 안씨 - ?
마지막으로 모두 안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생각은 지나친 걸까? 진남이나 이씨 공자가 안씨 가문과 맺은 원한은 엄청 사소한 거다. 원한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한.
하지만 어제 팽문은 무엇을 처리했던 것일까? 왜 그렇게 허둥댔지?
안 총관은 어머니께 청운각에서 일어난 일을 말했을까? 어젯밤 오 여사는 평소와 너무 달랐는데 단지 한인수 때문이었을까?
이 세계는 내가 삼십 년을 알고 지냈던 그 세계가 아니므로 뒤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나도 나는 짐작도 못 한다. 이런 사소한 무지가 나를 두렵게 한다.
“아씨, 그게 뭐예요?”
간식을 가지고 들어온 정오가 종이에 쓰인 한글을 보고 물었다.
“팽나무야.”
아무렇게나 대답한 후 붓에 먹을 잔뜩 묻힌 다음 자음과 모음 사이에 잎사귀를 콕콕 찍기 시작했다. 한글이 직각으로 꺾인 나뭇가지라도 되는 양.
이거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데?
머리를 비울 겸 계속 팽나무 잎사귀를 찍었다. 내가 너무 열중해서 잎사귀를 찍고 있자 정오가 뜰에 나가더니 팽나무 가지를 몇 개 꺾어서 하얀 화병에 넣어 내 앞에 놓았다.
“이거 보고 그리세요, 아씨.”
“안 보고 그려도 돼.”
“알아요. 근데 팽나무를 그리신다면서요, 아씨.”
종이와 팽나무가지를 번갈아 보며 정오가 미소를 지었다.
화병 속의 팽나무 잎사귀는 끝이 하나로 뾰족하고 그림 속의 잎사귀는 손가락처럼 끝이 갈라져 있다.
“정오야, 이런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마.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면 그냥 넘겨. 어제 죽은 진남도 사소한 어떤 일에 걸렸던 건지도 몰라.”
“예?”
등급외 정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
“전하, 무석이 들었습니다.”
“들라 하라.”
조 내관이 문을 열자 하급 내관복을 입은 자가 들어왔다. 내관들이 조용히 걷기는 하지만 무석이라는 자는 고양이보다 더 가볍게 걸어서 반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석은 아무도 주의 깊게 보지 않는 하급 내관이지만 원래는 왕명을 비밀리에 수행하는 무공고수다. 숨겨진 왕자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시종 중 한 명이고.
“어찌 되었느냐?”
“안씨 소저의 소꿉동무이던 한인수라는 자가 선생으로 안씨 집안으로 새로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두 분께서는 아직 따로 밤을 보내십니다.”
“고얀.”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조 내관이 옆에서 살살 달랬다. 전하의 아픈 손가락이 목선후 공자다. 아홉 개의 손가락이 멀쩡할수록 남은 한 개의 손가락이 더 아프게 느껴지는 법.
아픈 손가락에 대한 염려 때문에 다른 손가락을 질투하기도 한다.
오늘 낮 세자빈의 태기 소식을 듣고 잠시나마 불편해진 어심을 깨달은 사람은 조 내관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축하하고 기뻐하느라 몰랐다.
나중에 조 내관만 남자, 왕이 어두운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올해 열일곱인 세자도 아비가 되는데 스물이나 된 녀석이 저리 살고 있으니 내가 견딜 수가 없구나.”
왕이 가운데 세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결단을 내릴 때면 자신도 모르게 하는 행동이다.
“무석아.”
“네, 전하.”
“가서 전해라. 오늘 밤 동침하라고. 그리고 네가 확인하고 오너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네, 전하. 하오나 혹시 공자님께서…….”
항명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없어 말끝을 흐렸다.
“그놈이 항명하거든 아내의 목숨이 달려 있다고 해라. 왕명이니라.”
“네, 전하.”
무석이 나간 후 조 내관이 조심스럽게 차를 올렸다.
“고얀 놈. 아비가 돼 봐야 내 심정을 알 것이야.”
“맞사옵니다, 전하.”
“스무 해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그 아이를 생각했다. 그런데 그놈은 내 마음을 조금도 몰라.”
어느 자식이 부모의 심정을 알겠습니까? 라고 말하려다가 현명한 조 내관은 입을 다물었다. 왕은 지금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다.
“보고 싶으시면 부르시지요.”
“됐다. 또 군문에 넣어 달라 할 것이 아니냐? 도대체 세상 어느 왕자가 그 거친 군영 생활을 한다더냐? 나를 애먹이려고 작정한 게지. 고얀 놈.”
“아무 일도 안 하고 그저 놀고 먹으려는 자들도 많은데 공자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하시지 않습니까? 총명하시고 열정도 있으시니 무슨 일이든 잘 해내시리라 생각되옵니다.”
“그건 그렇지? 그냥 놀고 먹으려 들지는 않으니 신통하긴 해. 장군이 되면 백전백승을 하고 과거를 보면 장원급제를 할 것이야. 그놈이 어전시에서 장원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구나.”
어전시를 보지 않으니 그런 일이 생길 가능성은 없지만 조 내관은 맞장구를 쳤다.
“참으로 보기 좋을 것이옵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리고 모두들 알게 되겠지. 우리가 얼마나 닮았는지를.”
조금 다르게 생겼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아들은 자신을 너무나 많이 닮았다. 나란히 두고 본다면 누구나 의심할 만큼.
“그때는 내가 왕이 될 줄 몰랐다. 세자 형님도 둘째 형님도 계셨으니 아무도 내게 주목하지 않았어. 나는 그 시절이 좋았다. 선후의 어미는 평민이지만 영특하고 아름다웠지. 차라리 세자가 되지 않고 그대로 살았더라면.”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심은 이 나라의 홍복입니다. 스무 해 동안 가뭄이 없고 외적의 침입이 없으니 이보다 더한 태평성대가 어디 있겠사옵니까?”
“그러냐? 하지만 내 마음이 이리도 공허한 것을. 세자궁으로 들어온 후 안정이 되면 불러오려고 했었다. 선왕께서 미리 아시고 막으실 줄 내가 어찌 알았겠느냐?”
왕이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그때만 생각하면 도망치다 죽은 여인과 간신히 목숨을 구한 핏덩이 때문에 가슴이 찢어졌다.
아무도 모르리라 생각했던 젊은 왕자의 사랑은 왕자 혼자의 착각이었다.
왕실이 알면서도 내버려 둔 이유는 그가 셋째 왕자였기 때문이다. 두 형이 거듭된 실수로 세자위에서 물러나자 세자가 된 그는 명문가의 규수 중에서 세자빈을 선택해야 했다.
세자빈에게 마음을 주지 못하는 세자를 보던 선왕은 궁 밖에 있던 평민 여인을 세자가 모르는 곳으로 보내려 했고 갓 출산한 여인은 도망치다가 사고를 당했다.
죽은 여인의 품에서 갓난아이를 안아 들고 세자가 찾은 곳이 오랜 지기인 목 어사였다. 그때는 다급해서 어디에 있든 아들이 목숨을 부지하고 잘 크면 된다고 생각했다.
“전하, 마음을 편히 하시옵소서.”
“내가 조금만 강했더라면, 아니 목숨을 내놓고 선왕께 간청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인명은 재천이라 하옵니다. 더구나 공자님께서는 지금 잘 지내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자유롭게 지내시니 소신은 부럽기만 하옵니다.”
“자유라. 그래, 그렇지. 그건 다행이지.”
왕의 얼굴이 다시 편안해졌다. 어떤 신분이든, 성이 무엇이든 목선후가 그의 아들임은 변하지 않으니까.
아무런 제약 없이 순수하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있음은 왕에게도 축복이었다.
***
잠결에 무엇인가가 어깨를 건드렸다. 꿈인 줄 알고 눈을 뜨지 않으려 했으나 그 무엇은 힘으로 내 어깨를 밀더니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누구?
눈을 뜨자 이불을 들추고 내 옆에 누우려는 목선후를 발견했다.
“뭐, 뭐 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