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신비한 인물
그런데 이 차는 뭐지? 대리 기사? 그건 또 뭐야? 지나치게 총명한 목선후는 한 번 들으면 뭐든 잊지 않고 기억한다.
일선을 불러서 이게 무엇인지 알아오라고 하려다가 지난번에 시킨 일도 답을 얻지 못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만술이 사람 이름이 아니고 술 이름인가? 안안용은 술을 꽤 좋아하는 모양이니까. 간혹 작은 주조장에서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술을 만들고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안안용을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아무것도 몰랐던 건지도.
늘 똑똑하다고 생각한 자신이 의외로 허당이라고 깨달은 목선후가 밥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뒤늦게 차렸는데도 구첩반상이군.
밥상을 보자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라 더 미안해졌다.
어쩌면 그녀는 정말로 잊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열 살 무렵 옻이 올라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온 가족이 있는 곳에서 시어머니인 금씨 부인이 말해 주었지만.
한 번 말해서 기억할 수 있다면 안씨 집안에서 지금까지 생원 한 사람이 없었겠어? 맞아, 그런 거야. 정말 잊어버린 거야.
스스로를 납득시킨 후 목선후는 편한 마음으로 젓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
금씨 부인이 그 뒤로도 서너 번은 더 강조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로.
***
“아씨, 아씨.”
말순의 목소리다.
“왜? 더 잘 거야. 놔둬.”
어깨를 흔드는 손길을 밀어냈다.
“오늘은 학당에 안 가실 거예요? 벌써 묘시 삼각이에요.”
묘시 삼각이 몇 시인지 몰라도 무조건 안 가.
“안 가. 오늘은 쉴래.”
“그러시면, 소인이 정 공자님께 말씀드리고 올게요.”
“그래.”
눈도 뜨지 않고 대답한 후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나는 이 시대 술과 궁합이 잘 맞나 보다. 오바이트도 하지 않았고 속이 쓰리거나 머리가 빙빙 돌지도 않는다. 그냥 자고 싶다.
빙의한 후 깊은 잠을 못 잤기 때문에 푹 자고 일어난 아침의 이 만족스러운 느낌을 잃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늦게 일어나야지.
다시 잠에 빠져드는데 이번엔 정오가 나를 흔들었다.
“아씨, 마님께서 오셨어요.”
어머니는 나와는 달리 매우 바쁜 사람이다. 이 커다란 집안의 안살림을 총괄하고 딸 하나와 다섯 아들을 보살피고 사람은 좋지만 손이 많이 가는 남편을 서포트한다.
이렇게 아침에 내 방에 오는 일이 쉽지는 않은데.
“안용아, 우리 애기. 어젯밤에 술 마셨다면서?”
툭툭 발소리가 나더니 어머니가 내 침상 발치에 앉았다.
“죄송해요. 세 잔 마셨는데 취했어요.”
“어서 일어나 꿀물을 좀 마셔라.”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일어나 앉으니 정오가 꿀물이 든 대접을 내 입에 댔다.
“그러게 내가 뭐라 그랬니? 지난번에도 고생을 해 놓고 또 내 말을 안 듣니?”
“……?”
무거운 눈꺼풀을 두어 번 깜박였다.
“넌 술에 약하니까 보통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했잖니. 너 마시라고 금어주를 사 놓았다니까. 잊어버렸니? 그거 한 병에 말굽은 하나야.”
“말굽은?”
나는 말굽은이 뭔지 몰라 되물었는데 어머니는 내 말뜻을 오해하고 목소리에 힘을 줬다.
“얘가 내 말을 못 믿네. 정말로 그 조그만 거 한 병에 은 스무 냥이라니까. 너 온다고 어렵게 두 병이나 구해 놓았단 말이다. 그거 마셨으면 이렇게 취하지는 않았을 거야.”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데 취하지 않으면 술이 비싼 만큼 손해 아닌가요?
“어머니, 저는 아무 술이나 괜찮아요.”
이제 초점이 돌아온 눈으로 화사한 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술을 마셨다고 혼날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마르지 않는 바다 같구나.
“불쌍한 것. 시집살이 두 달 하고 이렇게 초라해지다니. 너를 그렇게 낮추지 마라. 네가 누군데 아무 술이나 마신다는 거냐? 이왕 마시려면 몸이 상하지 않게 마셔야지. 금어주는 네 아버지가 마셔도 아깝지만 너에게는 하나도 아깝지 않아. 몇 병 더 사 놓을 테니 다음엔 꼭 금어주를 마셔라, 알았지?”
“네. 헤헤.”
원래 나이 서른인데 어머니가 나를 열 살짜리 취급을 하니 진짜로 열 살로 돌아간 느낌이다. 입가에 염치없는 웃음이 매달리고 자꾸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네가 말한 심의를 가져왔는데 지금 입어 봐라. 생각해 보니 사내 녀석들이 입었던 옷을 우리 귀한 딸에게 입힐 수 없어서 얼른 새로 지었다. 밤을 샜단다.”
그 사내 녀석들도 어머니의 아들들인데요.
“어머니, 이렇게 급하게…… 잠도 못 주무시고…… 죄송해서.”
“나는 잘 잤지. 오늘 필요하다고 했더니 침모들이 여럿 달라붙어서 후다닥 해 놓았더라. 염려 마라. 상을 내렸으니.”
상벌관계가 확실한 어머니다. 안안용에게만 눈이 멀었을 뿐.
“네가 입는 것을 보고 싶어서 아침도 안 먹고 왔다. 정오야!”
뒤에 있는 정오를 부른 어머니는 두 사람의 아침 밥상을 내오라고 시켰다. 말순의 도움으로 옷을 입고 나서 어머니 앞에서 한 바퀴 돌았다.
분명 눈두덩은 부어 있고 긴 머리는 헝클어져 꼴이 말이 아닐 텐데도 침상에 앉아서 나를 올려다보는 어머니의 눈이 하트 꼴로 변해 갔다.
“우리 딸, 뭘 입어도 예쁘구나.”
비록 근거 없는 평가지만 어머니의 행복한 얼굴을 보니 내 기분도 좋아졌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고개를 숙이는 나를 어머니가 꼭 껴안더니 등을 두드리며 내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아침에 못 일어나는 것을 보니 어젯밤 만리장성을 쌓은 게 맞지? 그렇지? 내 그럴 줄 알았다. 사내란 자고로 밤일을 잘해야 하는데 목 서방은 딱 봐도 잘하게 생겼거든. 오골계탕이 네 아버지에게도 효과가 있었는데 목 서방은 어땠을지.
흐흐흐. 이것아, 또 네가 싫어한다는 헛소리를 이 어미가 듣게 하지 마라. 여자는 처음에는 다 힘들지만 갈수록 좋아진단다.
나중엔 네가 더 원하게 될 거다. 게다가 아이를 낳으면 시부모님도 널 귀애하실거야. 큰 동서가 아직 자식이 없잖니. 네가 아들이라도 낳아 봐라. 시댁에서 너를 공주처럼 대접할 걸? 호호호.”
목덜미에 솜털이 오소소 일어서더니 이윽고 꼬리뼈가 가려워졌다.
모녀간 대화가 막히는 데가 없네. 아주 고속도로야.
고대에는 성교육을 부모가 시킨다더니 사실이었어.
“저기, 어머니. 그게요.”
이 딸은 이미 그 방면으로 알 만큼 아는지라.
다행히 정오와 말순이 상을 차리기 시작하자 어머니가 나를 놓아주었다.
***
날아가는 학처럼 날렵하게 청운각이라고 쓰인 편액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는 일단의 젊은이는 모두 화려한 비단옷을 입었다.
환성의 세력가 집안에서는 최소 한 명씩은 나왔으니 아무리 청운각이 넓다 해도 발 디딜 틈도 없었다.
뒷자리에서는 단상에 오른 자의 상투만 간신히 보였다.
“공자님, 소인이 길을 틀까요?”
삼십 전후의 장한이 앞에 선 약관을 갓 넘어 보이는 젊은이에게 공손히 물었다.
“아니다. 소란이 이는 건 싫구나.”
“하오면 이쪽으로 몸을 좀 피하시지요.”
공자는 장한의 안내로 벽 쪽으로 가서 벽에 붙은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에도 사람들이 줄줄이 서서 고개를 내밀었지만 그나마 시야가 트여 단상에 오른 사람이 보였다. 열대여섯 살 정도 되는 청년이 당당하게 단상에 서서 두루마리를 소리 내어 읽어 내렸다.
말을 건 장한 뒤로도 비슷한 복장의 장한들이 뒤따라 들어와서 공자의 주변을 에워쌌다. 호위하듯이.
“유난을 떨지 마라.”
“예.”
그때 번잡한 입구를 통해 몇 사람이 들어왔다. 무리 중에는 남장이 분명한 여인과 여인이라고 착각할 만큼 아름다운 사내가 끼어 있었다. 차갑고 고고한 기운을 뿜고 있는 사내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단연 눈에 확 띄었다.
“저들이 여기는 왜 온 거지?”
“누구 말씀이신지요?”
들어오는 자들은 한 일행은 아니었던 듯, 이리 저리 빈자리를 찾아 흩어졌다.
“저 두 사람. 남장 여인과 그 동행 말이다.”
흥밋거리를 찾아 안으로 들어오긴 했어도 너무나 번잡해 다시 나갈까 생각 중이었는데 안 나가길 잘했어. 공자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짓자, 평범한 대갓집 공자의 얼굴이 신비스러운 비밀을 품은 얼굴로 변했다.
“주군, 이 층으로 가시면 자리가 있습니다.”
호위의 말에 공자는 이 층을 올려다보았다. 한눈에 봐도 권세가의 자식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공자가 커다란 섭선을 쫙 펴서 눈 아래를 가리자 구름이 달을 가리듯 신비스러움이 사라졌다. 호위가 먼저 올라가 이 층을 관리하는 자에게 귓속말을 했다.
곧이어 부채로 얼굴을 가린 공자는 우편 난간에 마련된 의자에 편하게 앉았다.
그사이 목선후와 안안용은 점원의 안내를 받아 일층 한 구석의 빈자리에 앉았다.
***
어머니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한 후 나는 정오를 시켜 목선후에게 오늘 오후에 청운각에 같이 가 달라고 청했다.
직접 가서 간청하고 싶었지만 얼굴이 너무 부어 있고 어제 술 마시고 했던 행동이 조금씩 생각나서 그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다행히 목선후는 같이 가 주겠다는 답을 보냈다.
점심을 먹고 정오와 말순의 도움을 받으며 생애 처음으로 남장을 하고 있는데 팽문이 재촉했다.
“아씨, 공자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어서 나오십시오.”
가끔 생각하지만 내가 팽문의 본래 실력을 모른다면 저런 말도 주인에게 과잉충성하는 하인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등급외인 안안용은 못 느꼈겠지만 지금 나는 팽문의 어조 속에 숨어 있는 은근한 자부심을 느낀다.
언젠가는 팽문의 정체를 파헤쳐서 그동안의 무시를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야.
별당 입구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베이지색 도포를 맵시 있게 차려입은 목선후가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을 보자 어제의 감촉이 되살아났다. 왜 이 남자의 목만 보면 가슴이 떨리지.
내가 다가가자 목선후가 몸을 돌려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말없이 마차를 타고 청운각으로 향했다.
청운각에 도착하자 안씨 집안에서 미리 전갈을 보낸 터라 자그마치 총관이란 사람이 나와서 우리를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
시대를 불문하고 돈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나는 자리에 앉으면서 흰색 도포로 가득한 다루의 내부를 훑어보았다. 지금 시를 낭송하고 있는 도포 입은 청년은 이번 향시에 합격한 자가 분명한데 손에 든 두루마리만 내려다보고 있으니 등급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하고나 눈이 마주치길 바라며 여기 저기 시선을 돌리다가 이 층 난간에 있는 한 사람과 딱 시선이 마주쳤다.
부채를 펴서 코 아래를 가리고 있는 남자.
꽤 거리가 있는데도 우리의 시선은 서로를 향해 레이저처럼 곧게 뻗어나가 파삭! 부딪치며 등급이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