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맹세
***
그날 저녁 서재에 있는 목선후에게 팽문이 보고를 했다.
“공자님, 아씨께서 오늘 이상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뭐냐?”
팽문이 낮에 교실에서의 일을 이야기했다. 팽문 자신이 뭔가 안다는 사실을 아씨가 눈치챘다는 게 아직도 뜨끔하다. 아씨는 하인을 그처럼 세밀하게 관찰하실 분이 아닌데.
심지어 사이가 나쁜 신랑의 하인을 말이다.
“뿐만 아니라 어젯밤 일선이 들킬 뻔 했습니다. 일선을 냥아치라고 부르셨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글자도 모르지만 무공도 모른다. 우연이었거나 별 뜻 없이 한 말이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목선후가 한숨을 쉬며 붓을 놓았다.
“또?”
“한인수가 올 것 같습니다.”
“알았다.”
“막을까요?”
“그냥 두어라. 어쩌는지 보자.”
“네? 네.”
팽문이 물러가고 목선후는 다시 붓을 들었다.
논어의 한 구절을 쓰려는데 붓이 제 멋대로 움직이더니 점점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시를 잔뜩 달고 있는 장미 넝쿨. 잎사귀 뒤에 숨은 작은 꽃망울까지 그리며 목선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내가 뭘 하고 있나. 이러다가 여인의 팔까지 그려 넣을지도.
‘정말 죄송해요. 정말이에요. 맹세할게요.’
그녀의 입에서 절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말이어서 내심 깜짝 놀랐다. 그녀의 눈빛은 열 번이라도 믿고 싶을 만큼 아름답고 깨끗했고 가늘고 하얀 팔은 안쓰러웠다.
하지만 혼인 첫날 밤, 그녀가 한 말을 잊을 정도는 아니다.
목선후는 학습능력이 너무 좋은 사람이고 첫날밤의 일은 자신의 몸으로 배운 산지식이었으므로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몸에 손을 대면 죽어 버리겠다고 했다.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을 보는 눈초리로 그와 자신의 알몸을 노려보면서.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바로 직전 뜨겁고 찐득하고 황홀한 운우지정을 나눈 여인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첫 경험의 뜨거운 흥분이 가시기도 전에 찬물을 뒤집어쓴 그는 다시는 그녀에게 손을 대지 않으리라 맹세했었다.
내가 이렇게 나약했던가? 얼마나 됐다고 그 맹세를 하찮게 던져 버리고 싶지? 이래서는 안 돼.
목선후는 새 종이를 펴서 마음을 가다듬고 논어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 줄 쓰고 문득 안안용이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선아.”
실바람 한 줄기도 느끼지 못할 만큼 가볍게 서까래에서 뛰어 내린 일선이 목선후 앞에 반 무릎을 꿇었다.
팽나무 위에 있다가 안안용에게 들킨 뒤로 일선은 은신술에 더 신경을 쓴 끝에 나비처럼 가볍게 착지할 수 있게 되었다.
아씨께서 눈치챌 정도라면 그동안 내가 얼마나 부주의했던 거야? 마음먹으니 되잖아.
자신의 실력에 뿌듯해진 일선이 주군의 입을 올려다보았다.
“네, 공자님. 분부하십시오.”
“만술이란 자를 아느냐?”
“만술 말씀이옵니까?”
“그래. 만. 술.”
일선이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더듬었지만 한 사람도 떠오르지 않았다.
“만중이라는 자는 아옵니다만 만술이라는 이름은 처음이옵니다. 송구하옵니다. 지금 이선에게 알아오라고 하겠습니다.”
“그래. 아씨가 아는 자이니 아씨 근처에서 찾아보도록 해라. 매우 부유한 자일 것이다. 그리고 냥아치란 말도 무슨 뜻인지 알아오너라.”
공자님께서 팽문에게는 아무 뜻도 없는 말이라고 하셔 놓고 또 생각을 바꾸셨네. 냥아치라는 말은 어물전으로 가서 물어봐야겠어.
“네.”
일선이 메뚜기처럼 가볍게 방을 빠져나가자 목선후는 다시 먹을 갈기 시작했다.
목선후는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해서 왕희지 체로 논어를 쓰기 시작했다. 그가 제일 쓰기 싫어하는 서체가 왕희지 체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
한밤중 반쯤 무너진 초막 안.
안 부자가 방에 들어가자 미리 와 있던 어사중승이 의자에 앉은 채로 반갑게 맞이했다.
“목중승 나으리.”
“사돈어른, 어서 오십시오.”
어사중승이 한 손으로 안부자의 손을 잡자 안부자가 두 손으로 맞잡았다. 그 손을 어사중승이 다시 잡아서 두 사람의 손은 한 묶음이 되었다. 한 십 년 만에 만난 형제들처럼 반가우면서도 머쓱해진 두 사람은 동시에 손을 놓고 허둥댔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어색해진 손을 감추기 위해 찻잔을 든 어사중승이 물었다.
“소인이야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송구합니다. 딸자식이 이렇게 친정에 돌아와 있어서 제가 나으리를 뵐 면목이 없습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리고 나으리라고 부르지 마시라니까요. 엄밀히 따지면 사돈어른께서 제게 하대를 하셔야 맞습니다. 왕자님의 장인이 아니십니까?”
“아이고, 무슨 그런 말씀을.”
안부자가 손사래를 쳤지만 뿌듯한 표정이 스쳤다. 입꼬리가 실룩거리고 괜히 어깨가 으쓱하다. 왕자님의 장인이래.
“제 딸자식의 부족함이야 왕자님께서 이미 아시고 계시니 괜찮다 해도 제 내자가 자꾸 실수를 하니 요 며칠 사이에 소인의 간이 콩알만 하게 쪼그라들었습니다. 그분께서 아시면 내자의 목숨이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식사 자리에서 사위를 쥐 잡듯 비난한 아내를 생각하니 지금도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다가는 비밀을 숨기지 못하고 아내를 말릴까 봐 아들들과 함께 방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아내에게 들은 내용은 더 기가 막혀서 안부자는 혼자 감당할 선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사중승에게 몰래 만나자고 했다.
“왕자님께서 누추한 우리 집으로 오신 뒤로 내자가 아무것도 몰라서 자꾸 실수를 하니 내자에게도 사실을 말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안 됩니다. 안사돈의 성정으로 보아 내막을 알게 되면 이전처럼 자연스럽게 대하기 어려울 겁니다.”
어사중승이 사부인을 보는 안목이 심히 왜곡되었군.
보통 때는 그렇게 막나가지는 않는다고. 단지 안용을 생각할 때는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다는 게 문제지. 그 점은 인정한다.
“알겠습니다. 내자에게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풍월문주에 관해서 의논드릴 것이 있습니다.”
안부자의 말에 어사중승이 얼굴을 바싹 댔다.
“그렇지 않아도 여쭙고 싶었습니다. 궐향이 누구입니까? 내기는 왜 하셨습니까?”
“궐향은…….”
한참 안부자이 설명을 듣던 어사중승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왕자님께는 말씀 드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분명히 말리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왕자님은 젊고 순수하시지요. 스스로 떳떳하시니 계략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만 교토삼굴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작은 토끼도 살기 위해 굴을 세 개 파놓는다는데 우리도 하나는 파놓아야지요.”
“하지만 전하께서 아직 정정하신데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저들이 알게 된다고 해도 쉽게 덤비지는 못할 것입니다. 증거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나으리. 왕자님께서 평범하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너무 잘 나셔서 문제 아닙니까?”
안부자의 말에 어사중승이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의 생각이 너무 안일했다. 왕자님을 아끼시는 전하의 뜻이 아무리 분명해도 세상일이 어디 예상한 대로 흘러가던가?
불경한 말이지만 전하께서 갑자기 어떻게 되시면 왕자님께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자신의 집안이야 처음에 핏덩이인 왕자님을 전하의 손에서 직접 받을 때 이미 각오했다. 그때 모든 고민은 끝났다. 만약을 대비해서 전하의 교지도 이미 받아두었으니 최악의 상황이라도 식솔들의 목숨은 붙어 있게 될 것이다. 천리 밖으로 유배를 가는 정도로 그치겠지.
하지만 혼인으로 묶인 안부자는 다르다. 잘못했다간 딸의 인생이 홀라당 날아갈 테니까. 딸의 인생뿐인가? 안씨 집안이 폭삭 망해서 볍씨 한 알도 남지 않을 걸.
게다가 안부자는 자신처럼 목숨을 부지하는 정도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다. 어사중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돈어른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시면 저는 모르는 척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잠시 몇 마디 더 나눈 후 두 사람은 조용히 초막을 빠져나갔다. 인적이 사라진 초막에는 밤 부엉이 소리만 아련하게 울렸다.
***
자살골을 넣고 의기소침해진 어머니는 다음 날부터 별당 식솔들은 저녁식사를 따로 하라고 허락했다.
어머니 자신이 사위 얼굴 보기가 민망해서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네 아버지가 당분간 나보고 목 서방에게 한 마디도 하지 말란다. 어기면 친정으로 보내 버리겠대.”
“에이, 장난이시겠죠.”
“아니야. 이번엔 진짜야. 그렇게 진지한 네 아버지는 네가 혼인할 때 이후로 처음이었어. 근데 늘 실실 웃다가 딱 진지해지니까 십 년은 더 젊어 보이더라.”
어머니가 몽롱한 눈빛으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감정에 솔직해질 수 있는지 부럽기만 하다.
나는 서른이 되도록 한 번도 감정이 이끄는 대로 행동해 보지 못했는데.
그러다 보니 감정이 진짜로 메말라 버린 모양이다.
“오늘 저녁 오골계탕을 끓일 거야. 처음에는 장어를 구하려고 했는데 며칠 걸린다지 뭐니. 그래서 용봉탕을 끓이려고 했는데 자라가 없다는구나. 내일 가져오겠대. 그래서 오늘 저녁 급한 대로 오골계탕을 끓이기로 했어. 별당에도 보낼 테니 목 서방에게 꼭 먹이고 그다음은 말 안 해도 알지?”
말 안 해도 아는 게 뭐지?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나?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어머니의 얼굴을 보니 이미 이쪽으로 안안용과 통한 적이 있나 보다. 어디까지 통했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어머니, 내일 제게 맞는 심의가 필요해요.”
“왜?”
“목 서방이랑 시회에 참석하려고요.”
“네가 시회에 간다고? 시를 즉석에서 쓰고 낭송한다는 그 시회? 어머나, 별일이구나. 우리 집에서 열릴 때도 듣기 싫다고 중간에 나가 버린 애가 웬일이라니?”
안씨 집안에서 시회가 열렸다는 사실이 더 이상한데요.
“목 서방이랑 가니까 괜찮아요.”
“하긴 목 서방 얼굴만 쳐다보고 있으면 지루한 시회라도 견딜 만하겠다. 안신이 옷 중에서 제일 새 것으로 준비해 주마.”
허허. 나는 김빠진 웃음을 지어 주고 어머니 방을 물러나왔다. 정말 솔직한 오 여사다.
***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내 방에 온 목선후는 자신 앞에 놓인 오골계탕을 보고 천천히 시선을 들어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고양이 눈만 세로로 쪼개지는 줄 알았는데 사람 눈도 저렇게 되는구나. 원래는 길고 시원했던 목선후의 눈이 표범의 눈처럼 위험하게 빛났다.
“이게 뭡니까?”
얼음장 같은 음성으로 목선후가 물었다.
왜? 뭐가 문젠데?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왜 성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