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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12화 (12/92)
  • 12화. 내 살이 아니라서

    교실 밖 뜰에는 넝쿨장미가 푸른 잎사귀를 달고 담벼락을 스멀스멀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장미 가시 하나를 팔에 박는 것으로 산뜻하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자기 살을 깎는 거 아니냐고? 뭐, 이 정도야. 아주아주 작은 가시를 사용할 거니까.

    오후에 한 시진 동안 복습을 한 후 동생들을 훠이훠이 뜰 밖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담벼락에서 가시 하나를 똑 땄다.

    소매를 걷고 하얀 팔에 가시를 살짝 찔렀다. 아파라.

    내 살이 아니라서 깜빡 잊었다. 근육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말랑말랑한 체지방으로만 이루어진 안안용의 피부는 얼마나 하얗고 부드러운지 조금만 거친 천이 닿아도 쓰라리다.

    장미 가시가 그냥 스치기만 했는데 감각이 새파랗게 살아나며 아프다고 소리쳤다. 아픈 건 난데 안안용, 미안, 이라고 중얼댔다.

    장미 가시 위에 다시 소매를 덮고 교실로 되돌아갔다.

    “공자님.”

    자신의 붓과 벼루를 정리하던 목선후가 고개를 들었다.

    “팔에 뭐가 들어갔나 봐요. 너무 아파요.”

    팔을 내밀고 다가가자 목선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무슨 수작이냐, 는 눈빛이다.

    “하녀들은 어디 갔습니까?”

    “다 바쁜데 이만한 일로 여기까지 부를 수는 없지요. 아야!”

    실제로 아팠다. 내 표정에서 진정성을 본 목선후가 다가왔다.

    “어떻게 아픕니까?”

    “여기가 따끔거려요.”

    반대편 손가락으로 아픈 부분을 가리켰다. 소매를 상당히 걷어 올려야 되는 위치라 어쩔 수 없이 내 팔을 잡을 것이다.

    “어디 봅시다.”

    목선후가 폭이 넓은 소맷자락을 위로 올렸다. 하얗고 여린 손목이 드러나고 가는 팔이 나타나자 아주 잠깐 주저하다가 소매를 더 위로 올렸다.

    내 맨살에 손가락 끝도 안 스치네. 뭐야? 내가 싫은 거야, 여자가 싫은 거야? 조만간 알아내 주겠어.

    “아야!”

    장미 가시는 자신이 뽑힐 거라는 위기감에 더 몸을 비틀었다. 마침내 장미 가시를 발견한 목선후가 손끝으로 가시를 집으려고 했다.

    안 되지, 안 돼.

    몸에서 힘을 빼고 놀고 있던 팔로 목선후의 앞섶을 잡았다.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면서.

    속으려나? 안 속겠지?

    유치원 다닐 때 예방접종을 맞으면서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늘 끝을 봤던 애가 나였다. 같이 간 옆집 아이가 미리 겁을 집어먹고 펑펑 우는데 나는 주사 맞고 나서 엄마가 사준다는 햄버거만 떠올렸다.

    “보지 마십시오.”

    속네. 속아. 내 계략이 우수해서인지 연기가 출중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목선후는 내가 자신의 가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리로 앉으십시오.”

    목선후가 내 양팔을 잡고 부드럽게 의자에 앉혔다.

    그 순간 다시 떠오른 일 등급. 어젯밤보다 더 분명하게 보이는 밝은 그림자는 토성을 감싼 동그란 고리 같은 모양으로 일 등급을 싸고 있다. 이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이게 무슨 뜻일까?

    놀라서 목선후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공자님, 지금 어떤 기분이세요?”

    “……?”

    “기분이 좋으신가요? 아니면 불편하신가요?”

    저런 모습은 지금 목선후의 기분 때문일 거다. 아니면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나타내거나.

    목선후는 장미 가시를 손가락으로 집은 채 미간을 찌푸렸지만 나는 집요하게 답을 기다렸다.

    새로운 문제를 맞이하는 수능 명강사의 자세로. 이런 자세 앞에서 끝까지 안 풀린 문제는 없었다. 내 집요한 노력 앞에서 모든 단어와 문장들이 꼭꼭 숨겨 놓은 문법을 토해 내고야 말았다.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정신이 혼미해진 모양입니다. 돌아가서 쉬세요. 지난번처럼 늦게까지 복습하지 말고.”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닌데요.”

    “의욕은 좋습니다만 그러다 쓰러집니다.”

    “그럴 일은 없어요.”

    하루 열 시간 강의를 했어도 쓰러지지는 않았다. 말을 너무 많이 해서 편도선이 붓자 아예 편도선을 수술로 제거해 버렸다.

    나, 그런 여자야. 자꾸 무시하지 말라고.

    “안용, 가서 쉬어요. 그대 말대로 그대가 과거를 보는 것은 아니니까.”

    의자에서 일어나 그의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그러면…… 내가 싫은가요?”

    “…….”

    목선후는 한 발 뒤로 물러서더니 인상을 팍 쓰고는 말릴 사이도 없이 몸을 휙 돌려 교실을 나가 버렸다.

    내가 너무 성급했나? 강의를 할 때는 이런 집중력이 도움이 됐는데.

    밖에서 기다리던 팽문이 들어와 책과 벼루를 챙겼다.

    “팽문아!”

    “예, 아씨.”

    “너는 언제부터 공자님을 모셨지?”

    “어려서부터 모셨습니다.”

    4등급이라 그런지 잘도 요점을 피해서 대답을 하네.

    “어렸을 때부터 공자님을 모셨다면 공자님이 네게 공부를 가르치셨니?”

    “네?”

    “네가 아는 게 많은 거 같아서 말이다.”

    “아닙니다. 소인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뭐, 말하기 싫다면야.

    이 세계에서 공부를 좀 해 보니까 현대와 다른 점이 아주 많았다. 정보가 넘쳐나는 현대에서는 부교재나 참고서, 사전, 듣기 교재, 영상 등이 풍부해서 마음만 먹으면 혼자서도 공부를 할 수가 있다. 비록 느리고 어렵겠지만.

    여기서는 선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시작도 못 한다.

    그러니 어렸을 때부터 붙어 있었다면 목선후가 팽문을 가르쳐 준 거다.

    팽문은 4등급이다. 하인인데.

    혹시 빛나는 고리는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공부를 가르치는 능력을 나타내는 것일까?

    나는 그가 나를 만졌을 때 고리가 나타났기 때문에 고리는 그의 기분을 나타내거나 우리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판단했다. 너무 섣부른 판단이었다.

    등급이 학습능력이라면 고리는 가르치는 능력과 더 가깝지 않을까?

    아무래도 이쪽이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틈틈이 가르쳐서 하인을 사 등급으로 만든 목선후가 가르친다면 등급외인 내 동생들도 희망이 있을지 모른다.

    신이 나서 교실을 나오는데 팔이 따끔거렸다. 휘리릭 비단 소매를 걷고 보니 빨갛게 부풀어 있다. 아프다.

    ***

    저녁 식사를 하는데 내 옆에 앉아 있던 목선후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상처에 연고는 발랐습니까?”

    고개를 저었다. 연고가 있는지도 몰랐고 다른 데 정신이 팔려서 아픈지도 몰랐다.

    “아, 생각하니까 아프네.”

    갑자기 젓가락 잡기가 힘들어졌다.

    “왜 그러니? 안용아? 어디 보자.”

    안안용을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나르시시스트로 만든 어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 걸어왔다.

    내 팔을 잡고 쓱 소매를 올리더니 빨개진 부위를 보고는 목선후를 찌릿 노려보았다.

    “목 서방, 자네는 애가 이런 꼴인데 알면서 그냥 두었단 말인가?”

    칼에 찔린 것도 아니고, 큰 병도 아닌데 그럼 뭐 어쩌라는 건가요, 오 여사님?

    “내가 얘를 어떻게 키웠는데, 자네는 얘한테 이럴 수가 있나?”

    느닷없는 어머니의 말에 목선후도 놀랐지만 아버지와 동생들은 밥을 가득 넣은 입을 쩍 벌렸다.

    이게 갑자기 무슨 상황이야? 이야기가 어떻게 그리로 뛰어?

    아, 맞다. 파상풍의 위험이 있구나. 릴케라는 시인이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었지. 하지만 어머니가 이런 사실을 알 리는 없는데.

    “아니, 어머니. 이건 장미 가시에 찔려서…….”

    “알고 있었으면 진즉 연고라도 발라 주지. 얘를 좀 보게. 얼마나 아팠겠나? 자네는 신랑이 되어서 그냥 두면 어떡하나?”

    그러는 어머니도 내 팔을 잡고만 있잖아요.

    “어머니, 이건 목 서방 탓이 아니에요.”

    “청아, 연고를 가져오너라. 내가 참는 데도 한계가 있네. 자네 안용이를 혼자 자게 둔다면서? 이게 말이 되나? 우리 애가 어디가 부족해서 소박을 놓는단 말인가!”

    어라?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분노는 이것 때문인가 보다.

    내가 눈을 둘 데가 없어서 허둥대자 아버지가 손짓으로 동생들을 내보냈다.

    졸지에 밥을 먹다가 젓가락을 든 채로 동생들이 쫓겨나가고 시종들과 아버지까지 방을 나가 버리자 나와 어머니와 목선후만 남았다.

    주제가 19금이라 동생들을 내보낸 것은 이해가 되는데 왜 아버지까지 나가 버렸지? 알고 보니 우리 아버지 안부자도 부끄럼을 타는 소심한 남자였어.

    연고를 가져온 하녀까지 서둘러 나가고 나자 무거운 침묵이 방 안을 짓눌렀다.

    “안용이는 내가 오 년을 매일 치성을 드려서 낳은 아이일세. 우리 집안에 하나뿐인 딸이고. 자네 집안에서 우리가 평민이라고, 무식하다고 무시하는 걸 알지만 그래도 자네 한 사람 쓸 만한 거 믿고 보냈는데 이 꼴이 뭔가? 우리 애가 어디가 부족해서 자네에게 이런 대접을 받고 살아야 하나? 말해 보게.”

    쓱쓱 연고를 바르던 어머니가 본격적으로 내 옆에 앉아서 목선후를 노려보았다.

    어머니의 단어 사용이 막장드라마 급이다. 며칠 전만 해도 사위에게 간이고 쓸개고 빼줄 것 같더니.

    “약속했던 혼수보다 두 배는 더 보냈네. 앞으로도 보낼 것이고. 이 정도 재물이면 왕자님도 사위 삼았을 거야.”

    아우, 낯부끄러워. 만수르도 감히 못 할 말을.

    “어머니.”

    “이 착한 애가 말을 안 해서 전혀 몰랐네. 그런데 우리 집에 온 뒤 한 번도 안용이 방에 들지 않았다면서? 세상에! 우리 애가 자네 집에서도 이런 대접을 받고 살았던가? 이유가 무엇인가? 입이 있으면 말해 보게.”

    이런 프라이빗한 말을 어떻게 하냐고요!

    확확 달아오르는 얼굴을 들어 목선후의 표정을 살폈다. 우리 집에서 너를 돈으로 샀다, 라는 말을 듣고 앉아 있는 남자의 표정은 정말 보고 싶지 않았지만 얼른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줘야 하니까.

    목선후의 얼굴은 핏기가 완전히 사라져 유령처럼 보였다. 하지만 입술을 깨물거나 망설이지 않고 조용히 대답했다.

    “제가 아니라 안용이 원했습니다.”

    짝!

    그 말을 듣자마자 어머니가 내 등짝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사위에게 미안한 감정까지 잔뜩 손바닥에 실어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너! 미쳤니? 너 제정신이니? 너는 혼인이 장난인 줄 아니? 이 철없는 것아! 아직까지 한 공자를 못 잊는 거냐?”

    오 여사님, 정말 자살골을 확실하게 넣으시네요.

    “어머니!”

    뒤늦게야 자살골을 넣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어머니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면서 방을 나가 버리고 우리 둘만 남았다.

    패잔병처럼 피폐해진 나는 목선후의 목울대 아래만 보며 주절거렸다.

    “저, 미안해요. 어머니 말씀이 지나쳤어요. 만수르도 못 할 말을 막 그렇게 하실 줄은 몰랐어요. 정말 정말 죄송해요. 절대, 절대 한 공자와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지금도 아무 감정 없고요. 앞으로도 없을 거예요. 진짜예요. 맹세할게요.”

    한인수가 김인수라도 사제지간 그 이상은 아니야. 정말로. 우리 나이 차이가 열 살이 넘는다고.

    전처럼 창백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굳은 표정의 목선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요. 내 말을 안 믿는 거예요?”

    헐떡거리며 내가 앞을 막아섰다.

    “안 믿습니다.”

    “왜요? 왜 안 믿는 건데요?”

    태어나서 지금처럼 열렬하게 사과해 본 적이 없다고. 난 백 퍼센트 진심이야. 너무 잘생겨 부담스러운 얼굴인데 눈빛까지 미묘해진 목선후가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좋아, 내 눈을 잘 봐봐. 내 깨끗한 진심이 보이지?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믿고 싶어지니까. 하지만 나는 한 번 배운 것은 절대 잊지 않는 사람이라서.”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목선후가 가 버리자 힘이 빠진 나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대체 뭘 잊지 못한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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