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등급은 배신을 안 하거든
“뭐 하십니까?”
“앗, 깜짝이야.”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니가 지어 준 달걀색의 반짝이는 비단 심의를 입은 목선후가 담벼락에 붙은 커다란 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달빛에 물든 얼굴이 유령처럼 하얗다.
언제부터 서 있었지? 내가 뜰을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봤을 거 아냐. 그렇게 나를 알은체하기가 싫었나?
“공자님은 여기서 무엇을 하세요?”
그에게 다가가며 되물었다. 내가 그를 ‘서방님’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어색해서 부를 수가 없다. 아직까지는 정오나 말순처럼 ‘공자님’이라고 부르는 게 편하다.
내가 성큼 다가가자 그도 나무 그늘에서 나와 달빛 아래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높고 곧은 콧대 아래 도톰한 입술이 오늘따라 두드러진다.
평소에도 비상식적인 외모였지만 지금은 배경 때문에 더 몽환적이다. 게다가 이 커다란 나무는 달콤한 향기를 끈질기게 뿜고 있다.
어지러울 정도다.
“무슨 나무인가요? 냄새가 좋네요.”
“여기는 그대의 집인데 나에게 묻습니까? 팽나무입니다.”
자기 집에 있는 나무 이름도 모른다고 비웃는 거야?
목선후, 네가 21세기 한국으로 와 봐. 넌 등급외도 못 된다고. 그리고 이 집은 나도 온 지 며칠 안 됐어.
“이 밤중에 왜 나왔습니까?”
“그냥요.”
현대에서 알던 아이가 나처럼 이 세계로 빙의한 것 같아서 너무 황당하고 놀라워 잠이 안 온다고 말할 수…… 는 없지.
그 순간 바람이 휙 지나가자 작은 팽나무 꽃들이 푸르르 떨어져서 마당 위를 굴러갔다.
완벽한 봄밤이다. 현대에서는 전혀 누리지 못했던 이 간질간질하고 아련한 느낌.
나무를 올려다보는 내 귀에 목선후의 음성이 울렸다.
“이제 들어가십시오. 나도 자야겠습니다.”
벌써?
“저기, 정 공자가 집에 갔어요. 내일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서요. 혹시 동생들 공부를 하루만 봐주실 수 있나요?”
그가 멀어지기 전에 재빠르게 말했다.
“…….”
그의 침묵에 나무를 보던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어두워서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싫은 것일까? 그래서 정 공자가 그분이 할 리가 없다, 라고 말했나 보다.
“안 하셔도 돼요. 복습시키면 되니까요. 사실 애들이 좀 많이 답답하실 거예요.”
오전 두 시진과 오후 한 시진. 합해서 겨우 여섯 시간이지만 안안용의 동생들은 죽을 만큼 힘들어한다. 네 마리의 포메라니안 새끼가 빙의한 것처럼 빨빨거린다.
나야 학원장의 내공에다가 강남 빌딩 스무 채라는 채찍이 있어서 그럭저럭 버티고 있는데 놀라운 것은 정 공자다.
대단한 인내심과 창의성으로 애들을 가르친다. 예상대로 이상적인 교사다.
하지만 나는 일 등급인 목선후가 가르치면 어떨지 무척 궁금했었다.
“그럼…… 주무세요.”
실망해서 돌아서려는데 목선후가 내 팔을 가볍게 잡았다.
“기다려요.”
그 순간 무엇인가 팟! 하고 떠올랐다.
이게 뭐지?
이전에 본 적 있던 밝은 일 등급을 달빛 혹은 안개 같은 무엇인가가 둘러싸고 있었다. 곧 사라졌지만 처음 본 모습이라 굉장히 놀랍고 이상해서 가슴이 퉁퉁 뛰기 시작했다.
다른 세계로 왔기 때문에 능력에 변화가 생겼나? 아니면 빙의를 해서 몸과 영혼이 맞지 않아 시각이 흐려졌나?
다시 한번 볼 수 있다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을지도.
내 팔을 잡은 목선후의 크고 마른 손등에 손가락을 댔다. 혹시 다시 떠오를까 봐.
하지만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고 내 손가락이 닿자 목선후는 불에 댄 듯 손을 홱 뺐다.
내가 잡으면 소용이 없고 상대방이 나를 만져야 나타나는가 보다.
방금 일어난 현상을 파악하느라 얼빠진 표정으로 내 팔과 그의 손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데 목선후가 목을 가다듬었다. 아예 두 손을 뒤로 돌려 뒷짐을 지고 있다.
“흠흠, 나는 누군가를 가르쳐 본 적이 없습니다.”
“아, 네.”
“내가 잘못 가르치면 어쩝니까?”
“그럴 리가요.”
주저 없이 튀어나온 대꾸에 처음에는 놀라더니 길고 아름다운 눈매를 좁혔다.
“그렇게 나를 믿습니까?”
“네.”
너를 믿는 게 아니라 너에게 나타나는 등급을 믿는 거지. 사람은 배신을 하지만 등급은 배신을 하지 않더라고. 내가 본 등급에서 틀린 학생을 한 번도 못 봤다.
“그렇다면.”
“도와주시는 건가요?”
“그러지요. 조식 후에 가겠습니다.”
한 번 더 내 팔을 잡아 달라고 하면 잡아 주지도 않으면서 핀잔만 하겠지? 머뭇거리는 사이 그가 팔을 들어 내 방 쪽을 가리켰다.
“먼저 들어가십시오.”
“먼저 들어가세요.”
내 말에 목선후는 주저하지 않고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가 잡았던 팔에 가만히 손을 올려 보았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당연하지. 바보 같아.
내 팔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내 팔을 잡았기 때문에 떠오른 건데.
그렇다면 그와 내가 접촉을 하면 그런 일이 또 일어날까? 저번에 서재에서 내 머리카락에서 장신구를 떼어 냈을 때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머리를 식히려고 나왔다가 더 복잡해졌다. 몸을 돌이켜 그가 서 있던 팽나무로 다가갔다.
가까이 가자 나뭇가지가 크게 흔들리며 무엇인가가 휙 담 너머로 날아갔다. 고양이라면 무척 큰 고양이다.
우수수 떨어지는 작은 꽃잎을 밟으며 굵은 나무 기둥을 한 바퀴 돌다가 담벼락 너머를 향해 불렀다.
“냥아치, 어디 있니?”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것을 보니 고양이는 완전히 가 버린 모양이다. 어깨에 붙은 꽃잎을 털며 터벅터벅 뜰을 가로질러 내 방으로 돌아왔다.
***
안안용이 방으로 들어가서 불을 끈 후에 담 너머에 쭈그려 앉아 있던 검은 그림자가 일어섰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어. 아씨가 뭘 알고 팽나무로 다가오신 건 아닐 텐데. 그 정도로 내 은신술이 허접하지는 않잖아.
안안용이 꽃향기에 취해서 다가왔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일선이다. 그의 코는 피 냄새에만 민감하다.
일선은 보통 지붕이나 서까래 위, 혹은 커다란 나무 위에서 공자를 지킨다. 평소처럼 팽나무 가지에 앉아 있다가 공자님께 오늘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요새 궐향이라는 인물을 파고 있는데 좀처럼 빈틈을 찾을 수가 없다고.
풍월문처럼 깊은 산속에 은둔해 있는 신비문파가 왜 환성에 있는 상가를 탐내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공자님은 분명 흑막이 있다고 하신다.
안부자 같은 인물이 술에 취해서 큰 내기를 했다는 말을 믿는 사람은 순진한 오씨 부인과 아씨 형제들뿐으로 다른 사람들은 반은 의심하면서 사태를 주시하고 있다. 중문 상가 스무 채의 변화는 상인들에게 보통 큰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선은 커다란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팽나무에 올라가서 자리를 잡았다.
목 공자의 방에서 불이 꺼지자 공자의 곁방 문이 열리고 팽문이 나오더니 팽나무 아래에서 위를 보고 작게 소리쳤다.
“냥아치.”
“그게 무슨 뜻이야?”
“아씨가 그러셨잖아. 냥아치라고.”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모르지. 그냥 입 밖으로 내니 기분이 좋아. 냥아치라. 갈치나 꽁치 같은 생선 이름 같은데 운율이 있잖아. 냥아치. 냥아치.”
“시끄러.”
그 순간 구름이 달빛을 가리자 뜰의 절반이 어둠에 잠겼다.
“일선아, 궐향의 목적이 무엇인지 빨리 알아 와.”
얼굴의 반이 그림자에 가려진 팽문이 중얼거렸다. 공자님의 주변에 정체불명의 인물을 허용할 수는 없다. 굵은 나뭇가지에 누운 일선이 그래, 라고 대답했지만 너무 작은 소리여서 나뭇가지를 흔드는 밤바람 소리처럼 들렸다.
***
다음 날 안씨 학당.
U자 형태로 배치한 책상 덕분에 나는 동생들의 모습과 선생의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이런 배치가 익숙지 않은 정 공자는 첫 수업에는 시선을 어디로 둬야 할지 덤벙대다가 나름대로 정리를 했는지 오후에는 벌써 안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곧 이런 형태의 배치가 학생들을 통제하기에 얼마나 효율적인지 알아챘다.
목선후는 교실을 훑어보더니 자연스럽게 앞으로 가서 교사의 책상에 앉았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동생들이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쳤다.
“와! 매형이다!”
“매형!”
“와, 신난다!”
매형이 온 것이 왜 신나는 일일까? 정식 선생님이 아니니 좀 더 느슨하리라고 생각하는가 보다. 임시 교사나 교생은 확실히 그런 오해를 주기도 하지.
첫째부터 셋째까지 환호하는데 넷째는 입을 벌린 채 목선후를 올려다보기만 한다.
넷째가 의자에서 일어나 주춤주춤 다가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 집에서 목선후에게 선입견을 가지지 않은 유일한 존재가 저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애들은 잘난 매형을 보고 환호를 해도 다가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돈은 많지만 무식한 우리 집안과 달리 목선후는 ‘공자님’이라고 불리는 신분에 속하기 때문이다.
목선후의 저세상 외모나 소년 수재라는 명성 때문에 안씨 집안의 시종들도 알아서 조심하는 것 같고.
나는 오늘 어떻게든 목선후가 내 팔을 잡도록 해서 어제 잠깐 스쳐본 등급을 다시 볼 계획이라 잔뜩 긴장하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매형, 아침 식사는 잘하셨습니까?”
목선후 앞에 선 넷째가 허리를 굽히며 어른스럽게 물었지만 태도가 너무 어색해서 모두 낄낄낄 웃었다.
처음에는 냉정하던 목선후의 표정이 점점 풀어지더니 따뜻한 미소가 어렸다.
“식사는 잘했네, 처남. 자, 자리에 앉게.”
목선후는 어린 처남을 존중해서 반존대를 했는데 넷째는 기대하지 않고 있다가 감격했는지 입을 쩍 벌렸다. 귀여워 미치겠다.
세 살인 막내를 빼고 자신을 높인 사람은 시종들뿐이었으니 넷째가 감격할 만도 하다. 게다가 막내는 존댓말은커녕 말 자체를 잘 못한다.
엉아, 엉님, 이게 막내가 형들을 부르는 말의 전부다.
말이 너무 늦어서 걱정하는 사람은 나뿐이고 이 시대 사람들은 무한 긍정의 에너지를 가지고 언젠가는 말문이 트이겠지, 하고 있다.
모르는 게 약이다. 아는 나만 은근히 걱정할 뿐.
넷째가 자리에 앉은 후 목선후가 나를 쳐다보자 교장 겸 학생 겸 보조 교사인 내가 아이들에게 책을 펴라고 말했다.
그 후로는 내 도움 없이 목선후가 알아서 척척 애들을 가르쳤다. 일 등급답다.
그런데 좀체 내 옆으로는 오지 않아서 그가 내 팔을 잡게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공부하는 틈틈이 그가 내 팔을 잡게 하는 방법을 생각해 봤다.
1번, 그 앞에서 쓰러진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밀어 부축하겠…… 지만 안 그러면 나는 저 딱딱한 마룻바닥에 박치기를 하게 된다. 싫다. 몸이 20도 이상 기우는 건 무조건 싫다. 옥상에서 거꾸로 떨어진 트라우마가 아직도 생생하다.
2번, 살살 녹는 미소를 띠고 다가가서 내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아 내 팔에 얹는다.
갑자기 원치 않는 기억이 소환되었다. 내가 한 발 다가가자 그는 두 발 뒤로 물러났었다. 안안용이 할퀴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거절당하는 건 언제나 기분 나쁘다.
3번, 좋은 생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