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10화 (10/92)

10화. 그분이 그런 일을 하실 리가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할 거 아니야.”

“빚이 아니라 투자였소.”

“그게 그거지. 돈을 가져갔으면 가져간 거야. 가져갔으면 돌려줘야 하는 거고. 안 그렇소, 여러분?”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소리치며 웃는 사내는 화려한 비단옷에 옥패를 차고 있었다. 이제 나도 저 정도 옷차림이면 귀족임을 안다.

평민인 안부자는 비단옷은 입을 수 있지만 귀족이나 관리들처럼 옥패를 찬다거나 황금색 동곳으로 상투를 틀지는 못한다.

“아씨, 한 공자님이세요.”

정오의 음성이 기어들어 갔다. 나도 그가 누군지 이미 짐작하고 있다.

김인수와 똑같은 얼굴이니까.

이게 말이 돼? 인수라는 이름 때문에 친근감을 느꼈지만 그 아이가 나처럼 빙의했다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가슴이 툭툭 뛰기 시작했다.

정말 김인수일까? 나와 안안용은 다르게 생겼는데 왜 저 아이는 똑같이 생겼지?

그렇다면 이 세계로 떨어진 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저 아이 때문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인수의 발목을 안고 있다가 얼결에 같이 떨어진 거니까.

그랬을지도.

“아씨, 어떡해요?”

“기다려 봐. 저들이 갈 때까지.”

발로 차기는 해도 심하게 차지는 않고 얼굴도 피한다. 그저 망신만 주려는 거다.

결국 한인수를 발로 차던 남자들은 돈을 갚으라, 는 말을 마지막으로 던지고 가버렸다.

한인수는 잠시 앉아 있더니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더러워진 회색 심의를 툭툭 털었다. 그리고는 맞은편에 서 있는 내게로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안안용을 좋아한다면서 좋아하는 여자에게 저런 차림으로 주저 없이 온단 말이지.

뻔뻔한 것은 현대의 김인수 같기도 하고. 걷는 모습은 좀 다르기도 하고.

“안용아.”

먼지가 묻은 입술을 비틀며 한인수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이름을 부르는 태도가 아주 자연스럽다. 김인수라면 쌤이라고 불렀을 텐데.

얘는 한인수의 기억까지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한인수? 기대감이 방향을 잃고 허둥댔다.

“한 공자님. 어쩌다가 이렇게 되셨어요?”

정오가 동정심이 가득한 음성으로 묻자 한인수가 부끄러운 듯이 눈을 내리깔았다

“인수야.”

너는 김인수니? 한인수니?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네가 명필방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기다렸어.”

나를 기다리다가 그놈들의 눈에 띄어서 매를 맞았구나.

“밥은 먹었어?”

한국 사람은 이게 인사거든. 네가 한국 사람이라면 반응할 거야.

***

김인수에게도 이렇게 자주 물었었다. 인수가 내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후 어느 날. 오후 4시 반.

그날따라 지하 주차장이 만원이라 근처 공용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건물 정면으로 걸어갔다.

그래서 발견할 수 있었다. 학원 건물 정문 앞에서 땅바닥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길고 날렵한 인수의 모습을.

“여기서 뭐 하니? 왜 이렇게 일찍 왔니? 아직 삼십 분이나 남았는데?”

늦지 않았는데 왠지 미안했다.

“다행이다. 내가 일찍 와서. 안 그랬으면 삼십 분이나 여기서 기다려야 되잖니.”

“삼십 분 정돈데요, 뭐.”

“응?”

“이미 세 시간이나 기다렸는데요.”

“…….”

인수가 벌떡 일어나 툭툭 엉덩이를 털었다. 세 시간이란 말에 놀라 엉겁결에 말이 튀어 나갔다.

“밥은 먹었니?”

“점심이요?”

“…….”

결혼도 안 했고 키우는 애도 없지만 많은 애들을 가르쳐서인지 몇 마디만 하면 그냥 알게 되었다. 이 아이는 점심도 안 먹고 내내 여기서 나를 기다렸구나. 갈 데가 없었구나.

맞은편 건물 이 층을 가리키며 카드를 꺼냈다. 내가 애용하는 중국집 간판이 뚜렷하게 보였다.

“짜장면 먹고 와. 삼십 분 안에.”

“돈 있어요.”

돈 있는데도 굶고 기다렸어?

“……같이 먹자.”

나는 이미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을 풍성하게 먹고 왔지만 인수랑 마주 앉아 짜장면을 또 먹었다.

목구멍에서 면발이 안 내려가겠다고 버티는 것을 그때 처음 겪었다.

그렇게 몇 번 기다리는 아이를 보고 나서 안 되겠다 싶어 인수 어머니에게 말을 했고 차라리 열쇠를 주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상한 다른 데 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라면서.

인수는 일찍 와서 컵라면도 먹고, 치킨도 시켜 먹었다. 늘 혼자였다. 담배는 피우는 거 같은데 학원에서는 냄새를 풍기지 않았다.

성적이 쑥쑥 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인수의 부모님은 작은 일탈을 허용했다.

그런데 2학년 3월 모의고사가 끝난 후, 모든 것이 변했다.

***

김인수와의 추억에서 빠져나온 나는 한인수를 올려다보았다. 저 눈동자 어디에 김인수의 슬픈 눈빛이 있지나 않은지. 그 아이도 나처럼 다시 한번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은 아닌지.

정말 알고 싶었지만 눈앞의 남자는 낯설기만 했다.

내 눈빛이 너무 강렬해서 이상했는지 김인수와 닮은 남자는 줄곧 내 시선을 피했다.

“밥 먹었어?”

“아니.”

이 세계에 짜장면집은 없지만 식당은 있을 것 같아서 두리번거렸다.

“아씨, 이제 가셔야 돼요.”

정오가 살며시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정오야, 돈 줘.”

짤랑거리는 은전 주머니를 정오의 손에서 받아서 한인수의 손에 밀어 넣었다.

“밥 먹고 깨끗한 옷 사서 입고 우리 집에 와. 동생들 선생님이 돼 줘. 부모님께 말해 뒀어.”

그러다 문득 이 사람이 김인수라면 내 집을 모를 것 같았다. 며칠 전에 우리 집에 온 사람은 원래의 한인수일 수도 있으니까.

“우리 집 알아?”

한인수가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볼 수 없어서 등급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인수의 대답을 재촉했다.

“언제 올 거야?”

“곧 갈게.”

“꼭 와.”

미적거리는 내 손을 정오가 끌었다. 마차를 탄 후에 휘장을 걷고 밖을 내다보았다. 아지랑이가 굼실굼실 피어오르는 길 위에 길쭉한 형체가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따가운 햇빛 때문인지 두 눈이 시큰해졌다.

***

심란한 마음에 오후 수업을 빼먹자 수업이 다 끝난 후 정 공자가 하인을 보내서 나를 불렀다.

의논할 일이 있다면서.

동생들이 내가 없다고 게으름을 피웠나 싶어 씩씩거리며 교실로 가니 학창의를 입은 정 공자가 책 보따리를 싸고 있었다.

벌써 동생들에게 질려서 그만두려는 것은 아니겠지?

“잘 오셨습니다. 집안에 일이 생겨서 지금 다녀올까 합니다. 내일 아침에 돌아올 수도 있고 더 늦을 수도 있습니다. 이 책들은 가는 길에 집에 있는 책과 바꿔 오려고 쌌습니다.”

정 공자의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등급외인 동생들에게 알파벳과 같은 기본 한자를 가르치면서 자신의 공부도 열심히 한다.

수업이 끝나고 저녁 식사를 한 후에도 밤늦게까지 책을 보다가 동생들이 모르는 글자가 있어서 물으러 가면 친절하게 가르쳐 주기도 한다.

태도도 당당하고 밝아서 대하기가 너무 편하다. 이런 사람을 놓치기는 싫다.

“공자님, 무슨 일인가요?”

“별일 아닙니다만 혹시 내일 늦게 오면 저 대신 공자들을 지도해 주시겠습니까? 복습을 시켜주시면 됩니다.”

“목 공자님이 있으니 그에게 부탁할게요. 그러니 염려 마시고 충분히 일을 마친 후에 오세요. 하지만 너무 오래는 말고요.”

정 공자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분이 그런 일을 하실 리가…….”

작은 소리인데 잘 들렸다.

“왜요? 그렇게 까다롭지 않은 사람이에요. 실력도 좋아요. 이미 아시겠지만요.”

아주 예전에 소년 수재로 유명했다니 이 사람은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말을 하고 나서야 들었다. 설명하려는데 정 공자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참. 혹시 이번 향시에 합격한 사람 중에서 아는 사람이 있나요?”

“왜 그러십니까?”

“이번 시험이 어땠는지 만나서 물어보려고요. 동생들이 시험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이번 향시에 합격한 사람을 만나면 등급을 알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등급이 변할지 모르니 시험이 끝난 지 얼마 안 되는 지금 봐야 한다.

“아씨께서 직접 보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 실력에 뭘 알겠냐는 뜻인 거야? 사람을 막 무시하네.

빙의한 후 공부 못한다고 하도 많이 무시를 당해서 이젠 내가 수능 명강사였던 것도 잊어버릴 지경이다. 이래서 안안용이 천자문이라도 공부하려고 했나 보다.

“네. 직접 봐야겠어요.”

“이달 스무날에 청운각이라는 다루에서 시회가 있습니다. 향시가 끝나고 첫 시회라 새롭게 생원이 된 자들이 많이 올 것입니다.”

역시 물어보기를 잘했다.

“스무날이요?”

나는 아직 이 시대의 날짜 감각을 익히지 못했다. 처음에는 사흘과 나흘도 헷갈렸으니까.

“닷새 후입니다. 여인은 시회에 참여하지 못하는 규정이 있으니 남장을 하십시오.”

“들키지 않을까요?”

설마 내가 남장을 해도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는 거야? 나 계속 이런 취급을 받고 참아야 돼?

“괜찮습니다. 알아도 모르는 척해 줍니다. 예전에 어떤 공주님께서 자주 남장을 하고 시회에 참석하셔서 그 뒤로 관습이 됐습니다.”

엄청 융통성 있잖아. 생각보다 좋은 세상이다. 여기.

“목 공자님과 같이 가 봐야겠네요.”

“그분이 가실 리가.”

자꾸 실언을 되풀이하네. 아무래도 나 들으라고 일부러 하는 거 같다.

목선후가 그런 시회 따위에는 참석을 안 하는 외톨이라는 뜻인지 부부 사이가 안 좋아서 나와는 동행을 안 할 거라는 뜻인지 헷갈려.

헷갈리지만 기분 나빠서 묻고 싶지 않았다.

목선후가 무시할 때는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았는데. 내 기분이 사람을 차별한다.

“틀림없이 갈 거예요.”

장담하고 교실을 나왔다. 그가 안 간다고 하면 첫째 동생인 안신이를 데리고 가도 된다.

***

저녁을 먹고 침상에 누워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았다. 봄볕이 환한 이계의 거리에서 만난 인수. 오늘 본 인수와 학원 옥상에서 본 인수가 자꾸 겹쳐서 마음이 빙글빙글 어지럽다.

오늘 인수를 봤을 때 눈을 마주치지 못해서 등급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김인수라면 일 등급이, 한인수라면 사, 오 등급이 뜰 거라고 예상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빙의한 사람의 등급은 본 적이 없으니까. 나는 빙의했지만 내 등급은 나도 못 본다.

김인수 생각에 뒤척거리다가 참을 수 없어 벌떡 일어났다. 잠옷 위에 이 시대 망토를 걸치고 방문을 열고 나갔다.

“아!”

황금색 달빛이 뜰을 가득 채우고 있지 않은가. 너무 아름다워 가슴이 벅차올랐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어디선가 달콤한 꽃향기가 흘러왔다. 달빛을 밟으며 뜰을 걷다가 발걸음이 서재를 지나 목선후가 머무는 방 앞에 이르렀다.

그의 방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아직 안 자나?

오늘 목선후는 이른 아침 외출해서 저녁 식사 후에 들어왔기 때문에 내일 정공자 대신 일일 교사가 되어 달라고 부탁할 시간이 없었다.

어쩌다 보니 오늘은 한 번도 그를 보지 못했다. 보고 싶어서 이쪽으로 온 것은 절대 아니다.

다시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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