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9화 (9/92)
  • 9화. 무시하지 마

    지금까지 내가 본 등급은 대개 밝은 형광색이었는데 이번에는 저녁노을 같은 붉은 색이 섞여 있다.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에 목이 간질거렸다.

    에취, 재채기가 크게 터졌다.

    나는 옷고름으로 코를 막고 마루로 올라섰다. 내가 들어서자 곧 밥상이 들어왔다. 상다리가 휘어진다는 표현이 딱 맞게 커다란 상 위에 빈틈없이 반찬이 늘어져 있었다.

    부모님은 우리 부부와 마주 앉아서 식사를 하게 되자 너무 좋아서 한순간도 미소를 멈추지 못했다.

    하얗고 통통한 어머니의 손가락이 쉬지 않고 음식을 덜어서 사위 앞에 놓아주고 대낮인데 아버지는 사위에게 술을 권했다.

    나도 이해한다. 목선후가 내 사위라도 그러고 싶었을 테니까.

    우리 두 사람의 사이가 그다지 애틋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부모님은 모른 체했다. 이게 이 시대 정상적인 신혼부부의 모습은 아닐 테고. 나는 아직도 이 혼인에 다른 내막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아버지가 사위가 편들어주기를 바라며 입을 열었다.

    “목 서방, 자네 장모를 좀 말려주게. 중문 상가 때문에 하루 종일 바가지야. 이제 그만할 때도 됐는데 말이지. 이 집안에서 말려줄 사람은 자네뿐일세.”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어머니가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그러게, 평소에 가만있다가 왜 이러시지?

    동네 일진형들한테 몰려서 쩔쩔매다가 갑자기 자기편을 발견한 꼬마 아이 같다. 득의양양해서 터질 듯 팽창한 아버지의 얼굴에 목선후가 살인적인 미소를 되돌렸다.

    옆에서 보는 내 가슴까지 뛸 정도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예 입이 귀에 걸린다.

    더 웃다가는 조커 되시겠어.

    “목 서방, 내가 자네 치수에 맞게 옷을 몇 벌 지어 놓았네. 조금 있다가 입어 보게.”

    나는 그가 어머니의 성의를 거절해서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할까 봐 걱정스러웠다.

    “어머니, 저도 모르게 언제 지어 놓으신 거예요?”

    “네가 왜 몰라? 너 있을 때 지은 건데.”

    헐, 오 여사님. 이러시면 안 되죠.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였다. 나를 힐끔 쳐다본 목선후가 천사 같은 미소를 유지하며 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장모님.”

    “아니, 아니. 목 서방. 장모님을 말려 달라니까 감사하면 안 되지. 안 그러니, 안용아?”

    에라, 될 대로 되라. 고개를 들고 목선후를 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네. 아버지. 안 되죠. 안 되고 말고요.”

    불퉁하게 투덜거렸는데도 부모님은 하하하, 호호호 웃음을 터트렸고 목선후는 입가를 실룩였다.

    이쯤 되니 만인의 사랑을 받는 목선후를 거절한 안안용의 용기가 신기할 지경이다.

    점심을 마치고 목선후와 나란히 별당으로 돌아왔다.

    4등급짜리 하인 팽문과 등급외 말순이 우리 뒤를 조용히 따라왔다. 어쩌다 팽문이 하인 노릇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일반적인 일은 아니다.

    혹시 팽문은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역적의 후손?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 다니는 귀족 가문 자식?

    아니면 도련님이 공부할 때 어깨너머로 익혔는데 도련님을 능가해 버린 각성한 천재?

    이건 아니겠다. 이 도련님이야말로 뷰티풀한 브레인을 탑재한 슈퍼컴퓨터이니까.

    중문을 지나고 별당의 마당에 들어서자 목선후가 걸음을 멈췄다.

    “이제 가셔도 됩니다. 오후 공부가 있지 않습니까?”

    “네. 하지만.”

    “공부는 끈기가 있어야 됩니다.”

    목선후가 엄격하고 냉정하게 덧붙였다. 내가 학원생들에게 늘 하던 소리인데 이렇게 듣기 싫은 말인 줄은 진짜 몰랐다.

    학원을 땡땡이치는 학생들의 심정이 백번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안 해도 돼요. 동생들만 잘하면 되거든요. 과거는 동생들이 보는 거지, 여자인 내가 보는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그리고?”

    목선후의 잘생긴 눈썹이 상큼하게 올라갔다.

    “나는 조금만 배워도 따라잡을 수 있어요.”

    이 몸이, 아니 이 영혼이 지금은 등급외이지만 원래는 일 등급이었다고.

    자신 있게 턱을 치켜들고 목선후를 올려다보았다.

    “오전에 배울 건 다 배웠고 오후에는 복습이에요. 나는 혼자서 충분히 복습할 수 있어요.”

    수능에 필수적인 고급 영어 단어는 최소 7번을 복습해야 자기 것이 된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뇌는 자고 나면 20퍼센트 정도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또 하루 자고 나면 이틀 전에 외운 단어들은 거의 다 망각의 강 속으로 사라진다고 봐야 한다.

    망각의 강을 막는 방법은 바로 복습이다. 그날 배운 단어를 자기 전에 복습하기.

    한자와 수능 영단어는 비슷한 레벨이라고 생각해서 커리큘럼을 짤 때 오전에 진도를 나가고 오후에는 오로지 복습만 하게 만들었다.

    등급외인 내 동생들을 위한 특별 코스지만 물론 나는 예외다.

    “정말이에요.”

    간절하게 올려다보는데 어디선가 하얀 목련 꽃잎이 한 장 날아와서 내 이마에 붙었다.

    목선후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더니 긴 손가락으로 툭, 꽃잎을 건드렸다.

    아주 잠깐, 천만분의 일 초쯤 되는 순간에 목선후의 경계심이 풀어지고 순수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먼 우주에서 오랫동안 기다린 빛이 눈앞을 스쳐 가는 것처럼.

    하지만 그 순간은 지나갔고 목선후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한두 잎씩 떨어지는 꽃잎의 출처를 찾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음에 이마에 붙는 꽃잎에는 강력접착제라도 발라 둬야 하나?.

    “누이가 있어야 동생들이 열심히 할 겁니다.”

    “……알았어요.”

    목선후의 옆얼굴에 대고 성의 없이 인사를 한 후 4등급 마당쇠를 지나 중문을 넘었다.

    “수능 명강사 되는 건 어렵지 않았는데 이건 어렵네.”

    “네? 아씨, 뭐라고 하셨어요?”

    말순이가 팽문의 뒷모습에 시선을 꽂고 있다가 물었다. 저렇게 표가 나니 팽문이 모르기가 더 어렵겠어. 팽문이 모르는 체하는 것은 말순의 마음을 받아줄 생각이 없어서일 거다.

    “말순아, 팽문을 어떻게 꼬실 거니?”

    말순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자꾸 부딪쳐야죠.”

    연애 일 등급 말순이의 대찬 대답이었다.

    ***

    “하! 도저히 못 쓰겠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

    늦은 밤, 혼자 별당의 서재에 앉아 복습을 하다가 붓을 책상에 던져 버렸다. 붓은 데굴데굴 굴러서 반질반질한 마룻바닥 위로 떨어졌다. 먹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커다란 먹물 한 방울이 철썩 내 뺨까지 튀어 올랐다.

    젠장, 이건 녹슨 칼을 주면서 사시미를 뜨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잖아. 삼십 년 경력 일식집 주방장도 못 할 일이다.

    천자문을 외우기는 어렵지 않은데 엉뚱한 데서 문제가 터졌다.

    필기구. 그러니까 붓.

    원래도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미 핸드폰과 노트북에 익숙해져서 그마저도 잊고 살았다. 손글씨도 잘 안 쓰고 살았는데 생전 처음 붓을 잡았으니.

    내 손가락은 붓을 잡는 순간부터 꼬였다. 짜증이 확 솟구쳤다.

    펜을 개발해 볼까? 숯으로 연필을 만들어 봐? 막대기로 땅바닥에 써 볼까? 하지만 그런 일은 너무 눈에 띌 거다. 이 세계에 완전히 적응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튀면 안 될 것 같고, 어쩌지?

    성질나서 머리카락을 마구 쥐어뜯고 있는데 등 뒤에서 소리가 났다.

    “무슨 일입니까?”

    윽, 하필 이럴 때. 나는 얼른 두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쓱쓱 쓸어내렸다.

    샴푸나 트리트먼트가 없는 시대임을 잊은 대가로 머리카락은 더 엉켜서 머리 장식과 함께 꽈배기가 되어 버렸다.

    뒤엉킨 머리카락 속에서 비녀와 뒤꽂이가 내 두피를 찌르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기척 때문에 천천히 몸을 돌려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단정하게 반묶음한 머리를 흰 끈으로 묶고 흰색 학창의를 입고 있는 남자는 희미한 유등 아래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아우라를 풍겼다.

    나는 이 꼴인데.

    “가만있어요.”

    목선후가 긴 팔을 내밀어 내 머리에서 비녀와 뒤꽂이를 빼기 시작했다. 괜찮다고 혼자 할 수 있다고 말하려다가 입술을 물었다.

    눈앞으로 다가온 남자의 목울대에 시선이 닿았다. 시선을 올려 남자의 매끈한 턱과 시원한 콧날, 그리고 길고 검은 속눈썹을 훔쳐보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다. 정말 한 군데도 버릴 게 없는 얼굴이다.

    “아야!”

    달랑거리는 장식이 많은 뒤꽂이 하나가 머리카락과 함께 뽑혀 나왔다. 이거 설마 일부러 그러는 건가? 손등을 할퀴어서?

    목선후가 붉어진 내 얼굴을 보더니 동정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어조로 물었다.

    “하녀를 부를까요?”

    “아뇨! 괜찮아요. 정오는 손이 둔해서 더 막 뽑을 거예요. 그냥 살살 푸세요.”

    “그러면 처음이니 서툴러도 이해해요.”

    처음이 아니면 더 기분 나빴을 거야. 목선후가 다시 머리카락을 풀기 시작했다.

    “그대는.”

    “네?”

    “그대는 ……그렇게 공부하기 어려우면 하지 마십시오. 이러다가 대머리가 되겠습니다.”

    내 손바닥에 비녀와 뒤꽂이를 올려주면서 목선후가 말했다. 나는 붓 때문에 화가 났는데 공부가 안 돼서 화난 줄 아는구나.

    그럴 수 있지. 오해할 수 있지.

    “글을 알면 모르는 것보다는 좋겠지만 세상에는 안 되는 일도 있는 법이니까요.”

    “할 수 있어요.”

    붓 때문이라니까. 아, 억울해.

    “내려놓으면 마음이 편해질 겁니다.”

    “할 수 있다고요.”

    목선후의 시선이 내가 연습하고 있던 종이 위를 스쳤다.

    웃기만 해 봐.

    그는 웃지는 않았지만 딱딱한 표정으로 책을 한 권 찾아 들고 서재를 나가 버렸다.

    내려놓으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했지. 그 말을 하는 목선후의 표정이 씁쓸해 보였다. 그는 뭘 내려놓은 것일까?

    실력이 있는데 과거를 못 봐서 울분이 쌓였나? 그런 미신 때문에 평생을 저당 잡히는 이 시대 사람들을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까치머리를 대충 손가락으로 빗고 서재를 나와 내 방으로 돌아갔다.

    “앗, 아씨 머리가 어떻게 된 거예요? 얼굴에 그건 또 뭐예요?”

    손가락으로 뺨을 문지르자 검은 얼룩이 묻어 나왔다.

    까치머리에 검은 점이라. 신선해서 좋네.

    나는 분명 안안용과 다른 사람인데 이상하게 갈수록 안안용을 닮아간다. 빙의 효과인가? 예전의 나와는 가끔 다른 감정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안안용의 몸에 남은 기억의 영향인 듯하다.

    정오와 말순의 시중을 들으며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아씨, 공자님께서는?”

    “책 보신대.”

    친정까지 와서 각방 쓴다는 사실에 정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님께서 아시면…….”

    “아시면 안 돼. 그러니 너희도 조심해.”

    “네.”

    나는 그의 뷰티풀 브레인과 페이스에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나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와 같이 잘 정도는 아니다. 적어도 아직은.

    ***

    다음 날 점심을 먹고 명필방에 들렀다. 붓의 종류가 너무 많아서 주인을 불러 나 대신 골라 달라고 했다.

    “최대한 단단한 걸로 주세요.”

    “그러시면 여기에 있는 서모필이나 녹모필을 보시지요.”

    “둘 중 어느 것이 더 단단한가요?”

    “쥐의 수염으로 만든 서모필이 더 단단하지요.”

    헉! 쥐의 수염이래.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 그럼 녹모필로 주세요.”

    “녹모필은…….”

    “그만. 알고 싶지 않아요. 그냥 주세요.”

    녹모필이 뭘로 만들어졌는지 모르는 게 낫다. 쥐의 수염보다 더 끔찍하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까.

    돈을 지불하고 밖으로 나오자 사뭇 뜨거워진 봄볕이 눈을 찔렀다.

    “아씨, 아씨.”

    “왜?”

    “저기 좀 보세요.”

    정오가 가리키는 곳에는 서너 명의 서생이 서서 누군가를 발로 차고 있었다. 발길질을 피하며 웅크린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내 손발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