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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6화 (6/92)
  • 6화. 등급외만 있는 안씨 학당

    저대로 흉터가 뚜렷이 남으면 안안용의 발악을 잊기 어려울 텐데.

    제발 흉터 자국이 남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내방으로 돌아가면 당장 손톱을 짧게 깎아야지.

    먹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무겁고 부드러운 묵향이 퍼졌다.

    “저, 계약서는 무슨 내용이에요?”

    “내용은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글자를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 일부러 저러는 거지? 뒤끝 무지 길어, 목선후.

    “정확히는…… 몰라요.”

    “궐향이라는 사람과 계약을 했군요. 삼 년 후에 안씨 집안에서 향시에 합격하는 사람이 나오면 궐향은 장인어른께 앞으로 이십 년을 봉사하기로 되어 있군요. 나오지 않으면 중문에 있는 상가 스무 채를 넘겨받기로 했고요. 계약서에는 아무 흠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잘난 목선후도 어쩔 수 없다는 뜻이잖아. 진짜 큰일 났다.

    “안씨 집안이란 사촌이나 오촌까지 포함하는 것인가요?”

    어딘가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머리 좋은 친척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아직 절망하긴 일러.

    “정확히 말하면 장인어른의 자식들만 해당됩니다. 아, 장인어른도 포함되네요.”

    입꼬리에 달랑거리는 저 빈정거림. 강남 건물 스무 채를 생각해서 참자.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처남들을 잘 가르치는 건 어떻습니까?”

    등급외 아이들을?

    몇 등급쯤 돼야 향시에 합격하는지 확인은 못 했지만 최소 칠 등급 이상이다. 어쩌면 육 등급일 수도 있다. 어디서 시험을 보느냐에 따라 차이가 좀 있다.

    이 시대 과거시험은 심한 상대평가라 그해에 인재가 적으면 합격선도 밑으로 푹 내려간다고 들었다.

    하지만 연고지에서 시험을 보는 것이 일반적이라 동생들은 이곳 환성에서 시험을 봐야 하고 환성은 수도인 만큼 당연히 합격선이 가장 높다.

    “그게 뭐예요?”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말라 버린 내가 목선후가 쓰고 있는 것을 들여다보았다.

    “유생들의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 중에서 몇 사람을 골라 처남들에게 붙여 주세요.”

    내가 현대에서 하던 짓을 목선후가 하고 있었다. 다른 점은 내 학원에 등급외는 없었다는 것.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계약서와 명단을 받아서 소매에 넣었다. 목선후는 이제 자기가 할 일은 다 했다는 듯이 하나밖에 없는 의자에 앉아서 책을 펴 들었다. 무언의 축객령이구나.

    나는 팽문을 부르지 않고 혼자서 별채로 돌아오며 생각을 정리했다.

    앞길이 막혔으니 옆으로 길을 내야지.

    기다려라, 동생들아. 이 누나는 강남빌딩 스무 채면 목숨도 걸 수 있다고.

    ***

    다음 날 아침에 문안 인사를 하면서 친정아버지가 저지른 어리석은 내기 얘기를 했다.

    이대로 있으면 안씨 집안의 부가 사라질 것이라고 설명하고는 당분간 친정에 가 있는 것에 허락을 구했다.

    그 정도만 말해도 시부모님은 이해를 했다. 친정의 부가 사라지면 두 집안 간의 정략혼도 의미가 없어진다.

    시어머니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시아버지가 내 친정행을 바로 허락했다. 목선후와 내가 이미 합의한 사항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들의 의견은 묻지 않았다.

    나도 목선후의 의견은 묻지 않았지만 물었더라면 빨리 사라지라고 등을 떠밀지 않았을까?

    ***

    별채로 와서 아침을 먹고 정오와 말순을 데리고 친정을 찾았다.

    어머니는 여전히 머리를 싸매고 누워 있고 안부자는 하루 사이에 초췌해져서 동그란 눈동자가 약간 처져 있었다.

    현대의 내 아버지와 닮은 점이 별로 없는데도 안부자를 보고 있으면 자꾸 감정이입이 된다. 아버지, 라고 부르기만 해도 따뜻하고 뭉클한 무엇인가가 가슴속에 차오른다.

    계약서와 목선후가 써 준 종이를 내밀었다.

    “아버지, 이 유생들을 만나봐야겠어요.”

    “목 서방이 준 것이냐?”

    “네. 제가 먼저 만나 보고 그중 몇 사람을 고를게요. 아버지가 한 명씩 불러주세요.”

    “네가?”

    천자문도 모르는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라는 뜻으로 물었겠지만 나는 못 들은 척했다.

    목선후가 적어 준 명단이니 일차로 신분이나 기본 실력은 증명이 됐고 선생으로서의 자질은 나도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다.

    현대에서 내가 원했던 것은 두 가지. 돈과 시간이었다.

    학원이 성공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이루어질 꿈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세계로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한강뷰를 내려다보면서 포도주를 홀짝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완전히 죽어 버린 것보다는 빙의가 낫다고 생각하지만 빙의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가난해질 위기를 겪게 되다니, 억울한 건 억울한 거다.

    나는 무조건 이 내기를 이기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억울함과 보상심리가 뒤범벅되어 화끈한 심정으로 동생들을 내 방으로 불렀다.

    세 살짜리 막내는 어머니 품에 그대로 두고 첫째부터 넷째까지 나란히 꿇어 앉혔다.

    첫째, 안안신. 열다섯 살. 등급외.

    둘째, 안안중. 열세 살. 등급외.

    셋째, 안안문. 열 살. 등급외.

    넷째, 안안열. 일곱 살. 등급외.

    저기요, 안용이 어머니. 애를 낳지만 말고 키우기도 하셨어야죠.

    어떻게 이 지경까지 두셨단 말입니까. 한숨이 나왔지만 애들이 내 표정을 보고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까 봐 꾸욱 누르고 첫째에게 물었다.

    “안안신, 네가 가장 싫은 게 뭐냐?”

    이 애들은 재벌 2세들이다. 결핍이 없으니 얻고 싶은 것도 없다. 그러니 뭘 주겠다고 하는 것은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환경에 있어도 싫은 것은 있다. 싫은 것을 피하는 것도 강력한 동기부여가 된다.

    안신이 눈살을 찌푸렸다. 예쁜 안안용처럼 동생들도 대체로 잘생겼는데 그중에서도 안신이 제일 잘생겼다.

    잘생기고 무식한 부잣집 도련님.

    이 아이는 망하기 좋은 모든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무시당하는 거요.”

    안신이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무시당할 일이 뭐가 있어?”

    잘생기고 돈 많은데 뭐가 문제야? 현대에서는 이 중 한 가지만 있으면 완전 떵떵거리며 살 수 있거든.

    “이씨네 형제가 형을 놀려요. 바보라고.”

    대답을 머뭇거리는 안신 대신 둘째인 안중이 대답했다.

    “이씨가 누구지?”

    “예부상서댁이요,”

    “사람들이 이씨네 형제들은 공자님이라고 부르고 형은 이름으로 불러요.”

    셋째인 안문도 거들었다. 넷째인 안열은 무릎이 불편한지 엉덩이를 이리저리 움찔거리며 눈알만 굴렸다. 귀여워 죽겠다.

    “바로 그거야. 너희가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계속 그렇게 무시를 당하며 살게 돼. 그러고 싶어?”

    “아니요!”

    세 명이 한꺼번에 대답하고 넷째는 잠시 후에 조그맣게 아니요, 라고 중얼거렸다.

    “삼 년 후 향시에 너희 중 한 명이 합격하지 못하면 중문 상가가 사라진다. 그러면 무시를 당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어떻게 되는데요?”

    셋째가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는지 순진한 눈동자를 굴리며 물었다.

    “굶을지도 몰라. 누이는 시댁에서 쫓겨날 수도 있어.”

    애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음, 너무 갔나? 뭐, 충격요법이니까.

    나 역시 목선후를 다시 못 볼 생각을 하면 아랫배가 조인다.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난 짝사랑 느낌이랄까.

    “지금까지 너희들은 선생님이 오시면 한두 달 만에 나가게 만들었지?”

    안안용을 포함해서 안씨네 개구쟁이들은 선생들이 질려서 스스로 그만두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다를 거야.”

    네 아이의 얼굴을 보며 각오를 다졌다.

    ***

    가정교사 면접날.

    짧은 턱수염을 기른 왕 선생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나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가늘고 날카로운 눈빛이 내 얼굴을 훑어 내리는 순간 등급이 떴다.

    오 등급. 나쁘지 않다. 나쁜 건 저 사람의 기분이다.

    “나와 얘기할 사람이 소저요?”

    “그렇습니다.”

    “하! 안씨 집안에 생원 한 명이 없다는 소문을 믿지 않았거늘 오늘 보니 맞는 말인가 보오. 나는 여인과 얘기를 나눌 마음이 없으니 부친에게 안내하시오.”

    “부친께서는 이 일을 저에게 일임했습니다.”

    이제는 어쩔래?

    “그렇다면 먼길을 헛걸음한 셈이구려.”

    소맷자락을 떨치며 몸을 돌리는 왕 선생의 뒷모습에 가운뎃손가락을 세워 주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일 등급이라도 안 받아줬을 거야.

    말순이 방문을 빼꼼 열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갔니?”

    “네. 그런데 사랑채에 가셔서 주인님을 뵙겠다고 고집을 부려요.”

    “먼길 왔다고 짜증내더니 노잣돈이 필요한 모양이다. 안 총관님께 모셔다드려라. 알아서 하실 거다. 다음에는 황 공자지? 모셔와 봐.”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삼십 전후의 남자가 들어왔다. 단정한 복장에 인상이 좋은 편이다.

    “황인이라고 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황 공자가 내게 정중하게 인사를 해서 나도 일어나 인사를 했다. 방금 나간 왕 선생에 비하면 매너가 좋아서 호감이 생겼다. 첫인상은 합격이다.

    하지만 고개를 드는 순간.

    팔 등급?

    목선후가 날 물 먹이기로 작정했나? 어떻게 저런 실력을 추천했지?

    “저, 목선후 공자님과는 어떤 관계이신가요?”

    “목선후 공자가 누구입니까?”

    목선후를 몰라?

    “그러면 누구의 추천으로 오셨나요?”

    “안부자 어르신의 부탁으로 왔습니다. 소생이 향시에 합격한 후 고향에 내려가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이번 향시에 응시하는 제자가 있어 같이 올라왔다가 안부자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제자분은 합격했습니까?”

    “물론입니다.”

    제자 이름이 뭐냐고 물어서 확인해야 하나?

    이게 참 그렇다. 대놓고 꼬치꼬치 물으면 상대방을 의심하는 것으로 보여 괜히 미안해진다.

    팔 등급이라고 못 가르치라는 법은 없다. 동생들은 등급외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팔 등급이 향시에 합격했을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등급을 보는 능력이 없었더라면 기꺼이 채용할 만큼 황인은 근사해 보였다.

    여인인 나를 무시하지도 않고. 아으, 아까워라.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돌아가 계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안부자 어른께서 부탁하지 않으셨다면 이미 고향으로 떠났을 것입니다. 늦어도 내일 아침에는 출발해야 합니다.”

    “잘 알겠습니다.”

    황인이 나가자 맥이 풀렸다. 목선후가 천거한 사람들은 실력은 있으나 성품에 문제가 있었고 아버지가 은근슬쩍 끼워 넣은 사람은 사기꾼이 틀림없었다.

    ***

    ‘수강료는 얼마든지 더 드리겠습니다. 두 배로 시켜 주세요.’

    내가 워낙 인기가 있으니까 이런 학부형들이 많았다. 마치 자판기에 동전을 넣으면 동전 수대로 물건이 나오는 것처럼 공부도 그렇게 된다고 생각하는 거다.

    ‘죄송합니다. 제가 시간이 없네요.’

    이 대답 속에는 내가 시간이 많았더라면 당신 아이의 성적을 한없이 올릴 수 있지만 나는 너무 인기가 많은 강사라 시간이 없다, 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사실은 두 배로 더 많이 가르친다고 성적이 오른다는 보장이 없어서다.

    당신 아이는 지금 맥시멈으로 공부하고 있고 결국 이게 최종 성적일 거라고 정직하게 말하면?

    당연히 학원이 망한다.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 자식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방금 들어온 5번 후보 정 공자가 이런 경우 어떤 대답을 하는지 궁금했다.

    “아이가 지금 하루 다섯 시진(10시간)을 공부하고 있는데 좀 부족합니다. 하루 한 시진 공부시간을 늘릴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단순하게 시간을 늘려야 한다고 말하면 당신은 탈락이야.

    느닷없는 질문인데도 정 공자는 놀라지 않고 서늘한 눈을 빛내면서 입을 열었다.

    그 순간 5번 후보의 등급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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