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강남 빌딩 스무 채가 사라진다면
나는 처음 본 사람들과 굉장히 친한 척하면서 열렬히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아 어머니가 내온 간식을 먹기 시작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빙의한 것이 들키면 안 되니까 간식이 미치게 맛있는 척했다.
아버지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가 내기를 했다. 삼 년 후 과거시험에 우리 집에서 한 명이라도 향시에 급제하는 사람이 나오게 하겠다고.”
이게 뭔 말이야? 뭔가 찐득한 불쾌감이 손끝에서 피어올랐다.
“무엇을 걸었는데요?”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외숙과 이번에 향시에 네 번째 떨어진 외숙의 아들이 모두 눈을 내리깔았다. 아버지가 어두운 표정으로 어머니의 시선을 피하고 조그맣게 대답했다.
“중문 상가를 걸었다.”
헉! 여기저기서 심장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 동생들까지 눈을 크게 떴다.
“아, 아버지. 설마 중문에 있는 상가 스무 개를 말씀하시는 건 아니죠? 상가 한 개를 거셨죠?”
“그럼, 그럼. 당연하지. 한 개를 걸었겠지. 그렇죠?”
첫째 남동생의 말에 어머니가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아버지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신이 어미야, 그게 말이다. 신이 아비가 술이 좀 취해서.”
외숙이 중재를 하려고 했지만 어머니의 비명 소리에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계약서, 계약서를 쓴 건 아니죠? 그렇죠? 아니죠? 아니라고 말해요!”
이번에는 외숙도 입을 다물었다.
나는 등급외를 달고 있는 다섯 명의 남동생들을 보면서 천천히 간식을 내려놓았다. 아무리 맛있는 간식이라도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았다.
스무 채의 상가.
안씨 집안이 얼마나 부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성 한가운데 있는 상가 스무 채를 날리고 나서도 지금의 부를 유지할 수 있을까?
한국으로 치면 강남에 있는 빌딩 이십 개를 날리는 것과 비슷하다. 어쩌면 더할 수도 있다. 강남에는 빌딩이 많지만 이 시대에는 상가가 그렇게 많지 않을 터. 더구나 도성 한가운데 노른자 땅에는.
현대보다 나은 점이라고는 부잣집 외동딸인 거 딱 하나였는데 그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어머니가 큰소리로 통곡을 하기 시작했는데 나도 같이 울고 싶어졌다.
“아이고, 미쳤구나. 네 아버지가 미쳤어. 중문 상가는 돈을 싸 들고 와도 팔지 않는 가게들인데. 그저 가지고만 있어도 이문이 산처럼 쌓이는 곳인데. 그런데 한 개도 아니고 스무 개를 다 걸다니. 네 아버지가 미쳤어. 아이고, 내 팔자야. 이제 어떻게 산단 말이냐? 아이고, 엉헝헝.”
“어머니, 아직 내기에 진 것은 아니잖아요?”
“진 거나 진배없다. 네 동생들을 봐라. 천자문도 못 뗐는데 삼 년 아니라 삼십 년이 지난들 향시에 붙겠니? 아이고, 아이고. 이를 어쩌면 좋으니? 이를 어째. 어흥흥흐으. 너는 또 어쩐다니. 우리 집이 망하면 시댁에서 너를 얼마나 무시하겠니?”
이럴 때는 어떻게 이렇게 현실 파악이 잘되시는지.
“안용아, 계약서를, 계약서를 봐라. 아, 너는 글자를 모르지. 그래, 목 서방에게 보이면 되겠다. 목 서방이라면 방법이 있을 거다.”
저기, 안용이 어머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글자는 알아서 뭐 하느냐고 하셨는데요. 뭐, 사람의 생각은 늘 변하는 법이니까 이해는 합니다.
폭포처럼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를 동생들이 부축해서 안채로 데리고 갔다.
어머니를 위로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게 있어서 일단 나는 자리에 남았다. 안안용의 아버지인 안부자에게 물었다.
안부자는 원래의 이름은 따로 있는데 워낙 이름난 부자인데다 따로 직함이 없어서 모두 안부자라고 부른다.
“아버지, 상대방은 무엇을 걸었나요?”
나는 당연히 상대방도 중문상가처럼 물질적인 것을 걸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대답은 내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칼을 걸었다.”
“네?”
“때가 되면 꼭 필요한 칼이다. 너는 그렇게만 알고 있어라.”
외숙을 쳐다봤지만 외숙과 사촌 오라버니까지 내 시선을 외면했다. 말의 뉘앙스로 보아 칼은 단순한 칼이 아니라 무력을 의미하는 것 같다.
무력집단의 지원을 받기로 했나?
현대처럼 법과 경찰력이 든든해도 많은 재물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아서 부자들은 살아 있는 권력과 손을 잡는다.
이 시대는 말할 것도 없다. 이 시대야말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시대다.
“아버지께서 중문 상가 스무 개를 걸 만큼 가치 있다고 생각하셨다면 그게 맞는 거겠지요. 하지만 소녀가 계약서를 좀 보고 싶습니다.”
“목 서방에게 보일 생각이냐?”
어, 그 생각은 못 했다. 여기서는 내가 까막눈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고 이전의 나처럼 계약서를 읽어 보려고 한 거였다.
“……네.”
“우리 딸, 내가 계약서를 허투루 작성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버지가 계약서를 대충 작성하는 사람이라면 오늘날 이런 부를 쌓아 올리지는 못했겠지.
“아니에요. 하지만 어머니께서 원하시니까요.”
아버지가 내게 다가오라고 손짓을 했다. 무릎걸음으로 다가가서 안부자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목 서방이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세요?”
“바라다니? 없다. 없어. 시집간 너에게까지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니까. 네 말대로 그냥 네 어머니의 마음을 편하게 하자는 거지.”
이미 부담을 왕창 주셨거든요. 장양란 앞에서 대차게 자랑했던 구첩반상이 삼첩반상으로 바뀌는 장면이 보인다고요. 편의점 도시락보다 더 소박해지면 눈물 나잖아요.
“아버지.”
내가 진지하게 안안용의 아버지를 응시했다.
십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가슴을 아프게 하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을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에서 찾고 있다.
세상을 떠난 내 아버지처럼 안안용을 바라보는 안부자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 저 맹목적인 애정에 울컥 가슴이 저렸다.
“아버지.”
다시 부르자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내 표정을 살피는 안부자.
안부자는 학문은 구 등급이지만 사업 능력은 빌게이츠 급이다. 이런 사람이 아무렇게나 계약할 리는 없다. 혹시 동생들을 믿고 있는 것일까?
“아버지 혹시…….”
“응? 혹시 뭐?”
“혹시 동생들을 믿으세요? 동생들은 정말 학문 쪽으로 머리가 없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어려워요. 아시죠?”
“삼 년이나 남았는데 그래도 안 될까?”
내가 한쪽에 평온하게 앉아 있는 외사촌 오빠를 곁눈질했다.
아버지보다는 조금 더 밝은색의 구 등급인 외사촌 오빠.
“네. 어떤 건 시간이 아무리 걸려도 안 되는 거예요. 오히려 더 많이 할수록 더 안 되기도 해요.”
재수해서 현역보다 성적이 오를 확률은 겨우 삼십 프로.
사십 프로는 간신히 현역시절의 성적을 유지했고 나머지 삼십 프로는 오히려 떨어졌다.
우리 학원 재수생들을 대상으로 몇 년 동안 내가 직접 통계를 냈으니까 확실하다.
“나는 목 서방을 믿는다. 목 서방이 방법을 찾아낼 것이야.”
그런 건 믿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요. 속으로는 툴툴거렸지만 아버지가 건네준 계약서를 소중히 챙겼다. 내 미래가 이 종이 한 장에 달려 있다.
다른 건 다 포기해도 부자인 친정집과 댕댕미 넘치는 부모님은 포기할 수 없다.
아예 자리를 펴고 누워서 울고 있는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
“저기 할 말이 있어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안채를 나오면서 명현당 쪽으로 몸을 돌리는 목선후를 불렀다. 저녁노을에 물든 수려한 얼굴이 무표정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그가 아무리 까칠해도 내 입에서는 자동으로 비굴한 미소가 떠올랐다.
“뭡니까?”
저기, 필요해서 정략결혼을 했으면 비즈니스성 매너라도 지키면 안 될까? 그러면 서로가 편할 텐데 말이야.
“여기서는 말고요. 명현당으로 가요.”
안채의 하녀들이 수시로 지나가는 이곳에서 친정 문제를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목선후가 나를 까는 것과 시어머니나 동서가 까는 것은 전혀 다르다.
일단 그녀들은 이렇게 아름다운 일 등급 뇌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살짝 미간을 좁힌 목선후가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며 안채 옆에서 수리 중인 전각을 눈여겨보았다.
수리가 거의 끝나 아름다운 기와지붕이 햇빛에 반짝였다. 목씨 집안은 내가 가져온 지참금으로 낡은 전각들을 몇 개 수리 중이다.
저 건물이 수리되면 안채에서 시어머니와 함께 생활했던 장양란이 독립한다.
목씨 집안에서는 이상하게 둘째 아들에게 명현당이란 독립건물을 주고 둘째 며느리에게도 새로 단장한 별채를 주었지만 큰아들 부부는 안채와 사랑채에서 부모님 곁에서 생활하게 했다.
그래서인지 시집온 지 수년이 지났는데 장양란은 아직 아이가 없다.
명현당이라는 편액이 붙은 문 앞에 이르자 정오와 말순이 더 이상 나를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왜 그러니?”
“아씨, 소인들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어요. 여기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공자님과 팽문이뿐이에요.”
“지난번에 책을 가져왔을 때는?”
“그때도 팽문이 가져다준 거예요.”
목선후는 이미 마당을 가로질러 마루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나에 대한 배려가 눈곱만큼도 없다.
“너희는 별채에 먼저 가 있어.”
“벌써 어두워지고 있는데 혼자서 어떻게 오시게요. 저희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새벽 두 시에도 혼자 서울을 헤매고 다녔던 나와 달리 안씨 가문 금지옥엽 안안용은 백 미터도 혼자 걸은 적이 없다.
“팽문더러 바래다달라고 할게. 먼저 가서 너희들 저녁 먹고 있어.”
“네.”
정오와 말순이 가고 나는 목선후의 뒤를 따라 마루에 올라섰다. 명현당은 다른 건물과는 달리 이 층 구조에 누각까지 있어서 푸르게 변하는 노을 속에서 꽤 엄숙해 보였다.
전반적으로 허름한 목씨 장원에서 이 건물만 툭 튀었다. 마치 어디 다른 곳에 있는 건물을 통째로 옮겨놓은 것처럼.
목선후가 안내한 방은 그의 서재인 듯 꽤 넓은 공간에 책꽂이가 벽을 온통 채우고 있었다.
검은 칠을 한 책상 앞에는 의자가 하나뿐이다. 의자를 힐끗 보고 나는 선 채로 소매 속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아버지가 계약서를 쓰셨는데 이게 평범한 상황이 아닌 상태에서 쓴 거라 염려가 많으세요. 봐줄 수 있으세요?”
최대한 상냥하고 애교 있게 말을 했지만 목선후의 눈썹도 까닥하게 만들지 못했다. 어째 갈수록 차가워지는 것 같다.
“장인어른께는 열 명이 넘는 책사가 있지 않습니까? 굳이 나까지 볼 필요가 있을까요?”
안부자에게는 고대판 변호사와 회계사, 혹은 경영 컨설턴트가 많이 있나 보다.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계약서를 내 손에 들려 보낸 것은 그들도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봐주세요.”
책상 위에 계약서를 쫙 폈다. 검은 글자들이 내 눈앞에서 춤을 췄다.
영어 구 등급짜리가 수능 시험 문제지를 마주했을 때의 막막한 기분이 나를 덮쳤다.
학생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런 상황에 대해 상상을 해 본 적도 있는데 실제로는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다.
영어 구 등급짜리도 I, You 같은 인칭대명사나 be 동사는 아는데 나는 지금 단 한 글자도 모른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등급외다.
아, 이렇게 자존심이 상할 수가.
계약서를 오 초쯤 훑어본 목선후가 책상 위에 종이를 내려놓고 벼루에 물을 몇 방울 떨어뜨렸다.
그대로 서서 먹을 갈기 시작하는 그의 손등에 희미한 상처 자국이 보였다.
설마 안안용이 할퀸 자국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