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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2화 (2/92)
  • 2화. 내가 등급외라니

    흩날리는 꽃잎이 그의 시선에서 내 모습을 가려 주길 바라면서 복숭아나무 아래를 휙휙 걸어갔다.

    목씨 장원을 나와서 마차를 타고 친정인 안씨 저택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씨 저택에 도착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입이 떡 벌어졌다. 미니 경복궁에 온 줄 알았다. 목씨 저택과 비교가 되지 않는 크기와 화려함이 내 눈앞에서 트로트 콘서트장처럼 펼쳐졌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잘 꾸며진 마당을 지나 한참 안으로 들어가니 안채가 나왔다.

    “안용아, 그동안 왜 안 온 것이냐?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았잖니? 아이고, 며칠 못 본 사이에 살이 쭉 내렸구나.”

    화사한 차림을 한 사십 전후의 부인이 잰걸음으로 나를 맞으러 나왔다. 이 몸의 어머니인 오씨 부인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이 화려한 미녀의 실력은?

    등급외.

    새삼 놀랍지도 않다. 지난 며칠 사이에 마주친 내 주변의 여인들은 모두 등급외였으니까. 비록 모두 하녀였지만.

    “아무 일 없었어요. 그런데 오늘은 필요한 게 있어요.”

    오씨 부인이 내 어깨를 확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정한 냄새에 내 코가 벌름거렸다.

    “뭐가 필요하니? 지난번에 물어봤을 때는 더 이상 필요한 게 없다고 했잖니? ”

    이제라도 말하다니 기특한 내 새끼, 라는 눈빛을 보니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신랑을 할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너무 막 키우셨구나.

    “천자문 같은 거…… 있지요? 공부를 좀 해야겠어요.”

    안안용이 까막눈을 면하기로 작정했다니까 본의 아니게 몸을 빌린 값으로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다행히 내가 잘하는 게 그거 하나니까.

    “뭐라고? 네가 공부를 한다고?”

    오씨 부인이 파르르 떨더니 내 뺨을 두 손으로 감싸며 씩씩댔다.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 갑자기 스킨십을 하자 어색하다.

    “세상에, 우리 집안이 무식하다고 그렇게 너를 무시한다더니 사실인 게야? 불쌍한 것. 얼마나 견디기가 힘들면 그 어려운 공부를 한다고 나섰니? 아이고, 괜히 너를 그런 집으로 보내서 생고생을 시키는구나.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냥 한 공자에게 보내자고 했는데 네 부친이 부득부득 우기더니 이제 어쩌면 좋으니? 그렇게 시집살이가 힘들어서 어떻게 버틴단 말이냐?”

    한 공자는 또 누구지? 저기, 내 시집살이는 그렇게 힘들지 않은 것 같은데요.

    “그게 아니라요.”

    어렵게 입을 열었는데 내 말을 싹 무시한 오씨 부인이 내 손을 움켜쥐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온 하녀들이 재빠르게 다과를 늘어놓고 방을 나가 버렸다. 자리에 앉자마자 오씨 부인의 한탄이 쏟아졌다.

    “사내 녀석들도 힘든 공부를 네가 왜 한단 말이냐? 네가 과거시험을 볼 것도 아니고 시회에 나갈 것도 아니잖니? 다 목 서방이 너를 무시해서 그런 것 아니냐? 하나밖에 없는 내 귀한 딸자식을 어찌 그런 인정머리 없는 집으로 보냈단 말이냐. 내가 정말 이러다 제명에 못 죽겠구나. 그리고 봐라, 그렇게 학문이 높다고 자랑하더니 며느리에게 천자문 한 권도 못 준다니?”

    “저, 거기에는 천자문이 없어요. 글자를 모르니 제가 답답해서 그래요.”

    “지금까지 그런 얘기 한 적 없었잖니? 이 어미도 글자를 모르지만 잘만 살았다. 여인이 글자를 알아서 어디에 쓴다더냐? 그렇게 유식한 네 시어머니를 봐라. 못 먹어서 삐쩍 골아서는 지지리 궁상이 아니냐. 글자 좀 안다고 입을 옷 한 벌도 변변히 없으면서 잘난 체는 있는 대로 다 하잖니, 내 참, 눈꼴 시려서 원.”

    헐, 안씨 집 아이들이 공부를 못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내가 학원장이었던 시절, 성형외과와 명품 가방에는 카드를 쓱쓱 긁어 대면서 아이 학원비는 만 원이라도 깎으려는 사람이 간혹 있었는데 이 몸의 어머니는 딱 그런 부류였다.

    그렇다고 이런 학부형을 설득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는 설득은 어렵지만 이런 사람이 한 번 꽂히면 충성파가 돼서 자발적으로 학원홍보를 하고 다니게 된다.

    더불어 자식의 성적이 오르지 않아도 클레임을 걸지 않는 겸손함도 발휘하고.

    ‘우리 애가 나 닮아서 머리가 나빠요. 이 정도도 많이 좋아진 거예요.’라고 선생에게 쉴드를 쳐 주기까지 한다. 이런 캐릭터는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경우에 학생은 나이므로 학부형인 오씨 부인을 설득할 필요가 없었다.

    “음, 천자문은 있지요? 없으면 책방에 가서 사면 돼요.”

    “서재로 가 봐라. 천장까지 책이 쌓여 있으니 그 많은 책 중에 천자문이 없겠니? 나는 가 봐야 찾을 수도 없으니 여기서 기다리마.”

    “제가 가져가도 괜찮을까요? 동생들은 이제 천자문이 필요 없나요?”

    오씨 부인에게는 안용이라는 외동딸 외에도 다섯 아들이 있다.

    “다 떼기는. 너도 알다시피 첫째와 둘째는 포기했고 셋째는 미뤄두었고 넷째는 이제 시작했고 막내는 책상 앞에 앉지도 못한다. 막내는 이제 겨우 세 살이잖니.”

    아! 뭐라고 아는 체하기도 어렵다. 상상외의 충격이다.

    할 말이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자 오씨 부인이 내 손을 잡았다. 음성이 찰떡처럼 끈끈하고 부드러워졌다.

    “안용아, 내가 목 서방을 불러서 말할까? 너무 그러지 말라고? 혼수가 부족하면 얼마든지 더 줄 테니 너를 좀 아껴 달라고 말할까? 이렇게 예쁘고 착한데 글자 좀 모르면 어떠니? 나는 정말 목 서방이 이해가 안 되는구나.”

    하하, 안안용 학생 어머니, 예쁜 건 맞는데 착한 건 아닌 거 같아요. 제 손톱 밑에 아직도 그 남자의 DNA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거든요.

    “아니에요. 정말 목 서방 때문에 배우려는 게 아니에요. 제가 불편해서 그래요.”

    글자를 몰라서 불편하다는 딸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오씨 부인을 남겨두고 하녀의 안내를 받아 서재로 향했다.

    안씨 가문의 서재에는 실로 묶인 책이 벽마다 빼곡히 쌓여 있었다. 예상대로 대부분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은 새 책이었다.

    나는 영어 교재를 고르던 실력으로 빠르게 천자문을 찾아서 발 앞에 모았다. 한자라고는 내 이름만 쓸 줄 아는 나도 ‘천자’라는 글자는 아니까.

    “모두 다섯 권이네. 한 권 가져가도 문제없겠어.”

    천자문 한 권을 들고 서재를 나오니 오씨 부인이 기다리고 있다가 내 손에 한약 봉지를 들려주었다.

    “안용아, 이거 꼭 달여 먹어. 이것 때문에 너를 오라고 한 거야.”

    “이게 무슨 약인데요?”

    “득남 탕약이야. 얼마나 영험하면 이런 이름이 붙었겠니? 이거 먹고 아들 낳은 집이 한둘이 아니래. 이 한 첩에 자그마치 은자 스무 냥이다.

    스무 냥. 그러니 한 방울도 흘리면 안 된다. 내가 특별히 웃돈을 주고 최고의 약재만 쓰라고 했어. 약이라고 다 같은 품질은 아닌 거 알지? 이 어미가 구하느라 애썼으니 어미를 생각해서라도 거르지 말고 때마다 꼭 마셔야 된다, 응?”

    “어, 저기, 이런 건 별로.”

    먹어 봐야 소용없을걸요? 정오의 말대로라면 안목 커플은 각자도생 중이다. 이런 내용까지는 모르는지 오씨 부인이 대문까지 쫓아 나오며 당부를 했다.

    “그런데 저, 동생들은 어디 갔어요?”

    누나가 왔는데 나와 보지도 않는 걸 보니 안안용과 다섯 명의 동생들은 사이가 안 좋은가?

    “무슨 소리니? 네 아버지와 애들은 외숙댁에서 아직 안 돌아왔어. 애들이 돌아온 줄 알고 온 거니?”

    “아, 아직 안 돌아왔군요.”

    “이틀은 더 있다 올 모양이다. 아들이 과거에 떨어졌는데 위로잔치를 열다니 네 외숙도 이해를 못 하겠다.”

    “그러니까요.”

    “세 번째라면 또 몰라. 그런데 이번이 네 번째야. 서른에 향시도 붙지 못하면 그만둬야지. 네 외숙이 사람은 좋은데 실속이 없구나.”

    “…….”

    바칼로레아(프랑스의 논술형 대입자격시험)와 비슷한 향시를 네 번씩이나 떨어진 아들을 위로하기 위해 잔치를 여는 외숙이나 몰려가서 노는 안씨 집안 남자들이나.

    이건 실속이 없는 게 아니라 대책이 없는 건데.

    ***

    친정을 나와 다시 마차를 타고 집에 오니 벌써 점심때가 지나 있었다.

    방에 들어와 손을 씻고 하녀가 가져온 점심을 몇 수저 떠먹으며 정오를 불렀다.

    “근데 정오야, 한 공자가 누구야?”

    “그걸 왜 소인에게 물으세요? 아씨도 잘 아시잖아요.”

    “내가 몰라서가 아니라 네가 제대로 아는가 보려고. 아까도 말했잖아. 순서대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다 너를 위해서야.”

    십대 후반쯤 되는 정오가 감격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학원 고등부 애들에 비하면 얼마나 순진한 아이인지.

    “한 공자님은 아씨 소꿉 동무시죠. 장난으로 혼인 약속을 했고요. 다섯 살 때 한 약속을 지키라고 집에 왔다가 어르신께 혼나고 쫓겨났죠.”

    “왜?”

    “그야, 한 공자가 알거지가 됐으니까요. 정식으로 정혼도 안 했는데 우기는 것도 집안이 쫄딱 망하니까 아씨에게 빌붙으려는 거였어요.”

    바보가 아니고서야 다섯 살 때 새끼손가락 걸고 한 구두 약속을 들고 오는 놈이 있을까? 냄새가 나는데?

    “한씨 집안은 어쩌다 망했더라?”

    “먼 바다로 비단을 잔뜩 실어 보냈는데 배가 침몰했잖아요. 재산을 몽땅 비단 사고 배 빌리는 데 썼기 때문에 빚만 잔뜩 지게 됐죠.”

    사업을 무식하게 했네. 분산투자라는 말은 중학생도 아는데.

    내가 점심을 다 먹을 즈음에 하녀 말순이 탕약을 들고 들어왔다.

    “아씨, 이거 드셔야 돼요. 마님께서 주신 약을 소인이 얼른 달였어요.”

    나는 여성 호르몬을 극대화시킬 것 같은 쓰디쓴 물을 눈살을 찌푸리며 마셨다. 어쨌든 건강에 나쁘지는 않겠지.

    부른 배를 두드리며 나른한 봄볕 아래서 천자문을 폈다.

    맙소사. 천자문을 설명하는 글자가 한글이 아닌 것을 잊고 있었다.

    배워야 할 글자를 설명하는 글자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독학을 하냐고.

    “아무래도 선생이 있어야겠어.”

    “공자님은 어떠세요? 공자님께서 소년 수재로 유명하시잖아요. 만약 계속 과거시험을 보셨더라면 장원급제하셨을걸요.”

    시아버지는 종4품 어사중승으로 학문의 명성이 높아 황제도 귀를 기울인다고 들었다. 형도 예부에서 일하고 있고.

    이 몸의 신랑인 목선후 공자는 과거를 보고 조정에 출사하면 역모를 뒤집어쓰고 단명할 팔자라는 예언 때문에 열세 살에 향시에 급제한 이후로 더 이상 과거를 보지 않고 한량처럼 살고 있다.

    아들의 불운을 안타까워한 시부모님이 학식은 가뭄 날 개울물처럼 얕지만 엄청 부유한 처갓집을 만들어 준 것이다. 그래야 아들이 평생 편안하게 놀고먹을 수 있으니까.

    빈 탕약 그릇을 가지고 나갔던 말순이 얼굴이 빨개져서 헉헉거리며 들어왔다.

    “아씨, 아씨. 큰일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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