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짠단짠 수능 명강사의 비밀 >
1화. 수능 영어 명강사 고대로 빙의하다
나는 미친 듯이 달렸다. 차를 돌릴 시간도 아까워서 맞은편 길가에 차를 그대로 세우고 비상등을 켜 둔 채 8차선의 육교 위를 달렸다.
열 시가 넘어서 문을 닫은 학원 건물은 내가 살고 있는 9층과 엘리베이터에만 환하게 불이 켜져 있고 나머지는 완전히 까맣게 어두웠다.
육교의 한가운데서 올려다보니 건물 옥상의 가장자리에 무엇인가가 보였다.
인수! 인수가 틀림없다.
달리면서 인수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어머니, 학원이에요! 학원 옥상에 인수가 있어요. 어서 119를 부르시고 달려오세요. 저 지금 학원으로 들어가고 있어요.”
통화를 하면서 내려가느라 미처 보지 못한 육교의 계단에서 한 발이 미끄러졌다.
나는 남은 대여섯 개의 계단을 굴러 땅으로 떨어졌다. 온몸이 너무 아픈데 옥상에 있는 인수 때문에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한 다리를 질질 끌면서 학원으로 다가갔다. 예상대로 손으로 밀자 문이 열렸다.
인수가 열쇠를 잃어버렸다고 한 말은 거짓말이었구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잠깐의 시간이 천년처럼 길고 어두웠다.
9층에서 내려서 옥상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
여기까지 의지만으로 버텼던 발목이 더 이상 힘을 받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옥상의 철문을 보자마자 소리쳤다.
“인수야, 김인수! 나야, 선생님이야! 나 좀 봐, 김인수!”
철문을 밀고 무릎으로 기어서 나가자 옥상 난간에 걸터앉은 인수가 보였다. 어둠 속에 덩그러니 떠오른 가늘고 긴 실루엣. 너무나 익숙한 저 모습.
이틀 전 가출한 고3 학생 김인수가 맞았다.
내가 학원의 문을 닫는 시간은 열 시이고 이후에 강남에서 고액 과외를 끝내는 시간은 새벽 한 시다. 인수는 내 수업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이 이 시간에 문자를 보냈다.
<선생님, 모르는 사람에게 핸드폰을 빌렸어요. 선생님께는 그냥 가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안녕히 계세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그리고 죄송해요. 이렇게밖에 못 해서요.>
차가운 손이 목덜미를 콱 움켜쥐는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혹시 인수의 마지막 말? 내 학원 건물에서? 내 직감은 안 좋은 일일수록 잘 맞는다.
인수의 집으로 전화를 하고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르게 차를 달려서 강북에 있는 내 학원 건물로 달려왔다.
인수는 고등학교 이 년 반 동안 내 학원을 다녔고 비상 열쇠를 하나 줄 만큼 나와 친근해졌다. 그런데 이틀 전에 갑자기 가출을 했다.
9월 수능 모의고사 시험을 친 날이었다.
학교와 부모와 내가 사방으로 찾았지만 아이는 핸드폰까지 버리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까칠한 시멘트 바닥을 손과 무릎으로 기어가며 부르짖었다.
“인수야, 이리 와 봐. 쌤이 다쳤어. 부축 좀 해 줘.”
“선생님.”
“응, 응.”
제발, 누구든 빨리 좀 와 줘요. 무슨 말을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애를 진정시킬 수 있을까? 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거야.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가 얼굴과 손에 넘쳐흘렀다.
드디어 인수의 발이 보였다.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
내가 손을 뻗자 허리 높이의 난간에 걸터앉아 있던 인수가 훌쩍 일어나 난간 위에 섰다.
“인수야, 인수야. 제발.”
아슬아슬한 모습을 보니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아무도 저를 사랑하지 않아요. 제가 없어져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거예요.”
“아니야! 아니야! 네 부모님이 있어. 부모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성적이 떨어졌다고 골프채로 때리고 별장에 가두고 핸드폰을 뺏어도 사랑인가요?”
“인수야, 내려와서 얘기하면 안 될까? 응?”
추운 날씨도 아닌데 몸이 덜덜 떨렸다.
“선생님, 선생님은 다른 줄 알았어요.”
아! 뭐라고 해야 할까? 나는 그냥 영어학원 선생일 뿐이라고? 너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내가 잘못했어. 내가 부모님께 말할게. 내가 틀렸다고 말할게. 그러니 제발.”
발목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키자 상상할 수 없는 통증이 다리를 통해 온몸을 휘감아서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소용없어요. 선생님.”
조금만 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발목을 잡고 숨을 한 조각 토해 냈다. 이제 됐어. 잡았으니까.
인수가 무릎을 굽혀 좁은 난간에 쭈그려 앉았다. 그래 그렇게 몸을 조금만 앞으로 숙이면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어. 나는 발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지만 몸은 자꾸 무너져 내렸다.
“인수야. 내려와, 제발.”
이제 다 됐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인수가 발목을 잡은 내 손을 떼어 내기 시작했다.
쾅!
내 손이 떨어짐과 동시에 내 등 뒤의 철문이 세차게 열리며 반대편 벽으로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옥상으로 올라온 것이다.
내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인수가 뒤로 몸을 젖혔다.
“안 돼!”
발꿈치를 들고 상체를 기울여 아이의 두 발목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그러자 내 몸이 붕 떴다. 가로등 불빛이 아프게 눈을 찔렀다. 경악한 인수 어머니의 얼굴이 거꾸로 스쳐 지나갔다.
***
간혹 출퇴근 중에 운전하면서 웹소설을 듣는데 요새는 환생이나 빙의가 자주 나와 나도 몇 번 생각해 봤다. 내가 낯선 곳에 낯선 인물로 빙의를 하면 뭘 제일 먼저 해야 될까, 라는.
‘현실 인정’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픽 웃으며 잊어버렸었는데.
그 빙의란 것을 내가 했다.
나는 재빠르게 ‘현실을 인정’했다. 언제 어디서 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거니까.
오늘도 ‘잘’ 살기로 결심하며 간식을 먹고 있는데 하녀 정오가 책을 한 보따리 내 앞에 풀어놓았다.
“가져왔어요, 아씨. 이게 공자님의 서가에 있던 것들이에요.”
“설마 공자님이 지금 보고 있던 책을 가져온 건 아니지?”
정오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아이다.
“아니에요. 팽문이 그러는데 이건 공자님이 일곱 살에 읽으신 거래요. 안 보신 지 십 년도 더 됐대요.”
제목도 읽을 수 없는 책들을 휘리릭 넘겼다. 이 시대의 선비들은 일곱 살에 이런 책을 읽는구나. 나는 일곱 살에 영어유치원에 부모님의 돈을 쏟아붓고 있었는데.
현대에서 나는 알아주는 수능 영어 명강사였다.
사람들을 보는 즉시 현재의 실력과 미래의 가능성까지도 내 머릿속에 등급화 되어 떠오른다.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신 후 이 특이한 능력이 생겼기 때문에 혼자 남은 나를 위한 부모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이 특이한 능력 때문에 잘나가는 수능 영어강사가 돼서 남부럽지 않은 연봉을 쌓고 머지않아 건물주가 될 판이었다.
그런데 지금 A.D. 천년 정도의 동양에 사는 한 소녀에게 빙의해 버렸다.
이 시대는 글자를 아는 여인이 드물어 내가 빙의한 안안용은 말은 잘하는데 글자는 몰랐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내가 빙의하기 직전에 공부를 시작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사실 나는 학원이니 공부니 하는 건 이제 지긋지긋하다. 공부도 삶도 죽을 만큼 열심히 했더니 결국 죽어 버렸으니까.
이제부터는 쉽고 편하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일자무식은 좀 문제가 있어서 최소한 필요한 몇 글자는 알아두기로 했다.
“아씨, 팽문이 그러는데 저게 제일 쉬운 책이래요. 더 쉬운 책은 이 집에는 없대요.”
“이 집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오 등급이야? 으애앵하고 우는 게 아니라 오오드응그읍하고 우는 건가?”
“예?”
“아니다, 됐다. 나가서 사면 되지. 뭘.”
“아씨, 오늘은 마님께 가 봐야 돼요. 며칠 전부터 계속 오라는 것을 미루고 계셨잖아요. 더 이상 미루시면 마님께서 이리로 오실지도 몰라요.”
정오가 말하는 마님이란 내가 빙의한 안안용의 친정어머니다. 아무리 친정이 가깝다고 해도 혼인한 지 두 달밖에 안 된 새신부인데 안안용은 사흘에 한 번은 친정에 간다고 한다.
정오의 말로 유추해 보면 부부 사이가 나쁜 탓일 거다.
“알았어. 그러면 지금 가자.”
어차피 봐야 할 친정 식구다.
게다가 돈 많고 공부 못하는 아이의 집에는 표지만 구경하고 던져놓은 문제집이 쌓여 있기 마련이다. 내게 맞는 적당한 책을 고를 수 있을 것이다.
하녀인 정오와 말순이 입혀 주는 고급스러운 비단옷을 입고 별채를 나섰다. 별채 입구에서 정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씨, 공자님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될까요? 며칠 동안 아프시다고 어른들께 문안도 안 드리셨는데 갑자기 나가시면 꾀병이었다고 오해하실 거예요. 사실 이번엔 진짜로 편찮으셨는데요.”
그전엔 진짜 꾀병이었던 거네.
“꼭 그래야 돼?”
나는 아직은 안안용의 신랑이나 시댁 식구들을 마주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지난번에 몰래 나가셨을 때 공자님이 화가 나셔서 하루 동안 금족령을 내리시고 물과 소금만 주셨잖아요.”
뭐? 금족령? 물과 소금? 이 야만스런 단어의 조합은 뭐냐?
“정말이야?”
“아씨가 공자님을 손톱으로 조금 긁긴 했지만 그건 그렇게 큰 상처는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하루 동안 물만 드시게 하다니 지금 생각해도 너무하셨어요.”
“잠깐.”
동그란 얼굴의 하녀와 아이 컨택을 했다.
그러자 내 측근 하녀 정오의 학문 수준이 떠올랐다.
등급외.
한국에서는 빵점을 맞아도 구 등급인데 고대로 왔더니 등급외가 추가됐다.
등급외란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는 뜻인가 보다.
“정오야, 말을 할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말을 해야 해. 그렇게 순서를 뒤죽박죽 섞으면 안 돼. 처음부터 다시 말해 봐.”
“예, 아씨.”
침을 꿀꺽 삼킨 정오가 눈동자를 굴렸다.
“근데 아씨도 다 아시면서 왜 물으세요?”
“네가 순서대로 잘 정리하는지 보려고.”
대충 얼버무렸다.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할 사건이 없다.
나는 내 학원 건물 옥상에서 떨어지다가 갑자기 이 세계에서 눈을 떴고 안안용은 가벼운 봄 감기를 앓았을 뿐이다. 안안용이 물에 빠졌다거나 돌림병에 걸린 것도 아니다.
“아, 그러시구나. 소인을 위해서였네요, 헤헤. 엿새 전에 친정 마님께서 새로 지은 아씨 옷을 보내시면서 친정에 들르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밤늦게 돌아와 보니 공자님이 아씨 방에서 기다리고 계셨어요. 도성에 도적떼가 나타났다면서 위험한데 말도 없이 어디를 이렇게 늦게 다녀오느냐고 물으셨는데 아씨께서 무슨 상관이냐고 소리를 막 지르셨죠.”
“보통 내가 그렇게 소리를 막…… 지르나?”
“아씨 탓도 아니죠, 뭘. 혼인날 하루 빼고 지금까지 소 닭 보듯 하다가 갑자기 들이닥쳐서 묻는데 어떻게 좋은 말이 나가겠어요?”
“그건…… 그렇지.”
“그래서 공자님께서 소매를 떨치며 나가려고 하셨는데요. 아씨께서 그 넓은 소매를 홱 잡아당기셔서는 이렇게…….”
정오가 사납게 휘두르는 손을 피해서 슬쩍 머리를 옆으로 젖혔다. 그렇게 실감 나게 흉내 낼 필요는 없지 않니?
“정오야, 내가 하루 동안 갇힌 것은 말없이 외출해서가 아니라 공자님을 할퀴어서지? 맞지?”
수능 명강사의 스킬을 발휘하여 요점을 정확히 짚어 주었다.
“어, 네.”
“그럼 됐어. 이제 그럴 일은 없으니 걱정 말고 가자.”
“저, 아씨.”
“왜?”
내가 몸을 휙 돌리자 정오가 눈동자만으로 열 시 방향을 가리켰다.
열 시 방향에 회색 옷을 입은 젊은 남자가 서서 뒷짐을 지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너무 멀어서 큰 키와 조각 같은 얼굴 윤곽만 간신히 보였다.
안안용의 신랑인 목선후 같은데 눈동자를 볼 수 없어서 등급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제일 좋은 방법은 못 본 척하고 지나가는 것이다.
나 역시 소가 닭 보듯 하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