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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96화 (96/97)
  • 00096 외전4. 짝사랑의 요정님 =========================

    PTSD. 두 사람이 내 곁을 떠난 이후로, 내가 앓게 되어버린 지병의 이름.

    아픈 것도 지긋지긋하다고, 그러니까 인제 그만 벗어나고 싶다고 매번 발버둥을 치지만, …나는 헤어짐을 마주하게 되면, 바보처럼 또다시 절망에 발이 묶여버린다. 고통스럽게 세상을 떠난 엄마의 마지막, 아버지의 울부짖음, 사랑하는 사람이 더는 내 곁에 없다는 고독감과 절망.

    잊혀가던 악몽 같은 기억들이 다시금 선명하게 되살아나, 나를 송두리째 잡아먹는다.

    그래도 꾸준한 치료를 받다 보니,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몇 년 동안 쭉 시달렸기에, 나름의 대처법도 찾았고. 그중 하나는, …타인에게 관심 두지 않는 것. 가지더라도 헤어짐의 슬픔을 감내할 각오가 생기게 해주는 사람에게만 가지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각오했더라도 아픈 건 아픈 거니까.

    다행히 내가 사람 보는 안목은 있는 건지, 전부 좋은 사람들이라, 모두 내가 노력한 것 이상으로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었다. 엄마와 화만큼은 아니지만, 내가 살아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중에서도 이소는 특별했다.

    …처음으로, 나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구해줬으니까.

    이소가 나한테서 멀어진다면, 분명히 나는 엄마와 화를 잃었을 때만큼 슬퍼할 거다. 아니, 어둠에 잡아먹힌 나를 구해줄 빛이 사라지게 되는 거니까 …아마도 나는.

    나는 전보다 더욱 깊은 곳에 요정님을 가둬두었다. 목소리조차도 내뱉지 못하게 한 마디 말조차도 건네지 않았다. 무언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전부 무시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이따금 비겁하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때마다 “나도 알아요.”라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더는 다치고 싶지 않아. 누군가를 잃고 싶지도 않고, 아프기도 싫어.

    그래도 약간의 미련은 남은 건지, 언젠가 이소에게 이런 걸 물었던 적이 있었다. …아, 생각났다. 이소가 자기 반 실장이랑 헤어졌을 때, 물었었구나. 헤어지고 나서도 하도 태연하길래 궁금해서 물었다. 왜 헤어졌냐고.

    “아, 몰라. 걔가 자꾸 간섭해대잖아. 짜증 나게.”

    “간섭?”

    “어. 아니, 지가 내 남친이지, 남편이야?! 왜 내 폰을 확인하고, 내가 다른 남자애들이랑 어울리는 꼴을 못 보냐고요. 아무튼, 난 그렇게 집착하는 거, 딱 질색이야.”

    시작할 생각도 없었지만, 시작하기도 전에 꺾인 느낌이라는 게 이런 거려나. 이소의 그 한마디에 나는 일말의 미련조차도 깔끔히 버려버렸다. 보나 마나 이소가 싫어하는 집착을 할 테니까.

    헤어지기 싫어서.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이소가 없으면 견디지 못하니까.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어떤 게 더 가슴 아픈지. 이소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 행복하게 사는 것과 이소가 나와 멀어지는 것. 당연히 후자였다. 적어도 전자는 이소가 행복할 수 있을 테니까. 나 역시, 이소의 친구로 영원히 곁에 남을 수 있잖아.

    누구도 손해 보지 않는 최상의 선택. 응, 난 그걸로 충분해.

    나는 그렇게 이소에게 좋은 사람이 생기면, 짝사랑의 요정님을 풀어주겠노라고 다짐했다. 그전까지는 보내주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미련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는지는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저…, 그때의 나는 조금이라도 엄마와의 추억을 붙잡아두고 싶었다.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다른 사람으로 잊어볼까 하는 생각도 없잖아 있긴 했다. 때마침 반강제로 참여했던 축제에서 노래를 불러서인지, 갑자기 나 좋다는 여자애들이 생겨났으니까.

    …처음에는 아무나 막 사귈까 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헤어지면, …조금은 아플 것 같아서.

    무엇보다 실례잖아. 가볍든, 가볍지 않든, 상대의 마음은 진심일 텐데. 그 진심을 나 좋아지라고 이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냥 모른 척하거나, 받아주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라고 생각했으니까.

    시간은 흘러, 우리는 같은 대학에까지 진학하게 되었다. 이소는 왜 대학교까지 자기를 따라오느냐고 씩씩댔지만, …아니, 나도 성준이가 재수할 줄 알았나.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꿈을 완전히 잃어버린 나는 그냥 두 사람이 지망한 학교를 따라서 넣었다. 이소는 단박에 붙었지만, …성준이는 재수 확정. 아이러니하게도 성준이가 지망한 학교는 한 번에 합격했는데, 이소가 지망한 학교는 실기가 있어서 그런지, 나는 후보였다.

    성준이 따라서 재수나 할까 싶었는데, 추가합격자 발표에 내 이름이 있길래, 그냥 이소랑 같은 학교로 진학했다. …살면서 다니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문예 창작학과를.

    그리고 성준이는 재수한다더니, …곧바로 군대를 가 버려서. 따라서 재수를 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던 나다.

    피하지 못하면, 즐기라고 했던가.

    대학에 다니면, 이소가 어떤 남자들을 만나게 될지 내심 궁금했었다. 학창시절까지만 해도 남친이 시시때때로 바뀌더니, 의외로 대학 다닐 때는 남자를 거의 사귀지 않던 이소였다. …과제가 하도 많아서 그런가.

    하긴, 나도 대학 가면 연애할 수 있다는 말에 살짝은 기대했는데.

    연애는 무슨. 핑크빛은 개뿔. 끽해야 내가 대학에서 하게 됐던 건, 교수님께서 내 성적표에 푸르딩딩한 새싹이 자라나는, 씨를 뿌리지 않기를 고대하는 게 전부였다.

    고대만 했지, 솔직히 1학년 성적은 개판이었다. 교양이나 이론 수업은 그럭저럭 잘 받았는데, 우리 과 실습 강의는 전부 C…. D나 F가 나오지 않은 게 어떻게 보면, 기적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때부터 살며시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친구 따라서 대학에 온 게 과연 잘한 선택인가.

    과거에 얽매여서, 노래하고 싶다는 꿈조차 날려버린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자괴감도 없지 않아 밀려왔다. 나는 노래 말고 하고 싶은 게 뭐가 있었지? 내가 노래 말고 잘하는 게 있던가? …1학년 성적을 보고, 조금은 방황했던 것도 같다.

    편입이나, 전과를 할까. 아니면, 유학을 가야 하나. 방학 내내 고민했었으니까.

    결국, 여러 가지 후보 중에서 내가 선택한 건, 군대였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뭣보다 대부분의 남자 동기들이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가길래, 나도 이때가 최적기다 싶어서 입대했다. 정신력이 길러지지 않겠냐는 희망을 품기도 했었고.

    …물론, 희망 사항대로 됐으면, 내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겠지.

    내가 가지고 있는 지병이, 군 생활에 악영향을 줄까 봐 불안했었는데, 다행히 그럭저럭 넘겼던 것 같다. 몸이 힘들긴 더럽게 힘들었지만, 적어도 …어디에서든 나 혼자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운이 좋았는지, 선임들도 좋은 사람이었고, 동기들도 괜찮은 놈들이었다.

    그럭저럭 군 생활에 적응하고 있을 때쯤, 먼저 전역한 성준이가 면회를 왔다.

    …얘가 지금 전역 한참 남은 사람 놀리려고 왔나. 그런 생각도 들긴 했지만, 오랜만에 친한 친구의 얼굴을 보니 반갑긴 했다. 이전에는 내가 면회를 갔었는데, 상황이 역전되니 뭔가 웃기기도 했고.

    하지만, 성준이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쭌, 네가 면회 와놓고서, 표정이 왜 그렇게 침울해.”

    “…이소 남자친구 생겼다.”

    “아아, 그래?”

    한동안 아무도 안 사귀더니, 누구랑 사귀고 있으려나. 우리 과 동기인가? 아니면, 선배? …뭐, 누구랑 사귀든 좋은 사람이면 좋겠네. 그때까지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다.

    살면서 이소가 진지하게 연애를 한 건, 본 적이 없으니까.

    “그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대.”

    “…엥?”

    …이건 좀 놀랍다. 우리 고작 20대 초중반인데, 벌써 결혼 생각이라니. 상대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면 그럴까 싶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며 그저 어깨만 으쓱이는데, 갑자기 씩씩거리는 성준이다.

    “야, 왜 네가 화를 내고 그래.”

    “내가 열 안 받게 생겼어?! 그 인간, 너랑 되게 비슷하다고!”

    “…그게 무슨.”

    “분위기라든가, 스타일이라든가. 그냥 너랑 판박이라고!”

    뭐가 그리 억울한지, 성준이가 씩씩거리며 눈물까지 흘린다. …바깥 상황이 실감 나지 않아서 그런가, 정작 나는 그런 소리를 들어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니, 뭔가 잠시 묘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게 끝.

    “뭘 그런 것 가지고 울고 그래.”

    “그런 거라니! 너랑 닮은 새끼랑 결혼하고 싶어 하면서, 왜 옆에 있는 너는 안 봐주는데!”

    “…하아. 내가 이소한테 좋아한다는 표현조차도 안 했잖아. 너도 알면서 왜 그래. …뭣보다 내가 사귀고 싶은 마음도 없고. 이소 잘못이 아닌데, 왜 이소한테 화를 내고 그래.”

    “몰라. 이소 옆에 있는 그 새끼 볼 때마다 기분 더럽다고. …그 인간이랑 권이소랑 깨지기 전까지, 절대 권이소 안 볼 거야.”

    나는 그 날, 헤어질 때까지 성준이를 설득했다. 마지못해 내 설득에 응해주긴 했지만, 뭐가 그리 분한지, 자꾸만 우는 성준이를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성준이와 헤어지고 나서,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프지?”

    아주 오랜만에 듣는 짝사랑의 요정님의 목소리였다. 네. 각오한 일인데, 생각보다 엄청 아프네요. 그래도 내가 덜 아프기 위해 선택한 결과니까, 분명 이소도 행복해서 그런 선택을 한 거일 테니까. 후회하지는 않을 거예요.

    밖으로 나가면, 당신과는 드디어 이별해야겠네요. 요정님.

    전역하고 나서, 이소가 기다렸다는 듯 내게 그 남자를 소개해줬다. 가장 오래된 친구이니, 꼭 소개해주고 싶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도 다행이네. 오래된 친구라고 조금은 특별히 생각해줘서.

    성준이가 닮았다고 하길래 유심히 봤는데, 솔직히 헤어스타일 비슷한 거 빼곤 잘 모르겠다. …아, 선호하는 옷 스타일도 조금 닮기는 했네. 무채색에 깔끔한 옷. 이래서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했던 걸까.

    내가 유심히 보는 만큼이나, 나를 아니꼬운 시선으로 쳐다보는 박원호다. …야, 권이소. 도대체 나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했길래, 이 사람이 처음 보는데도 나를 이렇게 보냐.

    불행인지, 다행인지, 결혼하고 싶은 상대라는 이소의 말에 금세 달라진 박원호의 표정이지만.

    이소의 말에 나는 생긋 웃기만 했다. 축복의 말을 해줬어야 하는데, 도저히 나오지 않더라. 그 대신, 적어도 내가 방해되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나 때문에 둘 사이가 틀어질까 봐, 박원호와 우연히 마주쳤을 때 말했다.

    “제가 소꿉친구라고 붙어있는 게 신경 쓰인다면, 되도록 이소랑 만나지 않을게요.”

    내뱉은 건 지키는 성격이기에, 그날 이후로 이소와 마주치는 걸 피했다. 그런다고 해서 이소랑 내가 멀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만일 이소가 정말로 결혼하게 된다면, 이러는 게 당연하기도 하고.

    집 앞에서 우연히 만날 때마다 이소가 서운한 기색을 보이긴 했지만, 그냥 웃고 넘겼다.

    머리카락이 어느 정도 길어지자마자 헤어스타일도 바꿨다. 해본 적도 없는 펌에, 성인이 되고 나서 딱 한 번 시도해봤던 염색. 잘 어울리나 걱정했었는데, 주변 반응이 나쁘지 않아서 유지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옷 스타일도 바꾸게 되었다.

    대부분의 남자가 그렇듯, 나도 그때까지는 패션에 ‘ㅍ’자도 관심이 없어서, 그냥 깔끔해 보이는 옷들만 입었었다. 하지만, 왠지 박원호와 스타일이 겹치긴 싫어서, 그때부터 패션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멘토가 되어준 건 …인정하기 싫지만, 은유 누나.

    나한테 잘 어울리는 옷을 추천해달라고 했을 뿐인데, 하루가 멀다고 내 옷을 사지를 않나. 쇼핑하는데 끌고 가지를 않나. 자기가 나온 잡지를 보여주지를 않나. 피곤하긴 했어도 덕분에 패션에 대한 안목이 생기긴 했으니까.

    그렇게 나는 요정님을 떠나보낼 준비를 끝마쳤다.

    달라진 내 모습, 이소가 없이도 유지할 수 있는 사회관계, …그리고 완전히 비워낸 마음. 그 모든 것이 갖추어졌을 때, 나는 마음 깊숙한 곳에 갇혀있던 요정님을 꺼내드렸다.

    “…드디어 이별이네요. 고생 많으셨어요.”

    나 같은 겁쟁이 때문에, 몇 년 동안이나 갇혀계셔서 많이 힘들었을 텐데. …요정님은 마지막까지 나를 걱정하며, 괜찮으냐고 물었다.

    “네. 이젠 정말 괜찮아요. 더는 울지도 않잖아요.”

    응. 이젠 정말 슬픔도 미련도 …사랑이라는 감정도 남지 않았어요. 그저 제가 바라는 건, 이소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것뿐이에요. 아, 그리고 하나 더 있네요.

    “…다음에는 저 같은 겁쟁이 말고. 자기감정에 솔직할 수 있는, 멋지고, 적극적이고, 당당한 사람한테 가셔서. 꼭 그 사람의 사랑을 이루어주세요.”

    엄마 말대로 당신은 정말 좋은 요정이니까, 그런 사람에게 가면, 분명 환영받을 거예요.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나는 짝사랑의 요정님과 완전한 이별을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내 짝사랑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 작품 후기 ============================

    月光天女璉님// 해석은 어디까지나 독자님들의 자유라고 생각해요. :D

    soae님// 그렇습니다. 철도 없고, 바보입니다 (...) 도란이를 부모님 보다도 좋아해서 그런 거일지도 몰라요. 언젠가는 그 이야기도 들려드릴 날이 오려나요. :)

    마지막인데, 짠내나는 편으로 찾아뵈어서 그저 죄송합니다 ㅜ_ㅜ..

    (도란이 시점 외전을 준비하기 싫었던 이유2)

    그럼 완결 후기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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