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5 외전4. 짝사랑의 요정님 =========================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된 시작은 언제일까. 감정의 주인인 나조차도 모르는 사랑의 시작. 훗날,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봤을 때, 아마도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됐을 때는 이때인 것 같다.
“그렇게 무서우면 내가 평생 옆에서 같이 있어 줄게. 빈자리가 무서운 거면 내가 엄마든, 동생이든, 누나든, 뭐든 되어줄 테니까…! 제발, 란아. 무서우니까 그렇게 참지 마. 너까지 잃고 싶지 않단 말이야!”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지독하게 나를 괴롭히던 절망.
그맘때의 나는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을 만큼 위태로웠다. 언제나 내 옆에서 나를 지탱해주던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으니까. 죽음이라는 어둠을 바로 앞에 두고 있던 내게, 너는 그 한마디로 빛이 되어주었다.
평생을 놓고 싶지 않은, 세상에서 가장 밝은 빛.
그때부터 나는 늘 친구라고, 가족 같은 존재라고 여겼던 너에게 다른 감정을 품게 된 것 같다.
우습게도 내 감정을 가장 먼저 눈치챈 건 내가 아니었다. 고등학교 1학년, 우연으로 만나서 단숨에 친해진 친구인 성준이가 어느 날,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 쟤 좋아하냐?”
“쟤라니?”
“쟤. 네 소꿉친구라는 애.”
“…어?”
지금도 여전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쪽으로는 눈치가 상당한 성준이다. 친한 상대의 마음을 간파하는 일. 이상하게 나는 성준이의 말을 듣고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저 홀로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굳어있을 뿐.
한참을 멍하니 있던 나는, 반대편 건널목에서 나를 보고 손 인사를 하는 이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보고 심장이 두근거렸던 적은.
오래전, 엄마가 말했었던 짝사랑의 요정님이 나에게 인사했던 순간이었다.
우리 엄마는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는 걸 좋아했다.
화가 태어난 이후로는 그런 시간이 줄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엄마와의 시간이 너무 좋았다. 고운 목소리로 세상 누구보다도 재미있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니까.
짝사랑의 요정님에 관한 이야기도 그중 하나였다.
우리 부모님은 유학 생활 중에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 케이스였다. 먼저 대쉬한 건 엄마 쪽이었다. 엄마 말로는 아버지를 보고 첫눈에 반해서, 졸졸 쫓아다녔다고 한다. 공부도 뒷전으로 둘 정도로.
아버지도 그런 엄마에게 끌리긴 했지만, 애써 외면했다고 한다. 집안의 격차가 어마어마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내 친가, 그러니까 아버지의 가족은 평범한 시골 농부 집안이다. 게다가 친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교육은 유일한 아들인 아버지에게만 지원할 정도로 가난했다고 한다. 반면, 외가는 그야말로 짱짱하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전 대법원장에, 외할머니께서는 사학재단의 전 이사장.
…게다가, 흔히들 말하는 귀한 외동딸이 바로 우리 엄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께서 엄마를 거절했다는 말에, 씩씩거리며 화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아버지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돼서, 어릴 적에 씩씩거린 게 무척이나 죄송하다.
뭐, 내 외조부모님께서는 워낙에 소탈하셔서 그런 건 개의치 않으시기도 하고. 무엇보다 사람의 됨됨이와 어머니의 행복을 우선으로 두셨던 분들이라, 아버지께서 괜한 걱정 하셨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아무튼, 계속된 아버지의 거절로, 엄마가 낙담했을 때, 그때마다 마음속에서 응원을 해주었던 존재가 있다고 한다. 그게 바로 짝사랑의 요정.
엄마는 짝사랑의 요정님이 해줬던 위안과 응원으로 계속해서 아버지에게 다가갔고, 마침내 짝사랑이 이루어져, 우리 남매가 태어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엄마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던 건 중학생 때라, 그냥 웃고 넘겼다.
…아무리 나라도, 그 나이에 요정의 존재를 믿진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우리 엄마는 짝사랑의 요정님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듯 확고하게 말했다. 내 양어깨를 꼭 붙들고서.
“만약에 우리 아들이 엄마처럼 짝사랑을 하게 되면, 엄마가 신세 졌던 요정님께 부탁해 놓을게. 우리 아들의 사랑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아하하. 응. 꼭 부탁해줘, 엄마.”
그런 대답을 했던 건, 적당히 엄마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서였다.
화가 태어난 이후로, 아주 오랜만에 엄마가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거니까. 그리고 동화 같은 이야기라, 나중에 화가 커서 이런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 때, 화에게 꼭 들려주고 싶어 기억해뒀다.
…들려주진 못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혀 믿지 않았던 짝사랑의 요정님은 그날 이후로 종종 내게 말을 걸었다. “저 아이를 많이 좋아하지?”라고. 그때마다 나는 매번 “네.”라고 대답했다. 사실이니까. 친구든, 가족 같은 존재든, 아니면 그 이상이든. 이소는 나한테 있어, 언제나 소중한 사람이니까.
내가 매번 순순히 “네”라고 대답하면, 요정님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러면, 저 아이에게 고백하는 게 어때?”
나는 그런 말을 요정님이 건넬 때마다,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요정님을 꼭꼭 숨겨두었다. …굳이 고백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내 마음을 가장 먼저 눈치챈 성준이도, 요정님만큼이나 내가 고백하지 않는 걸 의아하게 여겼다.
“야, 너 이소 좋아하는 거 맞지.”
“응.”
“근데 왜 1년 넘게 고백을 안 해? 내가 다혜한테 반했다고 했을 때는 적극적으로 들이대라고 해놓고선.”
성준이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너랑 나랑 같냐.”
“뭐가 다른데?”
“…어?”
“뭐가 다르냐고.”
다르다고 말은 했지만, 뭐가 다른지는 나조차도 몰랐다. 이소를 짝사랑하게 되었다는 걸 깨닫고 나서도, 근 1년 동안은 ‘그렇구나.’ 정도로만 생각하고 넘어갔으니까. 쉽게 말해, 성준이에게 그런 말을 듣기 전까지는 깊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아무래도 ‘다르다’라고 대답한 걸 보면, 머리는 몰라도 마음은 알고 있는 듯했다. 내가 이소에게 고백하지 않는 이유. 그리고 성준이보고 ‘우리는 다르다’라고 말했던 이유.
…짝사랑의 요정님을 마음속에 꼭꼭 숨겨둔 이유.
성준이와 헤어지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누운 나는 차근차근 생각해봤다. 나는 왜 고백하지 않는 거지? 왜 성준이한테 다르다고 말한 걸까. 그리고 나는 왜 요정님을 숨겨두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모르겠어서, 요정님께 질문했다. 혹시 이유를 아느냐고.
하지만, 계속 자기를 숨겼다고 토라진 건지, 요정님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요정님께 이야기를 듣는 걸 포기한 나는 그냥 이유를 직접 알아내기로 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짝사랑을 하고 있는 성준이를 지켜보면서, 나랑 무슨 차이가 있는지 찾아내면 되지 않을까.
우선, 성준이는 다혜를 매일 보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에 비해 나는…, 하도 오래 봐서 그런가, 며칠 안 본다고 해서 견디기 힘들다거나 그런 건 전혀 없었다. 언젠가는 마주치겠지. 바로 옆집인데.
그리고 성준이는 다혜가 다른 남자와 친하게 어울리면,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고 했다.
…이소야, 워낙에 누구를 사귀고 헤어지는 주기가 빠르니까, 나는 이소가 누구를 사귀든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오히려 이소가 누군가와 헤어지고 나서, 그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게 더 신경 쓰였다.
근 반년 가까이, 나는 성준이를 지켜보면서 나와 뭐가 다른지 비교했다.
하지만, 내가 찾아냈던 차이들은 아무래도 모두 간접적이지, 직접적인 이유는 아닌 듯했다. 내가 물을 때는 대답을 안 하면서, ‘이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때면, 요정님이 아니라고 대답했으니까.
결국, 혼자 이유를 찾는 건 무리라고 판단한 나는 성준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정말 고마운 친구다. 고민이 있다고 전화했더니, 성준이는 직접 만나서 얘기하자며, 하루만 기다리라고 말했다.
다음 날 오후, 성준이는 우리 집으로 와서 초인종을 눌렀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성준이는 방학 내내 시골 할머니 댁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내 전화를 듣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왔다고 한다.
나는 그동안 고민했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긴 성준이는 나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너 진짜, 이소 옆에 누가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냐?”
“응? 응.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되던데.”
“다른 남자가 이소 손 막 잡고, 뽀뽀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해도 질투가 안 나냐?”
“…음. 강제면 몰라도 이소가 좋아서 하는 거면, 뭐, 괜찮지 않나.”
그렇게 말하는 내가 믿기지 않는지, 흡사 명탐정의 눈빛으로 나를 탐색하는 성준이다. 한참을 보더니 “아무래도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라고 중얼거린다. …그게 거짓말이었으면, 내가 반년 씩이나 고민하진 않았겠지.
“또란. 너, 네가 이소랑 사귀는 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
“…그런 건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는데?”
“그걸 생각해야지, 멍청아! 지금 생각해 봐! 사귀어도 괜찮은지! 뽀뽀해도 괜찮은지!”
“…으음.”
아무리 생각해도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살면서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아본 적은 있지만, 화를 돌보느라 시간이 없어서 전부 거절했고, 중학교 1학년 때, …이소네 학교 선배한테 첫 키스를 뺏긴 적은 있긴 해도, 이후로는 가족을 제외한 여자랑 이렇다 할 스킨십도 해본 적이 없으니까.
한참을 끙끙거리며 고민해도 도저히 모르겠어서 그냥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한숨을 푹 쉬는 성준이다.
“그러면 있잖아. …만약에, 아주 만약에 네가 이소를 좋아하는 것 때문에 말이야.”
“응.”
“헤어지거나, 이소랑 멀어지게 되면 어떨 것 같냐?”
“…아?”
성준이의 말을 듣자마자, 장마철에 내리는 장대비처럼, 내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내가 미처 의식할 새도 없이 흘러내린 눈물은 순식간에 내 옷을 흠뻑 젖게 했다. 내가 멍하니 눈물만 흘리자, 성준이가 당황하며 휴지를 내밀었다.
나는 그 휴지를 건네받을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다. 온몸이 덜덜 떨릴 만큼 너무 무서웠으니까.
…아, 아하하. 이거구나. 내가 이소에게 고백하지 않는 이유. 성준이보고 ‘우리는 다르다’라고 말했던 이유. 그리고 …짝사랑의 요정님을 마음속에 꼭꼭 숨겨둔 이유.
무서워. 이소랑 멀어질까 봐 무서워. 이소가 나를 싫어하게 될까 봐 무서워. 엄마랑 화처럼 내 곁을 떠나갈까 봐 무서워. 다시 두 사람을 잃었을 때처럼, 슬픔에 사로잡히게 될까 봐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너무 무서워.
공포에 질린 나는 그대로 식탁 의자에서 쓰러지듯 추락했다. 성준이가 놀라서 다가왔지만, 그조차도 온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심장이 너무 아파서, 말 그대로 모든 게 캄캄해져서 아무것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들리지도 않았으니까.
만약 그때, 우리가 집에 있던 게 아니었고, 식탁 위에 늘 복용하던 신경안정제가 없었더라면, 어쩌면 나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짝사랑의 아득한 공포를 톡톡히 체험한 나다.
============================ 작품 후기 ============================
이루네님// 제목은 메르헨틱하지만... 내용이 메르헨틱하다고 하진 않았습니다 (엄근진)
<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의 남자주인공이자,
공식 쿠크다스인 도란이 시점 외전입니다.
네... 제목과 반비례하게, 여러모로 우중충합니다...
2편은 이따 밤에 올릴게요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