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0 73. 애미는 이 동거 반대다. =========================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데 꿈인지, 현실인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남녀 칠…벌써…동…”
아직 잠이 덜 깨서 그런지, 소리가 흐릿하게 들린다. 얕은 살얼음판을 걷는 듯, 꿈마저 목소리에 영향을 받아 시시때때로 변한다. 인상을 찌푸리며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뭔가 익숙한 목소리. 어째 남자 목소리 같은데. 도란이가 깬 건가.
더듬더듬 옆을 만지는데, 따뜻한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뭐지? 애 누워있는데. 누운 채로 말…할 리가 없지. 애초에 소리가 반대쪽에서 들리는걸. 게다가 손도 여전히 꼭 잡고 있잖아.
흐흐, 비몽사몽인데도 보들보들한 촉감이 생생하게 느껴지네. 좋다. 옆에서 자는 도란이를 끌고 와 그대로 품에 안고서 다시금 잠을 청했다.
“말세야, 말세…. 쯧.”
옆에서 못마땅하게 혀를 차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뭐야? 아까부터. 떠지지 않는 눈을 슬며시 떠서 보니 …성준이가 우리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고 있다.
맞다. 얘, 주말마다 도란이 집에 출석 도장 찍으러 오지. …결석이라는 걸 해볼 생각은 없니?
“뭐야. 왜 왔어.”
“난 늘 주말마다 놀러 오거든? 그보다 넌 왜 여기서 자고 있냐.”
“우리 같이 사는데.”
“미친. 같이 산다고?!”
성준이가 집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자, 자고 있던 도란이가 앓는 소리를 낸다. 죽을래? 애 깨잖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성준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성준이가 놓으라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내 손을 떼어냈다.
“야! 뭐?! 같이 살아?! 연애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동거냐?! 어?”
“시끄러우니까 좀 데시벨 줄여! 애 깨잖아!”
지금 내가 소리 안 지르게 생겼냐?! 미친, 너희 진짜….”
“아! 뭐! 알고 지낸지는 28년 됐거든?! 잠도 같이 잔 적 있고, 어릴 적이긴 하지만, 알몸도 다 본 사이에 뭐가 어때서!”
“그건 어릴 적이고! 지금은 다 큰 성인이잖아!”
비몽사몽인 상태로 소리를 질러대니 목이 아프다. 아침에 깨면 꿀보다도 달콤하고 사르르 녹는 하루가 시작될 줄 알았는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게 될 줄은.
나는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으르렁거리며 성준이를 째려봤다. 평소 같으면 꼬리를 말고 항복할 성준이 역시, 이번에는 물러날 생각이 없는지 나를 노려본다.
“그나저나 넌 왜 아침 댓바람부터 여기 오는 건데? 너 이제 예비가 아니라, 진짜 신랑 타이틀 달 날이 코앞이거든? 결혼 3개월도 안 남았잖아!”
“내가 친한 친구 집에 오겠다는데 뭐가 어때서! 결혼 준비는 우리가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까 신경 끄시지! 그것보다 너네는 뜬금없이 웬 동거야? 나는 연애를 하라고 했지, 동거를 하라고 한 기억은 전혀 없거든?!”
역시 진(眞) 최종 보스. 누가 비공식 도란이 보호자 아니랄까 봐, 시어머니 같은 깐깐함을 자랑하는 김성준이다. 사실, 꿀잠을 방해당했다는 생각에 울컥해서 되는대로 내뱉긴 했지만, 성준이 말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상황 때문에 결정한 거긴 하지만, 나도 보통 때였으면 동거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아, 일단 란이 깰지도 모르니까 나가서 얘기하자. 내가 다 설명할게.”
“설명하긴 뭘 설명해?! 10년 넘게 밥 얻어먹어 가며 키운 내 친구를 호락호락 넘길 수 있을 것 같아? 애미는 이 동거 반대다!”
“네가 뭔데 반대를 해! 죽을래?!”
“죽여! 죽여!”
그래, 오늘 너 죽고 나 살자. 이 자식아. 찌뿌둥한 어깨를 돌리며 성준이에게 다가가려는데,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도란이가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시끄러워. 머리 울리니까 싸울 거면 나가서 싸워.”
“…네.”
집주인인 도란이의 한마디에 바깥으로 나온 우리는 데시벨을 줄인 채, 거실에서 2차전을 시작했다.
그래도 움직이니까 잠이 좀 깨는 것 같다. 정신을 차린 나는 같이 살게 된 이유를 성준이에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더니 인상을 팍 찌푸리는 성준이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데, 그래도 다 큰 남녀끼리 한집에서 단둘이 지내는 건 좀 아니지.”
“나도 다른 사람이었으면, 이런 건 생각도 안 했을 거야. 란이라면, 믿을 수 있으니까 하자고 제안한 거지. 솔직히 란이가 애먼 짓 할 애는 아니잖아?”
“누가 그거 걱정한대? 쟤가 아니라, 네가 그럴까 봐 걱정하는 거지.”
“….”
와, 제대로 한 방 맞았다. 사실이라 반박을 못 하겠네. 은근슬쩍 란이 핑계 삼아서 묻어가려고 했는데. 쓸데없이 이런 쪽으로 눈치는 밝아가지고. 아닙니다. 소중히 여길 거예요. 순간적으로 움츠러든 나는 이내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란이가 원하지 않는데도 억지로 강요할 생각 전혀 없거든? 그리고 란이 상태가 어떤지 나도 이제 잘 아니까 최대한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가갈 거야.”
“와, 농담이었는데 진지하게 받아들일 줄은. 너 진짜 애먼 생각 하고 있었냐?”
“야! 죽어, 진짜!”
도란이가 방에서 자고 있다는 것도 잠시 망각한 채, 소리를 빽 질렀다. 이윽고 황급히 입을 틀어막긴 했지만. 나를 보며 킬킬 웃던 성준이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뭐, 너희 두 사람 일에, 내가 이렇게 왈가왈부하는 게 쓸데없는 오지랖처럼 느껴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책임질 수 있는 행동만 해.”
“나도 알아. 그리고 나 엄청 진지하거든? 란이는 내가 평생 책임질 거야. 그럴 각오 하고 있어. 다만, 중요한 건 란이 마음이니까 기다리고 있을 뿐이지.”
“…오오, 권이소. 너 란이 엄청 좋아하나 보다.”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오랫동안 지켜봐 왔으니까. 이 남자라면, 내가 평생을 함께해도 되겠다는 확신이 있거든.”
내 말에 성준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아쉬움이 담긴 한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곧 있으면, 아빠가 경호원을 붙여줄 거니까 엄한 짓 할 기회도 없거든요.”
“경호원? 어쩌면 이번 주가 둘이서만 지내게 될 마지막 날일지도 모르겠네?”
웬일로 센스 있는 성준이의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웬일로 네가 머리를 굴리는구나, 성준아! 네가 지금 나를 위해서 뭘 해야 할지 알겠지? 네 11년 지기 친구를 해칠 생각은 없지만, 단둘이서만 있고 싶으니 자리를 피해 주지 않겠니?
나는 성준이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하하하, 미안해서 어쩌냐. 나 당분간 여기서 살 생각인데.”
“…뭐?”
“나 여기서 먹고 자고 할 건데.”
성준이는 그렇게 말하며 식탁 옆을 가리켰다. …못 보던 캐리어가 추가되었다. 오 마이 갓.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침착하자. 농담이겠지. 웃으면서 농담이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젓는 성준이다. …아하하. 고작 이 정도로 당황하면 안 되지. 이소야. 진정하고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을 모색하자.
그리고 나는 저 흉물스러운 캐리어부터 집 밖으로 던져버리기로 다짐했다. 내가 자기 캐리어를 끌고 성큼성큼 현관으로 향하자, 성준이가 놀라서 다가온다.
“야, 갑자기 뭐야!”
“나가.”
“뭐?!”
“나가!”
이렇게 시작된 3차전. 캐리어를 현관에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기 시작한 우리다.
“흑흑, 새애기야. 어떻게 11년 지기 친구 집에 온 시애미를 내칠 수가 있니?!”
“하하, 맞고 꺼질래. 그냥 꺼질래.”
“안 맞고 안 꺼져! 내 가방 내놔!”
“그래, 나가서 줄 테니까 이것 좀 놓지 않으련?”
성준이와 또다시 언성을 높여가며 싸우는데, 도란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지금 상황에서 절대적 갑(甲) 집주인인 도란이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우리를 살벌하게 째려보고 있다. 두 명 다 쫓아내고도 남을 법한 집주인의 눈빛에 깨갱 하고 저자세를 취하는 우리다.
“…너희 대체 언제까지 싸울 거야. 왜 동네 시끄럽게 아침부터 싸우는 건데.”
“얘가 여기서 먹고 산다니까 나가라면서 문전박대하잖아!”
“그러면 문전박대하지! 안 하냐?! 나도 여기서 같이 지내거든? 란이 말고 다른 남자랑 한집에서 살기 싫다고!”
“저기요. 11년 만에 저를 남자 취급해주셔서 감사한데요. 그 이유가 아니라 단지 란이랑 …읍”
이 인간이 무슨 말을 꺼내려고. 성준이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았다. 티격태격하는 우리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집주인 도란이가 흡사 솔로몬이 빙의한 듯한 포스로 성준이에게 말을 걸었다.
“넌 왜 뜬금없이 우리 집에 와서 지내겠다는 거야.”
“흑흑, 자기. 딴 년이 생겼다고 나한테 너무한 거 아냐?! 우리가 한 침대 쓴 지 하루 이틀이냐고! 왜 갑자기 내외하는 건데!”
“…아니, 그게 아니라, 이소도 여기서 당분간 같이 사니까 납득할 이유가 아니면, 그동안은 좀 곤란해.”
흡사 조강지처와 바람난 남편의 대화를 엿듣는 기분을 느끼기도 잠시, 곤란하다는 도란이 말에 단박에 내 얼굴색이 밝아졌다. 반면, 도란이의 거절이 담겨있는 말에도 얼굴색이 그대로이던 성준이가 태연하게 말을 꺼냈다.
“우리 집 에어컨 고장 났어.”
“어?”
“여름이라 서비스가 밀려서, 수요일까지는 찜통에서 살아야 해.”
…성준이의 말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도란이다. 야, 그러지 마. 끄덕이지도 마, 불안하다고. 성준이도 네가 끄덕이는 걸 보자마자 씩 웃잖아!
“그런데 왜 하필 란이 집이야! 다혜 집에 가!”
“나는 신부의 프라이버시를 보장해주는 멋진 신랑이랍니다.”
내 프라이버시는? 내 권리…는 나도 여기 얹혀서 지내는 거니 전혀 없긴 하구나.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최종 결정은 도란이한테 맡길 수밖에 없구나. 나는 애타는 눈빛으로 도란이를 바라봤다. 성준이 역시, 불쌍하고 애처로운 눈빛과 자세를 취하더니 아예 무릎까지 꿇었다.
“…하아. 그래, 그럼.”
“앗싸! 역시 내 베프!”
“…세상에.”
“그럼 당분간 잘 부탁한다. 권이소.”
“꺼져!”
그렇게… 단둘만의 동거는 허무하게 6일 천하로 끝나버렸다.
============================ 작품 후기 ============================
soae님// ?!?!?!?!?!!
빗자루계인님// 빗자루계인님의 예지력이 1 추가되었습니다. (따란!)
ㅋㅋㅋㅋㅋㅋㅋㅋ 아이고 이소야 (안타까움)
연참의 폭풍은 3번 칩니다 X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