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8 71. 사랑받는 남자 =========================
30분 정도를 이동해서 은유 언니네 집에 도착한 우리다.
아담하면서도 귀여운 장식들로 예쁘게 꾸며놓은 마당이 있는 주택.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집이라도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언니네 집에 처음 오는 건데, 역시 뭐라도 사 올걸. 도란이가 괜찮다고 만류해서 그냥 오긴 했지만, 슬며시 후회가 생긴다.
…왠지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하고, 장인·장모님께 결혼 승낙 받으러 가는 기분이 든다.
옆에서 바짝 긴장하고 있는 도란이를 보니 더욱 그런 것 같아. 이유는 전혀 다르지만. 얼마나 긴장했으면, 덜덜거리면서 번호키를 누르지도 못하고 있다. 보다 못해 한숨을 쉬고서는 옆에 있는 인터폰을 눌렀다.
인터폰 멜로디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은유 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누구세요?”
언니 목소리가 인터폰에서 들리자 소스라치게 놀라는 도란이다. 흠칫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더니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렇게 언니가 무섭니.
“언니! 저 이소예요. 문 좀 열어주세요.”
“응? 겸디가 대문 비밀번호 알 텐데. …아아, 응. 알았어.”
언니 목소리가 묘하게 낮아지자, 도란이가 또다시 진동 모터라도 달아놓은 듯 덜덜 떨기 시작한다. 대체 언니한테 당한 게 얼마나 많으면, 목소리만 듣고도 이렇게 떠는 건지. 들어가자는 말에 고개를 세차게 젓는 도란이를 이끌고 억지로 들어왔다.
인터폰으로 왔다고 언니한테 알려서 그런지, 우리를 반기듯 현관문이 열려있다. 문이 열린 걸 도란이도 본 건지, 아까보다 더욱 힘을 줘서 버틴다. 빽빽 우는 것만 없다뿐이지, 어린아이를 억지로 끌고 예방접종 맞추러 가는 것 같다. 지친다, 지쳐.
한숨을 내뱉고 다시 도란이를 끌고 가려는데, 집 안에서 웬 복슬복슬한 하얀 강아지가 달려 나온다. 우리 쪽으로 빠르게 오더니 멍멍 짖어대기 시작하는 강아지다. 뭐지, 집 지키는 건가. 도둑이 들어와도 잠만 퍼질러 자는 우리 뽀삐보다 훨씬 똑똑한데?
…하긴, 우리 집에 들어온 도둑은 그 순간, 염라대왕 영접할 테니 굳이 안 지켜도 되겠구나.
“루비야!”
똑똑한 강아지를 보며 감탄하고 있는데, 내 뒤에 있던 도란이가 앞으로 나와 강아지를 쓰다듬는다. 강아지 이름이 루비인가보다. 도란이가 이름을 불러주니 좋다며 배를 뒤집고서는 헉헉거린다. 도란이 손을 핥고, 낑낑대고, 비비적거리고. …뭔가 어디서 많이 본 모양새인데.
“우리 예쁜 루비, 삼촌 보고 싶었어?”
“멍!”
“으응, 많이 보고 싶었구나.”
“많이 보고 싶었지. 그긋드 으즈므니.”
바로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도란이가 그대로 얼어버렸다. …은유 언니가 ‘넌 오늘 죽었다.’라는 눈빛으로 도란이를 노려보고 있다. 왜 도란이가 그렇게 떨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고.
받은 게 있으니, 재빨리 도란이 앞으로 가서 막아섰다.
“하하하, 안녕하세요. 언니.”
“응, 안녕. 이소야. …거기.”
“…네.”
은유 언니가 도란이를 바라보며 검지를 까딱였다. 그걸 본 도란이가 강아지를 쓰다듬던 걸 중단하고, 빠르게 일어섰다. …어째 내가 빡쳤을 때의 이혁이를 보는 것 같다. 앞으로 이혁이한테 좀 잘해야지.
“착하지, 이리 온.”
‘이리 온’ 앞에 “죽기 싫으면 당장 기어와라.”라는 말이 붙어있어야 할 것 같은 포스다. 도란이도 그걸 느꼈는지 움찔하다가, 이내 내 어깨를 붙잡아 나를 자기 앞에 세우더니 도리질을 한다. 도란이가 순순히 오지 않자, 은유 언니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겸디.”
헉, 언니가 눈을 크게 뜨고서 이쪽으로 다가온다. 언니가 점점 다가오자, 나를 붙잡고서 뒷걸음질 치기 시작하는 도란이다. 야! 엎어져! 도란이가 계속 경계하며 거리를 두자, 언니가 한숨을 쉰다.
“너 손목에 그거 뭐야?”
살기등등한 포스는 온데간데없고,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묻는 언니다. 그러고 보니 도란이, 지금 아대 착용 중이지. 짧은 사이에 그걸 놓치지 않고 보셨구나. 대단하다.
“손목 아파서 한 거야?”
도란이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도란이를 바라보던 언니가 한숨을 내뱉었다. 내뱉은 한숨과 함께, 언니의 표정에서 분노가 사라졌다. 그 대신 걱정과 온화함이 감돌고 있다.
“…삼촌 때문에 그래?”
“….”
“겸딩이, 이리와.”
애정이 가득 담긴 은유 언니의 말에 내 뒤에 숨어있던 도란이가 슬며시 나와, 언니에게로 다가갔다. 도란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대로 끌어안고서 등을 토닥이는 은유 언니다.
도란이가 그렇게 겁냈던 사촌 누나와의 만남은, 지켜보던 내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로 훈훈하기만 했다.
아무런 응징 없이 언니네 집에 입성한 도란이는 거실 소파에 드러눕다시피 앉아 쿠션을 끌어안았다. 정말이지, 얼마나 자주 들락거렸으면, 내 집 같은 편안함이 느껴지는구나. 이 와중에 쿠션한테 질투를 느끼는 나도 참….
“자형은?”
“윤호 데리러 갔어.”
“…으응. 조카는?”
“오자마자 조카 타령하는 애가… 어휴, 아니다. 자고 있어.”
무어라 성질을 내려고 했지만, 도란이 상태를 아시기에 말을 삼키는 언니다. 도란이도 그걸 알고는 미안한지, 배시시 웃어 보인다.
“오랜만에 우리 남편 좀 쉬게 해주려고 했더니. 오히려 일거리가 더 늘었잖아.”
“아하하, …죄송합니다. 누나, 이따가 나 집에 갈 때 자형 좀 빌려줘.”
“여기서 약 먹게?”
“응.”
도란이의 말에 언니가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길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지 않아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언니가 마냥 신기하다. 역시, 도란이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이럴 때 보면 함께한 세월은 길면서도 남들보다 도란이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은유 언니도 그렇고, 아까 수간호사님도 그렇고, 성준이도 그렇고. 왠지 그동안 허송세월한 것 같아 후회가 밀려온다.
…아냐, 앞으로 더욱 노력하면 되지. 누구보다 도란이를 잘 알 수 있도록.
“언니, 저 이만 가볼게요.”
“벌써? 더 있다 가지. 우리 남편이 과일 사 올 건데, 그거 먹고 가. 응?”
“그러고 싶은데, 제가 선약이 있어서요.”
“그래? 아쉽다.”
언니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언니가 나를 따라 나온다. 마중 나오려는 건가? 괜찮은데. 괜찮다고 정중히 사양하려는데, 그보다 먼저 도란이가 거실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채로 언니에게 물었다.
“누나, 어디가?”
“여기 길 복잡하잖아. 큰 도로까지 안내해주려고.”
“아, 그럼 내가 나갈게.”
도란이가 이쪽으로 다가오자, 언니가 고개를 저으며 도로 들어가라고 손짓한다.
“됐어. 넌 여기서 유나 깨면 정성껏 돌봐. 그게 벌이야.”
“…네. 늘 두던 곳에 있지? 아기 용품.”
“응.”
언니라면 일부러라도 나랑 도란이를 붙여놓으려고 할 줄 알았는데. 신생아 돌보는 게 힘들다더니 잠깐의 자유를 맛보고 싶었던 걸까? 그게 아니면,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는 걸까?
아무래도 내 추측은 정확했는지, 큰 도로까지 안내해준 언니가 지갑을 뒤적거리더니 50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내게 건넸다. …뭐지. 이 돈 줄 테니 내 동생 옆에서 떨어지라는 막장 드라마 …일 리가 없지.
“언니, 이건 갑자기 왜….”
“…란이가 살이 많이 빠졌더라. 내가 아직 산후조리를 해야 해서 신경을 못 써주거든. 그러니까 이 돈 가지고 같이 맛있는 것도 사 먹고, 둘이 좋은 곳에 가서 데이트도 하고 그래.”
“아, 아니에요. 이런 거 안 주셔도…”
“란이한테 직접 주면 안 받을 게 뻔하단 말이야. 누나가 동생 챙겨주고 싶어서 그러니까 제발 받아줘, 이소야. 응? 부탁이야.”
언니의 진심을 아니까 거절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받기도 뭣하고. 한참을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말대로 데이트 비용으로 쓰기는 좀 그렇고.
쭉 간직하고 있다가 도란이한테 필요하거나, 원하는 게 생기면, 이 돈으로 사줘야겠다.
이럴 때면 느끼는 거지만, 도란이는 정말 주변 사람들한테 사랑받고 있구나. 그리고 자식보다 도란이에게 폭풍 애정을 쏟는 분이 내 주변에도 있지. …우리 엄마.
하하, 우리 엄마한테 도란이가 나 때문에 내 전 남친한테 협박당했다고 얘기하면, 나를 얼마나 죽이려고 들까. 내 예상은 또다시 맞아떨어져서 내게 자초지종을 듣자마자, 사랑의 매를 연타로 퍼붓는 우리 엄마다.
도란이 행동은 전혀 예상 못 하면서, 다른 건 왜 이렇게 잘 맞추는지. 이참에 돗자리나 깔까. …아니, 그전에 묏자리가 먼저 깔리겠다.
“악! 아파! 아프다고!”
“이 웬수년아! 왜 남의 집 귀한 자식까지 끌어들여서 그 사달을 나게 해! 어?!”
“아니! 나도 란이한테 미안하긴 한데! 엄마는 큰일 겪은 친딸한테 말을 꼭 그렇게 해야 해?!”
“뭘 잘했다고 꼬박꼬박 말대꾸야?!”
“내가 잘못한 건 또 뭔데!”
내가 그런 새끼인 줄 알았으면 사귀었겠냐고! 꼬박꼬박 연락하고, 잘 챙겨주길래 다정한 성격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집착 쩌는 미친놈일 거라고는 짐작도 못 했거든?! 나도 피해자라고, 피해자!
엄마의 공격을 회피하고는 씩씩거리며 째려보자, 그대로 내 뒤통수를 가격하는 김은재 여사님이시다.
“뭘 잘했다고 시건방지게 엄마를 째려봐. 그러게 왜 그런 미친놈을 만나가지고! 그 자식, 처음 볼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엄마는 란이 빼고는 전부 별로라고 하잖아!”
“그래! 너 말 잘했다. 옆에 그런 애가 떡하니 있는데, 낚아채서 데리고 살 생각을 못 할망정, 어디서 그런 파리가 쪽 빨아먹은 것 같은 놈을 데리고 와서는 결혼이니 마니…”
“안 그래도 낚아채서 데리고 살려고 열심히 꼬시고 있거든!”
거침없이 내 등짝에 여래 신장을 새기던 엄마의 손길이 멈췄다. 얘기 꺼내면 귀찮아질까 봐 어떻게든 참으려 했는데, 계속 맞고 있다간 진짜 조상님이랑 하이파이브할 것 같아 마지못해 털어놓았다.
그리고 이혁이가 자주 써먹는다는 ‘기적의 도란 효과’는 생각보다 굉장했다.
내 이야기를 전부 들은 엄마의 표정이 단박에 열반의 경지에 들어간 사람처럼 온화하고, 자애롭게 바뀌었다. 잠시 가만히 있던 엄마가 말없이 내 손을 덥석 잡는데, 눈빛에서부터 ‘네가 살면서 쓸모 있을 때가 다 있구나.’라고 말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
“드디어 이제 란이한테 도 서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네?”
…심지어 언제나 살벌하던 말투까지도 부드럽게 변했어. 그나저나 우리 엄마, 다른 건 유난 떨지 않으면서 도란이랑 관련된 건 늘 이렇게 설레발을 치더라. 덕분에 괜히 내 얼굴까지 화끈거린다.
“무, 무슨 벌써 도 서방이야. 아직 연애도 정식으로….”
“그렇다고 네가 놓아줄 애는 아니잖아.”
“…그렇지.”
역시 우리 엄마야. 내가 엄마의 외모부터 성격까지 완벽히 물려받은 판박이라서 그런지, 나를 너무 잘 파악하고 있어. 엄마도 싫다는 아빠 계속 꼬셔서 결혼까지 골인했다더니, 그것마저도 유전이 된 걸까.
“안 되겠다. 오늘 도장 문 닫고, 엄마랑 장이나 보러 가자. 장모가 돼서 우리 사위, 맛난 거 해줘야지.”
“그러니까 무슨 벌써부터 사위 타령이냐고! …뭐해줄 건데?”
“새우장이랑 소 불고기, 장조림, 그리고 간단하게 나물 반찬하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메뉴를 말하는 엄마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나다. 내가 살면서 엄마한테 여태껏 받아본 어떤 상차림보다 화려한 라인업인데? 진짜 나 도란이랑 부모님이 뒤바뀐 거 아닐까. 알고 보니 우리 엄마 친아들이 도란이라거나.
그래도 엄마한테 도란이가 사랑받으니까 기분 엄청 좋네.
살면서 어떤 남자친구를 데리고 와도 퇴짜를 놓던 우리 엄마라 그런지 더더욱 감회가 새롭다. 엄마가 도란이를 챙겨줘서 고맙긴 하지만, 요리한다고 힘들 테니 도란이가 좋아하는 몇 개만 해달라고 해야겠다.
…라고 생각했던 내 다짐이 무색해지게끔, 엄마는 그야말로 음식을 다품종 대량생산하셨고, 나는 그걸 운반하느라 죽는 줄 알았으며, 한동안 우리 밥상에서 엄마가 만든 음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여튼… 우리 엄마, 나처럼 ‘적당히’라는 게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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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자루계인님// ㅋㅋㅋㅋㅋㅋㅋ 사리를 감당할 수 있는 자, 도란을 가져라!
soae님// 단둘이 좁은 차 안에서...txt 흐흐흫흐흐흫(흡족)
아주특별한행복님// 저를 이렇게까지 원하시면, 연참을 안할 수가 없잖아욧 /ㅅ/
출근시간, 퇴근시간에 맞춘 연참! XD
(그리고 시체가 된 에이온) ㅇ<-<
란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여러모로 사랑받네요.
그만큼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니 그런 거겠지만요. :D
금요일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