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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75화 (75/97)

00075 68. 나는 영원히 네 곁에 =========================

잠시 나를 응시하던 도란이는 다시금 “미안.”이라는 말을 내게 건넸다.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이 이렇게 무겁게, 그리고 불안하게 다가왔던 적이 있던가. 마음만 같아서는 “미안하면 아무 말도 하지 마.”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고, 내 예상과 맞아떨어지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전에도 말했던 적 있는 것 같은데, 가상연애했던 것 말이야. 일단 그것부터 사과해야 할 것 같아.”

왜 불길한 예감은 한 번도 빗나가지를 않는 거지. 로또 번호나 맞출 것이지, 이딴 쓸데없는 것 예지하지 말란 말이야. 아니다. 어쩌면 각오하고 맞는 게 덜 아프기는 개뿔, 이미 여러 번 맞아봐서 알잖아. 각오해도 더럽게 아프다는 거.

“가상연애 때문에 나를 좋아하게 된 건 맞지?”

대답하기 싫다. 더는 듣고 싶지 않다.

됐으니까, 적당히 넘어가 줄 테니까 말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그렇지만, 지금 피한다고 해서 도란이가 하려는 말을 평생 묻어둘 리가 없다. 그걸 너무나도 잘 아는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도란이가 뭐라고 말하려나.

에어백 삼아서 또다시 예측이나 해볼까. 보나 마나 이러겠지. “그것 때문에 나를 좋아하게 만들어서 미안해.”라고. 아니, “좋아하게 만들었는데 받아주지 못해서 미안해.”라고 하려나.

…양쪽 다 비참하기는 매한가지네.

“…미안해. 원인제공을 해놓고 피하기만 해서.”

어? 방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 들린 것 같았는데.

생각하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접하면, 종종 한국어인데도 제대로 의미가 와 닿지 않아, 무슨 소리인지 모를 때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단언컨대 나는 지금 상당히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을 거다.

“응?”

“…응? 왜?”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하던 도란이가 나를 바라보고 살짝 당황해하고 있으니까.

잠시 영혼이 가출한 상태로 멍청하게 눈만 껌뻑이던 나는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계속하라고 말했다.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도란이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사실…, 완전히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던 것 같아. ‘…혹시?’ 하는 생각이 이따금 스쳐 지나갔지만, 괜히 멋대로 오해했다가 친구 사이가 깨질까 봐 겁이 나서 그냥 묻어두고 지워버렸어.”

“….”

도란이의 상태를 전혀 몰랐었을 때의 나는 분명 도란이가 지금 내뱉는 말에 씩씩거리며 화냈을 거다. 왜 멋대로 지워버리느냐고. 하지만, 도란이의 상태가 어떤지 잘 알아서일까. 도란이의 말이 마냥 슬프게만 들린다.

헤어짐이 무서워서 남들은 다 하는 연애조차도 거부하는 애가, 순간적으로 ‘혹시’하는 직감을 느낄 때마다 나와 멀어지게 될까 봐 얼마나 불안해했을지, 겁을 냈을지 어렴풋이 짐작이 가니까.

“그렇게 아니라고, 친구라고만 생각하면 …적어도 계속 친구로는 있을 수 있을 테니까. 불확실한 것보다 차라리 확실한 사이로만 있는 게 나을 것 같았어.”

아무래도 내 짐작은 정확한 듯하다.

그런 생각을 했을 때마다 도란이를 잠식했을 불안의 여운이 여전히 남아있는지, 표정은 덤덤하지만, 도란이 몸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

“그런데 네가 나를 좋아한 게 맞는다면, 어찌 됐든 나는 네 마음을 무시하고, 너한테 상처를 준 거잖아. …나 편하자고, 피하기만 해서 미안해.”

“…아냐. 괜찮아. 괜찮아, 란아.”

평소 같으면 ‘미안하면 나 책임져.’라고 뻔뻔하게 말했겠지만, 지금은 차마 못 그러겠다. 이 겁쟁이가 지금 얼마나 큰 용기를 낸 건지 알 것 같으니까. 책망하고, 책임을 묻는 대신 괜찮다고 다독였다.

수간호사님의 말처럼, 이렇게 떨면서도 나를 위해 피하지 않고, 용기를 내준 게 고마워서.

내 품에서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건지, 떨림이 멎은 도란이가 내 어깨에 고개를 파묻는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더니 갑자기 키득거리며 웃는 도란이다.

“나 실은 그거 때문에 의사 선생님께 맞았어.”

“뭐?”

“의사 선생님께 상담 차 얘기했더니 ‘누가 현우 새끼, 자식 아니랄까 봐, 그런 걸로 여자 속 썩이는 것까지 닮아가지고!’라면서 이마를….”

“….”

뭔가 심경이 복잡하다. 이걸 속상하다 해야 하나, 아니면, 분풀이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당사자인 내가 안 때리고 가만히 있는데.

…아닌가, 의사 선생님께서 선수를 치셔서 내 주먹이 얌전한 건가.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로 실랑이하는 느낌이다. 뜬금없이 떠오른 주제에 대해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하던 나는 문득 품이 허전한 것 같다고 느꼈다. 슬며시 아래를 보니 진짜로 도란이가 없다.

내가 엉뚱한 걸로 고민하는 동안, 내 품에서 빠져나왔는지, 도란이는 다시금 나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있잖아. 진료실에서 처음으로 차근차근, 진지하게 생각해봤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잠깐 방심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냐. 스르르 놓고 있던 긴장의 끈이 다시금 팽팽하게 당겨진다. 대체 도란이가 무슨 말을 할까. 전혀 짐작도 안 가긴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 것 같다.

나한테 좋은 이야기는 아닐 거라는 거. …왜냐하면, 도란이의 표정이 좋지 않으니까.

잠시 입술을 깨물며, 머뭇거리던 도란이는 또다시 내게 “미안.”이라고 말했다. 왜, 또 뭐가 미안한 건데. 심장을 짓누르는 듯한 갑갑함에 저절로 한숨이 터져 나온다.

“…너도 알다시피, 지금 나는 여러모로 최악인 상태잖아. 몸은 지쳤고, 여전히 아버지 때문에 머리는 복잡하고, 그리고 스트레스 수치도… 회복하려면 분명 시일이 꽤 걸릴 거야. 게다가 누님, 아니, 수간호사님께 들었겠지만, 나는 줄곧 연애하겠다는 의지조차 없는 상태였거든.”

“그래서?”

“…그래서 네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지금은 전혀 없어.”

어두운 도란이의 표정만큼이나 글자 하나하나마다 내 속을 어둡게 드리우는 말. 아마도 도란이의 말은 이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거절’

사실 수간호사님께 격려를 들었을 때, 기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수간호사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어디까지나 수간호사님의 생각이지, 도란이의 생각은 아니니까.

나는 이미 여러 번, 도란이에게 거절당해왔기에 그게 얼마만큼 아픈지 뼈저리게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거절당할 때를 대비해, 수간호사님의 격려에서 받은 기쁨을 애써 줄이고, 조금이라도 덜 아플 수 있도록 경계심이라는 방어막을 세웠다.

하지만, 늘 그래왔던 것처럼, 거절당할 준비를 하면서 세워온 방어막은 모래로만 쌓은 것처럼 금세 무너져내려 버린다. 허탈할 정도로.

분명 도란이는 거절을 말할 거다. 그리고 나는 그 거절에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말을 하겠지. 그렇게 단언해도 속은 너무나도 쓰라리다 못해 썩어 문드러질 게 뻔하고. 나도 짝사랑의 아픔을 오지게 겪기는 했나 보다.

다가올 아픔을 막으려는 듯, 눈앞에 있는 도란이가 아른거리게 보일 정도로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래도 이건 약속할 수 있어. 나한테 여유가 생기면, 그걸 전부 너로 채울 수 있다고.”

“…뭐?”

얘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내 예상을 벗어나는 말만 하는 거지. 뭐지? 이거 도란이가 새로 터득한 시간차 희망 고문 공격인가? 아니면, 망상이 만들어낸 지독한 꿈?

그것도 아니면, 나… 이번에는 조금 기대해도 되는 거야?

마지막 방어선인 눈물을 해제하고, 또렷해진 시야로 도란이를 바라봤다. 도란이도 나처럼 긴장한 건지, 양손을 맞잡은 채 꼭 쥐고 있다. 자신의 손만 바라보던 도란이가 슬며시 고개를 들더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네가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도 장담하지 못하고, 더딘 속도에 짜증 날 수도 있고, 힘들 수도 있어. 그러니까 이 선택은 이소 너한테 맡길게. 나 포기할래, 아니면 …기다려줄래?”

…아무래도 본가에 가면 귀부터 구석구석 샅샅이 파야겠다. 아까부터 계속 청각을 의심하게 되잖아.

청각뿐만이 아니다. 너무 놀라서 뇌까지 마비된 건지, 순간적으로 눈앞이 왔다 갔다 팽팽 돌 정도로 어지럽다. 도란이 눈빛을 보니,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닌 게 맞는데.

그래도 혹시나 해서 침을 꿀꺽 삼키고는 도란이에게 물었다.

“나 차, 차, 차는 게 아니라?”

“…널 차 달라는 거야?”

“아니! 차지 마!”

저 멍멍이가 행여나 나를 뻥 차버리기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소리를 빽 지르며 만류했다. 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흠칫 뒤로 물러나던 도란이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꿈보다 더욱 믿기지 않는 현실에 날아갈 듯이 좋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다. 이런 말을 한 이유가 친한 친구를 잃기 싫어서 마지못해 받아주는 거거나, 원인제공의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면, 거절보다 몇 배로 더 비참할 것 같으니까.

아까는 눈앞이 어지럽더니, 이제는 성대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 같다. 아니, 나도 도란이처럼 온몸이 떨리는 거려나. 그래도 확실히 해두고 싶어 용기를 내어 물었다.

“연애하기 싫다며…. 못할 거 같다며. 그런데 왜….”

내 말에 천천히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생각에 잠긴 도란이다. 누가 보면 아주 잠시였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도란이의 모든 행동이 끝나지 않는 슬로우 모션처럼 보일 정도로 길게만 느껴졌다.

“…음, 다른 사람은 아니지만, 이소 너라면 괜찮으니까.”

“뭐가 …괜찮은데?”

“솔직히 요새 머리가 너무 아파서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잠시 어깨를 으쓱이던 도란이는 생긋 웃으며 내 손을 꼭 잡는다.

“이렇게 손잡는 것도.”

내 손보다 뜨거운 도란이 손을 가만히 느끼는 순간, 도란이가 내 손을 잡고 있지 않은 반대쪽 팔로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안는 것도.”

내 귓가에 대고 나긋하게 속삭이는 도란이의 말에 심장이 아플 정도로 세차게 뜀박질한다. 아려오는 가슴 쪽으로 잠깐 시선을 돌리려는데, 도란이가 그 찰나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댔다.

“입맞춤도. 너랑 하는 건 전부 괜찮아.”

코끝이 맞닿는 거리에서 도란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웃음으로 배시시 웃어 보였다. 기습적인 스킨십도, 흡사 고백과도 같은 말도 설레서 미칠 것 같은데, 거기에다 귀여워 죽겠는 웃음으로 나를 바라보니 …너무 좋아서 정신을 놓을 것 같아.

도란이에게 안겨 한참 동안 술 취한 것보다 더 해롱거리던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여전히 행복하고, 설레고,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한 것도 사실이라, 속에 담아왔던 걱정을 넌지시 꺼냈다.

“혹시 책임감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지? 내가 널 좋아하게 된, 원인 제공을 한 게 너니까 …그걸 책임지려고.”

“…어? 그게 무슨… 아, 아하하. 권이소, 날 되게 과대평가하네.”

“과대평가?”

과대평가라니.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는 말에 도란이 품에 파고 들어있던 고개를 내밀고서 도란이를 쳐다봤다. 나와 잠시 시선을 마주하더니 한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는 도란이다.

“그야 난, 책임감 하나로 누군가를 평생 책임진다든가, 키스할 만큼 희생정신 강한 남자는 아니라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란이가 살짝 벌린 내 입으로 말캉한 혀를 집어넣었다. 부드럽고 상냥한 키스에 살짝 놀란 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대신 이 키스를 온전히 느끼고 싶다는 욕구만 강하게 남아 도란이에게 얌전히 나를 맡겼다.

꿈 위를 거니는 듯한 몽롱한 키스가 끝나고, 도란이가 다시금 짧은 입맞춤을 하며 말했다.

“적어도 이거 하나는 말할 수 있어. 내가 키스하고 싶은 상대는 오직 너뿐이라는 거.”

“나도 이거 하나는 단언할 수 있어.”

내 귀여운 겁쟁이가 이 정도까지 용기를 내줬으니, 나도 그만한 보답을 해야겠지. 조수석에서 운전석으로 옮겨간 나는 운전석에 도란이를 가두고 씩 웃었다.

“란이 너라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힘들어도 짜증 나도 괜찮아. …나는 영원히 네 곁에만 있을 거니까.”

내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갈구하는 격렬한 키스를 나눴다. 호흡이 불규칙하게 거칠어질 정도로, 누구의 타액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어지러이 뒤섞여 흘러내릴 정도로 한참을.

============================ 작품 후기 ============================

SYSTEM :

(시체모드로 전향해 게임을 하려던 에이온은 독자님들의 반응에 당황했다) ;;;ㅇ<-<

황급히 게임을 끄고, 기습 연참을 시작했다.

연참, 로맨틱, 성공적.

ㅇ<-< (다시 월요일까지 시체모드)

[독자님들의 반응이 너무나도 똑같아, 개인 답글을 달기가 뭣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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