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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74화 (74/97)

00074 67. 미안해  =========================

수간호사님과의 이야기가 끝나고 대기실로 돌아온 나다. 혹시나 도란이가 먼저 나와 있을까 봐 내심 걱정했는데, 도란이는 아직도 의사선생님과 상담 중인 듯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궁금하기도 하고, 얼마나 상태가 안 좋으면 이렇게 오래 있나 걱정도 된다.

기다리기 지루하긴 하지만, 게임이나 웹서핑 같은 것도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결국은 휴대폰도 내려놓고 애타게 진료실만 바라보고 있는 나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그 사이 또 코피가 터진 건지, 휴지로 코를 막은 도란이가 진료실에서 나왔다. 속상하고 미안해서 그대로 도란이를 꽉 안았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지겨웠겠다.”

“…아니, 전혀. 코피는 또 왜 터진 거야. 피곤해?”

“피곤…하긴 한데, 그게 아니라 의사 선생님께 한 대 맞았거든. 맞자마자 코피가 나오니까 의사 선생님도 좀 당황하시더라. 나 선생님이 당황하는 거 처음 봤어. 하하.”

그게 웃을 일이냐?! 얘가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가뜩이나 살도 빠져서 면적도 줄어든 애를. 내가 맞은 것보다 더 열 받고 속상하다. 살짝 미소 지으며 내 품에서 빠져나온 도란이는 접수처로 갔다.

접수처에서 잠시 수간호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한숨을 쉬며 나와 수간호사님을 번갈아 보는 도란이다. …아무래도 수간호사님이 나한테 도란이 얘기해준 게 들킨 것 같다. 수간호사님과 내가 동시에 어색하게 웃자 도란이가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우리 둘을 빤히 쳐다본다.

…아아, 시선이 따갑다.

“누님, 사흘 뒤에 봐요.”

“응, 잘 가. 자주 오지 말고. 아니, 매일 와도 좋지만, 안부 인사만 환영이야.”

“하하, 네. 다음에 봐요.”

수간호사님과 작별인사를 나눈 도란이가 이쪽으로 온다. 누구든 그렇겠지만, 자신의 속내를 타인이 허락도 없이 까발리는 걸 정말 싫어하는 도란인데. 그래도 아까 수간호사님이랑은 웃으면서 대화했으니까 괜찮지 않으려나.

아니, 수간호사님은 어찌 됐든 연장자고, 나는 만만한 동갑내기 친구고.

모든 분노의 화살이 죄다 나한테 돌아온다거나. …또 내가 술김에 키스했을 때처럼 화나 있을까 봐 차마 고개를 못 들겠다. 도란이가 화내는 거 진짜 무섭단 말이야. 차라리 번지점프를 했으면 했지, 도저히 …볼 용기가 안 난다.

“이소야.”

“…어?”

“뭐해? 안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다정한 말투에 슬며시 고개를 드니 아까처럼 미소 짓고 있는 도란이다. …화난 거 아니지? 맞지? 사람들 보는 앞이라 일부러 표정관리 한다거나…. 혹시나 해서 슬며시 도란이 볼을 꼬집었다.

“…아파. 갑자기 왜 꼬집고 그래.”

“아, 미안.”

“빨리 가자. 조금 있으면 점심시간이잖아.”

“응….”

여전히 긴가민가해서 멈칫하고만 있었더니 도란이가 내 손을 잡고 병원을 나왔다. 도란이만 계속 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화난 건 아닌 것 같다. 그제야 살짝 안도하는 나다.

정말, 나는 웬만한 일에 쫀다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데, 우리 엄마랑 도란이가 화내는 건, 아니, 기분이 안 좋기만 해도 엄청 신경 쓰인다.

눈치 보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빨리 기분이 풀렸으면 좋겠다.

우리 엄마는 약간의 걱정과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포 때문에 그렇다면, 도란이는… 무서운 것도 무서운 거지만, 그보다는 좀 더 복잡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뒤엉켜 불안과 걱정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생각들의 끝에는 ‘도란이가 다시 행복하게 웃었으면 좋겠다.’가 언제나 존재한다. 지금처럼.

“약국에 사람 별로 없으면 좋겠다. 3주 동안 코빼기도 안 보였는데, 약속 시각까지 어기면 누나가 얼마나 나를 들들 볶을까.”

“…그러게.”

“아. 이소야, 둘이서만 할 얘기가 있는데.”

“…무, 무슨?”

“이따 차에서 얘기하자.”

“…응.”

왜 또 불안하지. 피가 마른다, 말라. 나도 도란이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니 어떻게 보면 잘 됐다 싶으면서도 또 나를 거부한다거나, 화를 낸다거나, 아니면, 그냥 친구로 돌아가자고 말할까 봐 자꾸만 초조해진다.

도란이의 바람대로 약국에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조금은 불만인 나다.

사흘 뒤에 또 와야 한다면서 약봉지에 약이 왜 이렇게 수두룩한 거야. 두툼한 약봉지를 보니 저절로 울적해져서 한숨만 나온다. 양만 보면 밥이 아니라, 약으로 배 채우겠다.

도란이가 차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약봉지를 뒷좌석으로 던진다.

“약 안 먹어?”

“응? 운전해야 하잖아. 신경안정제라서 저거 먹고 운전 못 해. 이따 누나 집 가서 약 먹고, 자형한테 대신 운전해달라고 부탁해야지.”

아, 확실히 저거 먹고 운전하면 그야말로 자살 행위겠네. 도란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할 말이 있다더니, 잠깐의 대화 이후 계속 아무 말이 없는 도란이다. 도란이가 생각에 잠겨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속은 가뭄에 타들어 가는 논처럼 바싹 말라간다. 차라리 내가 먼저 말을 꺼낼까. 수간호사님의 얘기를 들으며 줄곧 생각했던 것들을.

좋아, 하자. 심호흡한 나는 도란이를 바라보며 사과의 말을 내뱉었다.

“저기, 란아. 미안해.”

“이소야, 미안… 응?”

거의 동시에 내뱉은 사과. 도란이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올 거라고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도란이 역시 내가 사과할 거라고 생각 못 했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뭐가 미안해?”

“뭐가 미안해?”

누가 한평생 알고 지낸 소꿉친구 아니랄까 봐 동시에 똑같은 말을 하는 우리다. 이윽고 웃음이 터진 타이밍까지 똑같아서 어쩐지 아까까지 가득 쌓아뒀던 긴장이 허무하게 풀려버렸다.

“…이소 네가 먼저 말했으니까 먼저 얘기해. 뭐가 미안해?”

“아, 일단… 네 동의도 없이, 수간호사님께 멋대로 네 사적인 얘기 물어봐서 미안해.”

“역시 그럴 것 같더라니. 괜찮아. …쪽팔리긴 하지만.”

“…진짜 괜찮아?”

조심스레 도란이를 쳐다봤다. 도란이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웃음을 머금고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그 웃음에 ‘정말 괜찮구나.’ 하고 완전히 안도한 나다.

“그리고? 또 뭐가 미안한데?”

“소꿉친구라고, 언제나 같이 있었던 주제에 네 아픔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것도, 알려고 생각하지도 않은 것도 전부 미안해. …늘 옆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신경 써주지도 못하고. 말로만 위한 것 같아서 미안, 정말 미안해.”

“…응?”

내 말에 도란이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서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건가 싶어 다시금 말하려는데, 도중에 내 말을 가로막는 도란이다.

“이해했으니까 다시 말 안 해도 괜찮아. 너한테 이런 소리를 들을 거라곤 생각하지도 못해서.”

“왜. 내가 그렇게 무신경하게 굴었다고 해서…”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그런 너한테 얼마나 고마워했는데.”

“…고마워했다고?”

도란이의 말에 이번에는 내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도란이를 빤히 쳐다봤다.

나와 시선을 마주하며 머쓱하게 볼을 긁적이던 도란이는 이윽고 피식 웃어 보였다. 잠시 뜸을 들이던 도란이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엄마랑 화가 멀리 떠나고 나서, 그것만으로도 힘들긴 했는데, 또 견디기 어려웠던 건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진 거였어.”

“태도?”

“응. 나는 그저 슬플 뿐이었지, 불쌍한 애 취급은 받고 싶지 않았거든. 받을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런데 친구도, 친척도, 잘 모르는 사람까지도 모두 다 나를 동정하더라. 내가 뭔가를 하면, ‘쟤는 동생과 엄마를 한꺼번에 잃어버린 애니까 저러는 게 당연해.’라고 생각하고 다들 낙인을 찍는 것 같았어.”

도란이의 말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다. 학창시절, 두 사람을 잃어버린 도란이를 보고 주변에서 했던 얘기들이 떠오른다. ‘안됐다.’, ‘가엽다.’, ‘불쌍하다.’ 대부분은 이런 뉘앙스의 얘기들이었다.

그저 도란이가 안타까워서 하는 얘기들이라고 치부하고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었는데, 정작 당사자인 도란이는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다니. 내 무신경함에 화가 난다.

“내가 슬퍼하는 걸 위로해주는 건 괜찮았지만, 그 이상은 싫었어. 이를테면 사고가 일어나기 전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배려들을 해주는 거. …마음은 고맙지만, 기분은 썩 좋지 않더라.”

“….”

“그래서 일부러 더 밝게 굴고, 웃었어. 되도록 다른 사람의 시선 같은 건 신경 끄고 무시했지만, 그래도 계속 불쌍한 애로 남고 싶지 않았으니까. 남들한테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기 쉬운 축제 무대 같은 거에 매번 참여했었어. …괜찮으니까 제발 동정하지 말아 달라고. 내 나름의 시위였었지.”

도란이의 말에 울컥 눈물이 차오른다. 나는 왜 도란이랑 그렇게 오래 붙어있었으면서도 한 번도 이런 쪽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지? 왜 얘가 이랬던 걸까, 이해했던 적이 없지? 왜 죄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던 거냐고.

나한테 너무 화가 나.

내가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자, 도란이가 내 얼굴을 한 손으로 감싸고는 슬며시 들어 올렸다. 차마 도란이의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서 아래만 내려다봤다. 그러자 내 쪽으로 서서히 다가오더니, 내 눈물을 핥고서 생긋 웃는 도란이다.

…놀라서 눈물이 쏙 들어갔다. 아니, 설레서 들어간 건가.

“중학교 때랑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만 그랬던 거고. 나중에는 하다 보니까 은근히 재밌길래 계속 참여한 거야. 그러니까 그만 울어, 응?”

“…응.”

“내가 성준이를 너 다음으로 좋은 친구라고 여기는 것도 그것 때문이야. 내가 엄마랑 화를 떠나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걔 진짜 엄청 울었거든. 누가 내 슬픔을 같이 나눠주고, 위로해줬던 건 자주 있던 일이니까 그러려니 했는데, 걔는 그걸로 끝이었어.”

“끝이었다고?”

“응. 나를 동정한다거나, 그것 때문에 나를 배려한다거나 그런 게 전혀 없었어. 나를 전과 같이 대해줬지만, 대신 그 이야기로 내가 슬퍼할 때마다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매번 슬퍼해줬어. 지금도 변함없고.”

김성준이야, 나도 오래 봐서 잘 알지. 도란이 만큼이나 엉뚱하고, 때로는 눈치도 없고, 단순하긴 해도 의리 있고, 진중할 때는 진중할 줄 아는 녀석. 그리고 무엇보다 이 두 사람은 연인인 다혜나, 소꿉친구인 나보다도 서로를 잘 파악하고 있다.

…다시금 김성준이 남자라서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나다.

“그렇게 나를 동정하지 않고, 위로해줬던 사람은 성준이가 두 번째였어. 첫 번째는 이소 너고.”

“…나?”

“넌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적 있어?”

혹시나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찬찬히 생각해봤지만, 바보같이 슬픔을 참는 모습이 안쓰러웠지, 두 사람을 잃어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동정 같은 건 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나 역시 슬펐으니까.

두 사람을 잃어서. 그리고 그것 때문에 슬퍼하는 도란이를 보기 힘들어서.

“…없어.”

“응. 난 그게 너무 고마웠어. 다른 사람이랑 다르게 내 곁에서 가장 오래 있었던 너는 내 슬픔만 위로해줬을 뿐, 늘 똑같이 나를 대해줬으니까.”

“…란아.”

“오히려 네가 남들처럼 똑같이 나를 신경 써줬으면, …난 부담스럽고 소름 끼쳐서 견디지 못했을지도.”

“야!”

“아하하, 장난이야. 고마워, 이소야. 언제나 변함없이 나를 대해줘서.”

진심이 가득 담긴 감사에 어쩐지 쑥스러워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나를 보고 “어, 권이소 귀 빨개졌다.”라고 키득대며 놀리던 도란이는 이내 나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나 역시, 여전히 미안하고, 또 무신경한 나를 좋게 봐준 게 고마워서 도란이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도란이의 따뜻하고 포근한 품에, 둥지에서 쉬는 새처럼 편안하게 있던 나는 슬며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방금 도란이는 ‘변함없이 자신을 대해줘서 고맙다’라고 말했다.

저 말이 감사 인사 겸 쭉 친구로 남아달라는 밑밥이면 어떻게 하지.

처음에는 ‘에이, 설마.’라고 생각했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미안하다고 말한 것도 그렇고, 변함없이 대해줘서 고맙다는 말도 그렇고. 게다가 도란이는 자기 입으로 수간호사님께 연애 같은 건 못할 것 같다고 했었잖아.

도저히 나를 연인으로 생각하지 못할 것 같아서 미안하다는 거면 나 진짜 어떻게 해.

“나한테 미안하다는 거, 이제 다 말한 거야?”

“…어. 아마도.”

“아마도는 뭐야…. 그럼 생각나면 나중에 또 말해. 이제는 내가 미안하다고 한 이유를 말할 차례지?”

그렇게 말하며 도란이가 내게서 멀어진다. …어떻게 해. 나 진짜 어떻게 해! 차마 들을 용기가 안 나는데, 누가 투명인간이 돼서 내 귀 좀 막아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눈만 깜빡이면 시간이 후딱 지나간다든가.

하지만, 내 바람은 전혀 실현할 수 없기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으로 도란이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리는 나다.

============================ 작품 후기 ============================

이루네님// 마냥 밝은 멍뭉이 같아도 상처가 아주 깊은 도란이 8-8(그렁그렁)

빗자루계인님// 계인님 (왈칵) ㅜ_ㅜ..

류x님// 류님 8-8 도란이 속내를 원하시기에 까드렸지만, 독자님들이 오열하신다 ㅜ_ㅜ

화창한 주말 낮이에요, 여러분! XD

마냥 엉뚱하고, 해맑아 보이기만 하던 도란이도

나름의 아픔이 있답니다 ㅜ_ㅜ..

다음 연재는 언제가 좋으려나 ㅇ<-<...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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