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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73화 (73/97)

00073 66. 두려운 연애 =========================

새삼스럽게 내 의지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란이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멈추지 않을 것 같던 울음까지 참았으니까. …물론, 아주 간신히 진정만 한 상태지만.

대충 옷으로 얼굴을 닦은 나는 수간호사님께 다시금 물었다. 왜 도란이가 그런 말을 했는지.

“지나간 얘기니까 너무 새겨듣지는 마요. 몇 년 전에 우리 병원에 실습 왔던 학생이 란이한테 고백을 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나잇대도 비슷하고, 둘이 선남선녀길래 솔직히 내가 좀 밀어준 것도 있고….”

“아, …네.”

지나간 일이다. 지나간 일이다. 지나간 일이다. 머리로는 그렇게 되뇌면서 한 손으로는 캔을 찢어질 정도로 찌그러트린 나다. 그런 나를 보면서 수간호사님께서 흠칫하신다. …아뇨, 저 정말 괜찮습니다. 제가 도란이한테만큼은 이상하게 소유욕이 폭발해서 이래요.

“란이도 그 학생이랑 나쁘지 않게 지내길래 나는 당연히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곧바로 거절하더라고.”

“…혹시 그 학생분, 지금도 여기서 일하나요?”

“아니, 아니에요. 실습이 끝나고, 우리 병원에는 온 일이 없어요.”

아까 그 간호사는 용의자가 아닌가. …무슨 용의자 타령이니, 나. 지나간 일이다. 지나간 일이다. 심호흡. 릴랙스. 라마즈 호흡법을 하며, 심신을 달래는 나를 보고 머쓱하게 웃으시는 수간호사님이시다.

“…아무튼, 거절한 이유가 궁금해서 란이랑 둘이서만 얘기를 나눴던 적이 있었거든. 그때 란이가 그러더라고요. 자기는 결혼은 못 할 것 같다고.”

***

병원 옥상, 도란을 데리고 올라온 수간호사는 도란에게 왜 거절했는지 이유를 물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실습생은 수간호사가 봐도 참하고, 착한 아가씨였다.

분명 두 사람이 풋풋하고, 잘 어울리는 커플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간호사는 실습생이 도란에게 고백하는 걸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도란도 실습생과 꽤 친하게 지내길래 호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단칼에 거절하는 건 매우 뜻밖이었다.

수간호사의 물음에 도란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야…, 제 타입이 아니니까?”

“타입이 뭐가 중요해. 젊을 때는 싫지만 않으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보고 다니는 거지. 그래야 나중에 결혼할 때도 좀 더 나은 사람을 알아볼 안목이 생기는 거고.”

수간호사는 타인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도란이 늘 걱정됐었다. 여러 사람을 만나야, 안목도 생기고, 상처 때문에 쌓아왔던 경계심도 허물어질 텐데. 처음과 비교하면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낯선 사람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는 건 변하지를 않았다.

수간호사는 꼭 그 아가씨가 아니더라도 도란이 다른 누군가를 만나 다친 마음을 치유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이런 조언을 도란에게 건넨 것이었다.

하지만, 도란은 수간호사의 말에 쓰게 웃었다.

“저는 아마도 연애는 …쉽게 못 할 거예요. 결혼은 아예 못할 것 같고.”

“왜? …설마, 이성한테 호감을 느끼지 못한다거나, 뭐 그런….”

진지한 수간호사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는 도란이다. 배를 잡고 웃던 도란은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좋아했던 사람도 있었으니까… 그건 아니에요. 다만, 좀 두려워서요.”

“뭐가?”

“…제 성격상, 절대 가벼운 연애는 못 할 것 같거든요.”

“그럼 진지하게 연애를 하고 싶다고 상대에게 미리 말하면….”

수간호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란이 고개를 저었다. 슬퍼하는 도란의 표정에 그대로 말을 멈춘 수간호사다.

한참을 고개 숙인 채, 가만히 있던 도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언뜻 눈가가 촉촉해진 것도 같았다.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리던 도란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고서도 한동안 말이 없던 도란은 입술을 질끈 깨문 채, 말을 내뱉었다.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제가 두려운 건 …상대에게 집착할 것 같다는 거예요.”

“집착할 것 같다고?”

“…네. 누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진짜 헤어지는 거에 면역이 없잖아요. 친하지 않은 친구라든가, 몇 번 만나고 그만둘 사이라면 아무렇지도 않지만, 연인이란 건 그런 사이가 아니잖아요. 어쩌면 친구보다도 깊은 사이인데.”

수간호사가 잘못 본 게 아니었는지, 또다시 도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수간호사는 도란의 손을 꼭 잡았다. 조금 진정한 건지, 도란은 한숨을 내쉬고서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분명히 저는 누군가와 사랑하게 된다면, 헤어지기 싫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집착할 거예요. 이런 저를 이해하고 받아준다면 다행이지만, 상대가 그런 걸 원치 않는다면, 이런 저한테 지쳐버리면….”

“…란아. 연인 사이에 그 정도 집착은 당연한 거야. 상대가 싫다고 하는데도 계속해서 집착하는 게 문제인 거지. 네가 상대가 싫어하는 데도 계속 붙들고 있을 아이는 아니잖니.”

도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표정은 조금도 편해지지 않았다.

“제가 진짜로 두려운 건, 그다음이에요. 그렇게 집착까지 할 정도로 사랑한 상대를 떠나보내면, 나는… 견디지 못할 테니까.”

“란아.”

“…저는 제가 상처받을 게 두려워서 연애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예요. 평생.”

***

이제야 옥상에서 성준이가 했던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왜 도란이보고 겁쟁이라고 말했는지. 괜한 걱정이지만, 왜 미래에는 좋을 걱정이라고 말했는지도. …야, 김성준. 맞는 말이긴 한데, 진입장벽이 너무 높잖아.

어쩐지 무척 복잡한 기분이다. 당연한 소리지만, 도란이를 포기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다. 아프더라도, 어디가 모난 구석이 있더라도 그 상대가 도란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소꿉친구라서, 좋아하는 상대라서가 아니라, 도란이라면 평생을 함께 해도 좋다고 생각하니까. 아니, 평생을 함께하고 싶으니까.

내가 여러모로 심경이 복잡한 이유는, 이 겁 많은 멍멍이한테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 고민인 게 첫 번째, 그리고 소꿉친구라고 으스댔던 주제에 성준이보다 도란이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자조가 두 번째다.

왜 도란이가 성준이를 친구 중에서도 그렇게나 좋아하고 가까이 지내는지 알 것 같네. 자기를 그렇게 잘 알아주고, 이해해주는데 어느 누가 싫어하겠어. 마찬가지로 성준이도 그런 이유로 도란이를 제일 친한 친구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김성준이 진짜 김성순이었다면, 나 도란이 뺏겼을지도 모르겠는데.

김성순이 내 연적이라면, 그야말로 나는 상대도 안 됐을 것 같다. 이혁이와 마리안느를 뛰어넘는 연적이 생기지 않은 현실에 진심으로 안도했다. 김성준, 남자라서 고맙다! 다혜야, 김성준이랑 사귀어줘서 고맙다!

내가 양손까지 부여잡고 감사를 표할 때, 수간호사님께서 내가 걱정되셨는지 내 어깨를 두드리신다. …아, 괜찮습니다. 저 고작 그 정도로 안절부절못하는 두부 멘탈이 아니라서요.

“그래서 아가씨가 여자친구라고 말했을 때, 엄청 기뻤어요. 드디어 란이가 …두려움까지 이겨낼 정도로 사랑하는 상대를 만났구나 하고.”

“…아하하.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것 없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내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어, 이건 좀 안절부절못할 만큼 놀랍다. 멀뚱히 눈만 크게 뜨고서 수간호사님만 쳐다보던 나는 간신히 제정신을 차렸다.

수간호사님의 말을 바꿔서 해석하면, 도란이가 나를 두려움까지 이겨낼 정도로 사랑하는 상대로 여긴다는 건데. 사, 사랑. 도란이한테 직접 들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좋고, 입꼬리가 귀에 걸리고, 심장이 두근거리지.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닌데, 벌써 좋아하지 말라고, 권이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 일단은 침착하고 이유를 물어보자.

내가 조심스레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묻자, 수간호사님께서 나를 보며 인자하게 미소 지으신다.

“아가씨도 알겠지만, 란이는 약속한 건 반드시 지키고, 한 번 해내기로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해내는 성격이잖아요?”

“네.”

“바꿔서 생각하면, 자기 기준으로 불가능한 건,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거거든.”

수간호사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도란이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없는 일을 명확히 구분하는 성격이다. 약속 역시, 지키기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하면 시작부터 거절한다. 자신에게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거들떠보지도 않기도 하고.

그래서 운동도 이따금 성준이랑 하는 농구 빼고는 전혀 안 하지. …아니, 운동은 귀찮아서 안 하는 건가.

“하지만, 아가씨가 이성으로 봐 달라고 한 말에 란이가 순순히 오케이 했다면서요?”

“네. 그런데 그건…. 단순히 친한 소꿉친구니까, 아니면, 그냥 거절하면 미안하니까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해서.”

내 말에 수간호사님은 고개를 저으시며, 내 손을 꼭 잡으신다. 새삼 도란이가 왜 이 분을 ‘누님’이라고 부르며 따르는지 알 것 같다. 백의의 천사라고 부르는 간호사답게 인자하고, 따뜻한, 무척 좋으신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까도 말했잖아. 란이는 불가능한 약속을 승낙할 애가 아니에요. 분명 아가씨라면, 괜찮다고 생각했을 거야. …걔가 그렇지 않은 상대에게는 얼마나 칼같이 거절하는지 내가 똑똑히 봐서 잘 알거든.”

얼마나 매몰차게 찼으면, 수간호사님이 진저리를 치시냐, 란아. 기특해. 예뻐 죽겠어. 이따가 둘만 있을 때, 또 찐하게 뽀뽀해줘야지.

“고마워요, 아가씨. 란이가 두려움도 무릅쓰고 용기를 내게 해줘서. 분명 아가씨가 그만큼 멋진 여자라서 그런 거겠지?”

“아, 아니에요. 제가 뭘….”

“그러니까…, 아가씨라면 해낼 수 있을 거예요. 꼭 란이한테 소중한 사람이 돼서 그 아이 아픔을 옆에서 같이 치유해줘요, 알았죠?”

수간호사님의 진심 어린 걱정에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복 받았네. 우리 멍멍이. 이렇게 많은 좋은 사람들이 너를 걱정해주고 위해줘서. 그만큼 네가 좋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겠지. 그리고 난 그런 너에게 반드시 사랑받을 거야.

평생.

============================ 작품 후기 ============================

류x님// ㅋㅋㅋㅋㅋㅋㅋㅋ 류님 귀여우셔 ㅠㅠㅠㅠㅠ 생각보다 마음의 상처가 깊은 도란입니다...

soae님// 누누이 말하지만.... 난이도 최상입니다. 그럼에도 전혀 굴하지 않는 이소멘탈 (리스펙트)

제가 왔어요 `▽`! 약속대로 아침에 뿅하고 나타났어요!

지금 깨신 분들은 2편을 한꺼번에 보실 수 있겠네요! +_+

도란이는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지만,

그만큼 좋은 사람들을 많이 얻은 것 같아요.

다음 연재는.... 토요일? X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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