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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72화 (72/97)

00072 65. 마음의 상처  =========================

도란이에게 반강제로 끌려온 진료실에는 고등학교 때, 호랑이 학주 선생님이 저절로 떠오르게 하는 포스의 의사 선생님이 계셨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도란이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시더니 우리가 맞잡은 손을 빤히 내려다보셨다. 지긋한 시선에 괜한 오기가 생겨 도란이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짧은 웃음을 내뱉던 의사 선생님께서 이내 깊은 한숨을 쉬시며 도란이에게로 시선을 돌리셨다.

“한동안은 안 나타나길래 괜찮은 줄 알았더니.”

“…아하하,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리고 호랑이 학주 선생님께 혼날 때처럼 진땀을 흘리는 도란이다. 나를 보고 어색하게 웃던 도란이는 진료실 의자로 가서 앉았다. 저건 아무리 봐도 의사 선생님께 상담받는 게 아니라, 꾸중 들을 준비하는 것 같잖아.

아마도 도란이 진료 차트인 듯, 차트를 이리저리 살펴보시던 의사 선생님께서 입을 여셨다.

“상태는.”

“그냥…, 자꾸 피곤하고, 계속 자도 개운하지가 않고, 코피도….”

“손목.”

“아, …순간 긴장해서.”

도란이의 손목을 잡은 의사 선생님께서 잠깐 살펴보시더니 한숨을 쉬시며 내려놓으셨다.

“당분간 아대 착용해라.”

“…네.”

짧은 대화를 끝마친 두 사람은 진료실 옆에 있는 검사실로 이동했다. 무슨 검사인지는 몰라도 심각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도란이가 검사받는 동안, 믿지도 않는 신에게 간절히 빌었다.

검사를 끝마치고, 결과를 확인하는 의사 선생님의 표정이 좋지 않다. 안경까지 벗으시고서 앞머리를 쓸어 올리신다. 젠장. 역시 믿지 않는 사람이 빌면 효과가 꽝인 건가.

천장을 보고서 깊은 한숨을 토해내시던 의사 선생님께서 도란이를 매섭게 째려보신다.

“…도란, 너!”

“….”

의사 선생님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그저 목덜미만 긁적이는 도란이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도란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애써 미소 짓는 걸 보니 어쩐지 더 속상하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니, 이제는 내 시선도 피한다.

“대체 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안 나타난 거야. 수치가 전부 최악이잖아. 피로도도 높고, 스트레스 수치는 그야말로 최악이고. 선생님이 전에도 말했지. 너는 다른 사람들보다 스트레스에 취약하니까 조금만 이상하다 싶어도 바로 찾아오라고.”

“…죄송합니다.”

“다시 약 처방해줄 테니까 빠짐없이 복용하고. 술, 카페인 금지. 저녁 10시 전에 수면, 저녁 8시 이후에는 활동도 자제하고, 글도 쓰지 마.”

“네.”

내 생각보다 좋지 않은 검사 결과를 들으니 속상하고, 화도 나고, 미안하고.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이 얽히고 얽혀, 한숨으로 새어 나온다. 도란이 표정이 좋지 않아 내뱉다 말고 멈췄지만. 괜히 나까지 속상해하는 걸 들켰다간 저 바보가 또 신경 쓸 것 같았으니까.

의사 선생님께서 도란이를 살펴보시더니 아까보다는 온화해진 표정으로 입을 여셨다.

“상태가 그렇게 안 좋으니까 몸도 버티질 못하고, 평소 같으면 하지도 않을 자해까지 자제 못 할 정도로 정신력마저 바닥났잖아. …아버지 재혼 문제 때문에 그러냐?”

“…역시 선생님께서도 알고 계셨구나. 진짜 나만 몰랐네.”

도란이가 쓰게 웃는다. 저게 웃는 건지, 우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아픈 웃음이다. 그 웃음에 내 심장까지 고통스럽게 아려온다. 의사 선생님의 표정 역시, 좋지 않다.

“그래. 알고 있었어. 네 아버지한테 네 상태가 어떤지 잘 아니까, 무조건 네가 먼저 알기 전에 말하라고 얘기했었다.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알게 되는 것보다는 아버지한테 직접 듣는 게 나을 거라고. …그런데, 네 아버지가 말하기 전에 알게 됐다며.”

“네.”

“…속상하냐?”

도란이 눈에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였다. 나까지 덩달아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도란이는 눈치채지 못한 듯하다.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던 도란이는 의사 선생님께서 건네주시는 휴지로 얼굴을 닦았다.

“속상하긴 한데, 이해해야 할 문제니까.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자꾸 아버지만 보면…”

“참지 말고 화내. 이 문제는 네 아버지가 잘못한 게 맞아. 그 물러터진 새끼가 아들 주치의가 하는 충고를 개떡으로 알아들은 탓이니까. 네 아버지한테 가서 지금이라도 실컷 퍼부어.”

“하하. 한 번…, 퍼붓기는 했어요. 그런데도…”

“란아. 네가 성인군자도 아니고, 화나는 걸, 마냥 참기만 하는 것도 좋지 않아. 네가 분노를 자제 못 하는 애도 아니고. 오히려 너무해서 문제지. 이해라는 것도 일단은 아무런 악감정이 없어야, 편하게 할 수 있는 거다. 그러니까 맘껏 풀어. 이렇게 속앓이만 하지 말고.”

“네, 선생님. …그리고 고민이 하나 더 있는데요.”

도란이가 내 쪽을 힐끔 쳐다보더니 이윽고 의사 선생님을 빤히 바라본다. 도란이의 눈빛에서 뭔가를 캐치하신 건지, 이번에는 의사 선생님께서 나를 쳐다보신다.

“거기 아가씨?”

“네?”

“환자랑 단둘이서만 상담해야 하는 부분이라, 보호자는 잠시 나가줬으면 하는데.”

“…아, 네.”

도란이 상태가 어떤지 나도 알고 싶은데! 하지만, 의사 선생님의 무시무시한 포스에 눌려 쫓겨나듯 진료실에서 나온 나다. 내가 쪼는 상대는 흔치 않은데. 굉장한 내공이셔. 쫓겨난 건 무척이나 아쉽긴 하지만, 다른 게 궁금하기도 했으니 어떻게 보면 잘 된 건가.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한 나는 아까 전, 수간호사님께로 갔다.

수간호사님께서는 내가 올 거라는 걸 예상하셨는지, 나를 보고 인자하게 웃으시며 맞이해주셨다.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업무를 잠시 인계하신 수간호사님은 나를 데리고 병원 휴게실로 오셨다. 얘기를 듣기 위해 얌전히 테이블에 앉아있는데, 자판기로 가셔서 음료수를 두 개 뽑아 오셨다.

“…아, 오히려 제가 사드려야 하는데.”

“괜찮으니까 마셔요. 란이한테 소중한 아가씨니까 나도 뭔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 하도 오래 봐서 그런가, 란이가 이제는 내 친조카 같거든.”

하긴,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여기를 계속 다녔다면, …자그마치 13년. 1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여전히 아픔이 남아있던 거구나. 어쩐지 음료수가 넘어가지를 않는다. 나를 살펴보시던 수간호사님께서 미소 지으셨다.

“란이 여자친구랬죠? 란이가 잘 대해줘요? 걔가 워낙에 다정해서 잘 챙겨줄 것 같은데.”

“네. 어릴 때부터 잘 챙겨줘서 그런지, …차이가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고. 좋은 친구로 생각하는 건 확실한데, 연인은 …글쎄. 나랑 키스하는 건 싫지 않다고 말해주긴 했지만, 그게 과연 날 좋아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소중한 친구를 잃기 싫어서 마지못해 받아주는 걸까.

확신이 서지 않는 건 사실이다. 불안한 것도 사실이고.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생각은 없지만.

“어머, 어릴 때부터? 란이랑 어렸을 때부터 아는 사이였어요?”

“네. 소꿉친구거든요.”

“아, 아아! 그 태어날 때부터 알고 지냈다던! 그 옆집 산다는?”

“네. 맞아요. 아시네요?”

“호호, 란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거든. 실물을 보게 될 줄은 몰랐네. 그것도 여자친구라니. 세상에. 정말 운명이다.”

수간호사님의 말에도 마냥 기뻐할 수 없는 나다. 정말 서로의 마음이 이어진 연인이었다면, 기쁘게 반응했을 텐데. 따지고 보면, 지금의 우리 관계는 일방적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 음료수를 머금었는데도 입이 쓰다.

그냥 여자친구라고 끝까지 말할까 싶었지만, 왠지 속이는 느낌이 들어 수간호사님께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일단 내가 도란이를 좋아하는 것도 맞고 여자친구 행세를 하는 것도 맞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도란이의 마음을 모르겠다고.

내 말에 입을 다무시고 진지하게 생각에 잠기신 수간호사님이시다. 한참 동안 이어진 정적, 생각을 끝마치신 건지 수간호사님이 전처럼 인자한 웃음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란이가 PTSD 환자인 건 알고 있죠?”

“…PTSD.”

얼핏 들어본 적은 있는 병이다. 자기 상태를 말해주지 않는 도란이에게서 들어본 적은 없지만.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충격적인 사건으로 정신적인 트라우마가 생겨, 그것 때문에 지속적인 공포감을 느끼고, 벗어나기 위해 고통에 시달리게 되는 병.

나를 가만히 바라보시던 수간호사님께서는 얘기를 계속 이어 하셨다.

“아가씨도 알겠지만, 란이가 동생이랑 어머니를 그렇게 잃고 나서 강한 트라우마가 생겼어요. 그것 때문에 우리 병원에도 들렀던 거고.”

“…네, 알고 있어요.”

“동생은 사고 현장에서 그대로 하늘나라로 갔는데, 란이 어머니께서는 란이가 도착할 때까지 살아계셨었대.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아들이랑 딸을 자꾸 찾아서, 란이가 어머니 보겠다고 병실로 들어갔고.”

수간호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니 자꾸만 눈물이 흐른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상세히 들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머니가 의식도 없이 자기 이름만 부르는 걸 듣고, 이윽고 어머니가 고통스럽게 죽는 모습까지 도란이가 지켜봤을 줄은 정말 몰랐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슬펐을까.

한순간에 자기가 알던 어머니의 모습이 그렇게 고통스럽게 변해버렸는데. 자식을 먼저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려, 무의식 상태에서도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어머니를 보고, 도란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게 란이한테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서, 지금까지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이를테면, 다른 사람한테 무관심하다거나,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다거나.”

“그게 전부 트라우마 때문에… 그랬던 거예요? 원래 성격이 아니라?”

“지금이야 많이 좋아졌지만, 처음에 란이가 왔을 때는 그걸로 너무 고통스러워했어요. 사람 사귀는 게 무섭다고, 또다시 소중한 사람을 잃을까 봐 두려워서, 더는 그런 사람을 만들지 못하겠다고. 나한테도 엄청 쌀쌀맞게 굴었었지.”

수간호사님은 장난스럽게 말씀하셨지만, 나는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제대로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으니까.

나는 대체 …란이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있던 거지? 아니, 알려고 노력한 적이 있긴 했었나?

사고 전까지만 해도 모든 아이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인기도 많았던 애가 한순간에 다른 사람에게 등을 돌렸는데, 나는 왜 그걸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지? 아픈 애를 말로만 위하고, 다독인 것 같아 죄책감이 울컥 터져 나왔다.

내가 소리 내어 울자, 수간호사님께서 당황하셨는지 나를 부둥켜안고 달래셨다.

“그래서인가, 몇 년 전에 란이한테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자기는 결혼 못할 것 같다고.”

“…왜요?”

“얘기를 듣고 싶으면, 일단 뚝 그쳐요, 아가씨. 자기 소중한 사람 울렸다고 란이가 나한테 화낼라.”

수간호사님의 말에 필사적으로 울음을 삼키는 나다.

============================ 작품 후기 ============================

샤냥꾼님// 어려운 남자, 난이도 최상 도란입니다.. 앗, 제 걱정해주시는거예요? /ㅅ/(감동)

빗자루계인님// 끊지마세요! 저랑 평생 함께하셔야죠! (박력)

류x님// 헉, 안 돼요! 보.....지마시지는 마시고 (갈등) 시험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ㅅ;

제가 왔어요 XD 새벽에 왔어요 XD

우중충한 내용을 들고 왔습니다 ㅇ<-<...

독자님들이 궁금해하실까 봐,

아침에도 올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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