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9 62. 너랑 키스하는 건 =========================
물기 뚝뚝 떨어지는 머리로 나타나는 건 여전하구나. 적어도 수건으로 머리는 털고 와야 할 것 아냐. 한숨을 쉬면서 드라이기를 가져오라고 했더니 순순히 가져와서 침대 가장자리에 앉는 도란이다.
얘 머리 말려주는 거에 적응해가는 나도 참….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그래도 에어컨 바람에 감기라도 걸릴까 봐 정성스레 말려주고 있다. 내 손이 목덜미에 스칠 때마다 간지러운지 까르르 웃는다. 어이구, 귀여우니까 봐줬다.
“이소야.”
“왜.”
“이소야, 이소야.”
애교를 듬뿍 담아서 내 이름을 부르는 도란이다. 안 그래도 너 귀여운 거 충분히 잘 알고 있으니까 그만해. 심장에 해롭다고. 이걸로도 모자란 건지 몸을 슬며시 뒤로 젖히더니 나한테 비비적거린다.
간지러워! 차가워!
결국, 기습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버린 나다. 내가 버티지 못하고 스르르 누운 탓에 도란이까지 덩달아 내 위에 누워버렸다. 자기도 이런 상황이 웃긴지 도란이가 소리 내어 웃는다.
“아하하. 오랜만.”
“…응, 오랜만.”
그러고 보니 이런 평화로운 인사가 얼마 만이지. 어제까지만 해도 이런 인사는 할 겨를이 없었는데. 나한테 박원호한테 시달리고 있다는 얘기를 하지 않은 건, 솔직히 아직도 화나긴 하지만, 그래도 고마워. 한 달 동안 나 지킨다고 고생 많았어.
내 위에 누운 도란이를 꼭 끌어안았다. 도란이가 일어나려고 하길래 더욱 힘을 줘서 끌어안았다. 난 너랑 이렇게 달라붙어 있는 게 좋단 말이야.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내가 여전히 팔을 풀어줄 기미가 없자, 빠져나오기를 포기한 건지 가만히 있는 도란이다.
“안 불편해? 안 힘들어?”
“안 불편하고, 안 힘들어.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싫어, 싫어.”
내가 방심해서 힘을 푼 틈에 도란이가 재빨리 일어났다. 쳇.
근데 일어나다 말고 몸을 돌리더니 도로 내 위에 눕는다. 그 덕에 도란이가 나를 덮친 것 같은 자세가 되어버렸다. 살짝만 움직여도 입술이 닿을 것 같은 거리. 이걸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생긋 웃더니 다시 내 목에 파고들어 비비적대기 시작하는 도란이다.
얘가 왜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애교가 폭발하는 거지. …아, 아아. 알겠다.
“알았다. …너 나한테 혼날까 봐 미리 방어막 치는 거지.”
“아하하, 들켰다. 티나?”
“엄청.”
하여튼 이 인간, 은근히 약았다니까. 계획을 뻔히 알면서도 혼낼 의지가 바닥나버린다. 눈꼬리가 축 처진 채로 배시시 웃는데, 그 웃음에 그야말로 완벽히 무장해제가 되어버렸다. 아, 몰라.
동시에 이성의 끈도 놓아버린 나는 도란이에게 연신 뽀뽀를 퍼부었다.
화가 풀린 건 풀린 거고, 할 말은 해야지. 침대에서 일어나 도란이 보고 옆에 앉으라고 했다. 은근슬쩍 애교로 넘어가려고 했던 계획이 수포가 되어서인지, 도란이 입술이 뾰로통하니 나와 있다.
야, 불만 가득한 입술 집어넣어. 또 한바탕 뽀뽀해버리기 전에.
“도란.”
“네.”
“너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내 말에 헤헤거리며 나를 끌어안으려고 하는 도란이다. 어쭈, 또 무마하려고 하시겠다? 안 통한다, 이 인간아. 내 쪽으로 다가오는 도란이의 양 볼을 꼬집어서 쭉 늘렸다.
…아, 안기고 나서 꼬집을 걸 그랬나. 살짝 후회가 밀려온다.
“아파. 잘못했어요, 놔 주세요.”
“…이런 일이 또 생기면 안 되겠지만, 다음에도 숨기면 너 진짜 죽는다. 앞으로는 무슨 일 있으면 무조건 나한테 말해. 알았지.”
“네.”
“옳지, 그럼 이건 패스.”
도란이 입에 쪽 소리 나게 뽀뽀하고는 양 볼을 꼬집고 있던 걸 놓았다.
볼을 매만지면서 툴툴대길래, 살짝 미안해져서 이번에는 볼에다가 뽀뽀했다. 내 뽀뽀를 받고도 뭐가 그리 심통이 났는지, 또다시 도란이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다. 아무래도 생존형 애교가 두 번이나 먹히지 않자, 조금 토라진 것 같다.
피식 웃으며 툭 튀어나온 입술을 살짝 때렸다. 입술 넣어, 입술. 키스해달라고 유혹하는 것도 아니고.
박원호 일은 얼추 마무리된 사안이라 그냥 넘어간다 치지만, 현재 진행형인 건 깔끔하게 정리하고 진행을 해야지. 또 이 주제로 이야기하려니까 한숨이 나온다. 이 인간 짝사랑하다가 한숨 쉰 거 다 합치면, 거대 싱크홀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내 한숨에 내가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직감한 듯, 도란이 어깨가 움찔한다. 이런 건 이렇게 눈치가 빠른 인간이 내가 자길 좋아하는 건 그렇게 눈치를 못 채냐!
어쩐지 또 울컥해서 도란이를 매섭게 째려봤다.
“야. …너 진짜 몰랐어?”
“…네.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걸 왜 몰라! 왜!”
도란이의 양쪽 어깨를 붙잡고 칵테일 쉐이킹하듯 인정사정없이 흔들었다. 도란이가 괴로운 소리를 내뱉는 것도 잠시, 도란이 코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한다. 아이고야. 한동안은 도란이 등짝에 파손주의 스티커를 붙여놔야겠다.
세 사람한테 말을 듣긴 했는데, 코피가 이렇게 쉽게 터질 줄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 코피를 보니 속상해 죽겠다. 그걸 익숙하다는 듯 덤덤하게 보고 있는 도란이를 보니 더 속상하다.
아무래도 내일은 월차 내야겠다. …그리고 엄마한테 실컷 얻어맞은 다음, 도란이 끌고 병원 가야지.
갑작스럽게 터진 코피 때문에 10분 정도 휴전에 들어갔다.
세수하다가 또 코피가 터질까 봐, 수건에 물을 묻혀서 피가 묻은 곳을 정성스레 닦아줬다. 내가 닦아주는 대로 얌전히 있더니, 나랑 가까이서 눈이 마주치자 도란이가 생긋 눈웃음을 친다.
야, 진짜 덮치고 싶으니까 하지 말라고. 아니, 그렇다고 아예 하지 말라는 건 아니고. 으아, 괴롭다. 신이시여, 부디 제게 강철 같은 심장과 성녀와도 같은 인내심과 정신력을 선사해주십시오.
행여나 또 뽀뽀하다 코를 잘못 건드려 코피가 나오기라도 할까 봐 꾹 참는 나다. 장담하는데, 나 진짜 죽고 나면 몸에서 사리가 엄청 발견될 거야.
눈치 못 챘다는 말에 처음에는 그냥 넘어갈까 갈등했지만, 그래도 너무 억울해서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에 도란이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대체 내가 자기 꼬시려고 노력한 모든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반드시 알아야겠다.
“내가 요 몇 달 동안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잖아! 그런데 왜 몰라!”
“…뭐가 달라졌는데?”
“….”
진짜로 모르겠다는 얼굴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내가 그렇게 티를 안 냈나? 아닌데? 나 엄청 티 많이, 그것도 아주 팍팍 냈는데? 너무나도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잠시 자아 성찰에 들어갔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난 아주 제대로 티 냈거든? 자아 성찰을 하면서 떠올렸던 걸 조목조목 도란이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일단! 내가 너한테 연락 엄청 자주, 그리고 오래 했잖아!”
“…아, 그거 그냥 한가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
야! 내가 한가하다고 전화를 한 시간 넘게 붙들고 있을 인간이 아니잖아! 시작부터 답답해서 가슴을 퍽퍽 치니 도란이가 나를 걱정스레 바라본다. …그래, 됐어. 다음.
“그리고! 내가 너한테 안 하던 스킨십도 계속했잖아.”
“어, …그런가?”
반응을 보니 전혀 신경을 안 쓰고 있었거나, 잠깐 의식하다가 이내 곱게 접어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렸구먼. 겨우 두 개 확인했는데도 멘탈이 탈탈 털려서 상대할 의지가 바닥나버린다.
아냐, 그래도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어느 정도 그럴듯하게 생각했겠지. 내가 숙제까지 내줬는데!
“그럼! 내가 고소공포증도 무릅쓰고, 너랑 같이 남산에 갔던 건? 숙제까지 내줬으니까 오랫동안 생각했을 거 아냐!”
“응. 최근에는 경황이 없어서 전혀 안 하긴 했지만…, 마지막으로 생각했던 건 테디베어 갤러리에 숨겨진 비밀의 단서를 아무도 모르게 찾기 위해, 나를 옆에 감시역으로 세워두고 자연스럽게 침입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게 더 어렵겠다. 이 인간아! 누가 괴기소설 작가 아니랄까 봐, 일반인들은 감히 생각도 못 할 방향으로 빠지냐! 상식적으로 ‘혹시 얘가 나를 좋아하나?’라고 생각하는 게 더 쉽겠냐, 한편의 미스터리 추리 소설을 구상하는 게 더 쉽겠냐!
또 코피가 터질까 봐 차마 건들지도 못하고, 주먹만 부들부들 떠는 나다.
“…술 취해서 이성이 끊어지는 바람에 저지른 거긴 하지만, 내가 너한테 키스도 했었잖아.”
“그거 그냥 술주정인 줄 알았는데.”
“야! 내가 저지른 거라… 뭐라 말은 못 하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찐하게 했는데! 그런 게 술주정일 리가 없잖아!”
“너 전에! 아, 아니, 잘못했습니다.”
억울하다는 듯 뭔가 말하려다 먼저 사과하는 도란이다.
상상 이상으로 눈치가 없는 도란이를 보니 10년은 폭삭 늙은 것 같다. 내가 진짜 어쩌다 이런 걸 좋아해서. 그래도 힐끔거리며 내 눈치를 보는 게 마냥 사랑스러워서 봐줬다. 둔탱아.
도란이를 그대로 품에 안은 나는 도란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쨌든, 그렇게 눈치를 못 채고 있었으니 내가 이성으로서 어떤지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겠다. 그렇지.”
“…미안.”
그래, 넌 좀 미안해할 필요가 있어. 눈치가 없어도 정도껏 없어야지. 이렇게 눈치가 더럽게 없는데도 마냥 사랑스러워서 봐줬지. 그것도 아니었으면 넌 나한테 오늘 실컷 야단맞았어.
“성준이한테 얘기 들었어. 일이 해결될 때까지 남자친구 행세하기로 한 거. 실컷 해. 그 대신 나도 너 꼬시려고 실컷 들이댈 테니까. 그러니까 이번에는 친구 말고, 여자로서 날 봐줘. 알았지?”
“…응.”
“그리고 일이 무사히 마무리되면, 너한테 고백할 거야. 진짜 내 연인이 되어달라고.”
“만약에… 내가 거절하면 어쩔 거야?”
이 인간이 거절할 생각부터 하고 있냐! 순간 울컥했지만, 도란이 표정이 좋지 않아서 화를 내려다 말았다. 김성준, 네가 어떤 의미로 말한 건지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품 안에 있는 겁쟁이 멍멍이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면, 실컷 분풀이한 다음에… 더 적극적으로 들이댈 거야. 받아줄 때까지.”
“…계속?”
“응, 계속. 영원히.”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도란이가 내 허리를 꼭 끌어안는다. 그러더니 푸흐흐 김빠진 웃음을 터트린다. 웃음소리까지도 귀엽고 난리야. 도란이 머리를 헝클어트리듯 쓰다듬었다.
“안 맞아 죽으려면, 최선을 다해 받아들여야겠네.”
“그렇게 강제적으로 좋아하는 건 내 쪽에서 사양이거든요.”
“…음, 그러면 이런 건 어때?”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도란이가 빼꼼 고개를 내민다. 나 역시,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서로의 시선이 올곧게 마주했다. 도란이의 기습 행동에 나는 눈만 깜빡이며 도란이만 쳐다봤다.
그런 나를 보고 배시시 웃더니 한 자 한 자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는 도란이다.
“너랑 키스하는 건 …싫지 않아.”
그리고 도란이의 말에 나는 눈을 깜빡이는 법도 순간적으로 잊어버렸다. 세차게 뛰는 심장만이, 시간이 멈추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도란이가 내 허리를 더욱 세게 감싸더니 서서히 다가온다.
“이건 몇 점이야?”
“…50점.”
“하하, 역시 어렵다.”
그야, 내가 가장 바라는 건 너랑 내가 같은 마음이 되는 거니까. 바보야. 그래도… 방금 그 말, 싫지 않았어. 아니, 너무 좋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덮치듯 적극적으로 도란이에게 키스했다.
다소 거친 키스인데도, 순순히 내 키스를 받아들이는 도란이다. 그게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한참을, 한참을 키스했다.
…너 방금 그 발언한 거 후회할 정도로, 앞으로 입술 닳을까 봐 걱정할 만큼 키스할 거니까 각오해.
============================ 작품 후기 ============================
빗자루계인님// 저도 사랑해여 /ㅅ/♡♡ ㅋㅋㅋㅋㅋㅋ 엉뚱한 게 도란이 매력이니까욧
soae님// 그러게요 ㅜ_ㅜ 이렇게 평화로운 분위기가 얼마만인지. 이런 게 <원래 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이죠! 그렇죠?(아닌가)
류x님// ㅋㅋㅋㅋㅋㅋㅋ 꿈마저도 4차원적인 것만 꾸는 진성 4차원, 도란입니다 ㅋㅋㅋ
연참, 일요일 연참이 왔어요오 /ㅅ/
여러모로 흡족하신가요 독자님들 ^p^?
오늘도 역시 이소를 들었다 놨다하는 도란입니다.
도란이는 눈치까지 장착했다면, 아마도 희대의(...)
다음 연재는... 언제가 좋을까요. 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