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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67화 (67/97)
  • 00067 60. 겁쟁이형 철벽남 =========================

    성준이와 도란이가 옥상에서 회의한 내용은 성준이가 나만 따로 불러서 얘기했다. …옥상에서. 물론, 지금 란이 집에 지연 씨도 있고, 이혁이도 있어서 이런 얘기하기 뭣한 건 아는데, 왜 하필이면 옥상이냐고.

    덕분에 여러 가지 의미로 온몸이 덜덜 떨린다.

    그래도 도란이랑 관한 이야기라기에 큰맘 먹고 옥상까지 온 나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너무 기특하다. 도란, 내가 요새 너 하나 때문에 고소공포증을 몇 번이나 이겨낸 줄 아냐?!

    …알 리가 없지. 누가 업어가는 줄도 모르고 자고 있는데.

    그나저나 올라오긴 했는데, 무서워서 주변을 못 둘러보겠다. 누군가가 우리 둘을 보면, 내가 성준이한테 얼차려 받고 있는 줄 알겠다. 옥상에 올 때부터 고개를 푹 숙이고 죄인처럼 있으니.

    “그래서… 그 눈치 없는 놈은 불과 몇 시간 전에야 내가 자기를 좋아하고 있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도 성준이 네가 말해줘서?”

    “엉.”

    하도 어이가 없어서 껄껄거리는 웃음만 연거푸 나온다.

    그 자식, 진짜 눈치를 어디다 갖다 팔아먹었냐?! 정상적인 사고방식이랑 세트로 팔아버렸냐고! 내가 자기 꼬시겠다고 안 하던 짓까지 하면서, 그야말로 개고생을 했는데!

    아, 혈압 올라. 아, 뒷목 당겨. 내가 목덜미를 붙잡으며 주저앉자 성준이가 놀라서 다가온다.

    “…하아. 내가 어쩌다 그런 인간을 좋아해서.”

    “이제 란이 싫어졌냐?”

    “그럴 리가! 절대 안 싫어! 완전 좋거든!”

    “…아니, 좋다는 말을 누구 한 대 팰 기세로 말하고 그러냐.”

    그야, 좋은 거랑 순간적으로 혈압 오르는 건 별개니까. 그래도 어떻게 보면 조력자인 성준이한테 화풀이할 수는 없지. 한숨을 푹 쉬고선 빡침을 털어내려고 머리를 헤집었다. 내가 진짜 도란 너 때문에 늙는다, 늙어.

    “…어쨌든 성준이 네 말은 바꿔 말하면, ‘란이는 나를 이성의 범주로도 놓고 있지 않던 상태다.’ 이말 아냐.”

    “뭐, 일단은 그렇지.”

    뭘까. 이 급격하게 밀려오는 자괴감과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쫙 나는 듯한 기분은. 하긴, 누가 누굴 탓하겠냐. 나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란이를 이성 취급도 안 하고 있었는데. 그렇지만 세상 모든 일에 가능성을 열어두고 살아야 할 거 아냐! 세상만사 0%가 어디 있어!

    “이소 너한테는 사실대로 말해둬야 할 것 같아서. 란이 말대로 네 의사도 중요한 거니까. 일단 우리 멋대로 저지른 거긴 하지만, 어쩔래? 우리 계획대로 할래?”

    “나야, 당연히 오케이지. 사실, 반쯤은 예상하기도 했고.”

    “…되게 순순히 오케이하네. 더 성질낼 줄 알았는데.”

    “물론, 한숨이 나오긴 하지만, 일단은 전과 다르게 란이가 내 마음을 확실히 알게 된 상태라는 거잖아. 그러면 란이 성격상, 딴 년한테 눈 돌리지도 않을 거고, 나를 다른 시선으로 봐 줄 수도 있을 테니까. …전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들이 대주겠어. 나한테서 못 빠져나가도록.”

    “이야, 권이소. 역시 상남자의 향기가 폭발하는 여장부!”

    성준이의 칭찬에 씩 웃어 보였다. 거기다 아까 제대로 깨달았거든. 난 도란이한테서 절대 못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도란이의 모든 것들이 내게는 하나같이 황홀한 중독만 선사한다. 따뜻한 체온도, 다정한 말투도, 부드러운 입술도.

    잠깐만 느끼는데도 계속 느끼고 싶을 만큼, 오로지 나만 느끼고 싶다는 소유욕이 피어오를 만큼 행복한 황홀경을 보여줘서, 도리어 포기할 의지가 바닥나버렸다. 그 대신, 어이없게도 한 달 내내 꾸준히 깎아 먹었던 용기가 단숨에 가득 충전됐다.

    절대 아무한테도 안 넘겨줄 거야. 절대로.

    “그나저나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였는데, 대체 둘이 무슨 내기를 한 거야?”

    “싸나이들끼리의 비밀이쥐.”

    와, 진짜 한 대 치고 싶다. 비밀로 하는 건 그렇다 치고, 표정부터가 엄청 느끼하고, 얄미워. 내가 주먹을 불끈 쥐자, 성준이가 재빠르게 겸손한 표정으로 바꾼다.

    “내 입으론 절대 말 못 해. 만일 이소 네 말대로 된다면, 그때 란이한테 물어봐.”

    “만일이 아니라, 반드시거든? 내가 꼭 그렇게 만들 거니까.”

    “캬, 듬직하다. 권이소.”

    성준이가 나를 보고 씩 웃는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인 것 같다. 성준이의 눈빛에서 느껴진다. 마치 란이와의 사이를 인정받은 듯한 느낌. 그래서일까, 성준이의 칭찬이 조금 쑥스럽다.

    나한테 할 말이 끝났는지, 성준이가 옥상 문을 열었다. 드디어 탈출이구나. 사실 아까 성준이 얼굴을 마주 보다가, 무심코 주변 경치를 쳐다본 덕에 손에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성준이는 옥상 문을 반쯤 열다 말고, 내게 할 말이 더 남은 것인지 내 쪽을 쳐다본다.

    “란이, 걔가 엄청 겁쟁이거든.”

    “알지, 귀신 무서워하고, 어두운 거 무서워하고, 갑자기 놀라게 하는 거 질색하고. 그래서 귀신의 집이나 공포영화 같은 거만 보면 울먹거리잖아.”

    그리고 또 그게 엄청 귀엽지. 안쓰러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짓궂은 가학심이 몽글몽글 피어올라서, 란이가 그럴 때마다 자꾸만 더 놀리고 싶어진다. 상황이 좀 안정되면, 이번에는 진짜로 란이랑 같이 공포영화나 보러 가볼까.

    “그거 말고. 걔가 좀… 내가 보기에는 전혀 할 필요가 없는 괜한 걱정을 좀 해.”

    “어떤?”

    “지금의 너한테는 딱히 좋지 않은 걱정이지? …뭐, 미래에는 좋으려나.”

    무슨 소리야. 수수께끼냐? 네가 무슨 스핑크스냐고. 두루뭉술하게 말하지 말란 말이야. 뭐라고 따질까 했지만, 자세하게 말해줄 것 같지는 않아 보여서 그냥 체념했다. 성준이 입이 얼마나 무거운지는, 10년 넘게 겪어 와서 아주 잘 아니까.

    “어쨌든 내가 해주고 싶은 어드바이스는, 그 자식이 겁내고 있는 걸, 그럴 필요 없다고 알려주란 거야. 아니면, 그런 건 안중에도 없을 정도로 너한테 빠지게 만들던가.”

    “…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참고하마.”

    “하하, 오케오케.”

    성준이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도란이네 현관문 앞까지 왔다. 그러고 보니 이 자식한테 아직 이 말을 안 했네. 이때 아니면 언제 할까 싶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야, 김성준.”

    “엉? 왜.”

    “고마워.”

    “…너 뭐 잘못 먹었냐?”

    이 자식이! 남은 진심을 가득 담아서 말했더니만! 얄미워서 등을 아프지 않게 두들겨 패니까 장난이라며 킬킬 웃는다.

    “말로만 말고, 나중에 또란이랑 잘 되면, 축의금 빵빵하게 부탁합니다.”

    “잘 되기만 하면, …너희 신혼집 냉장고 내가 해준다. 얼음 나오는 양문형으로.”

    “앗싸! 역시 이소 느님! 다요미! 오빠가 냉장고 벌었다!”

    성준이가 복도에서 빽 소리를 지르자, 이혁이가 잔뜩 경계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응, 아니야. 아무것도. 그냥 중요한 미래와 관련된 얘기 중이었단다.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혁이가 도란이 자니까 조용히 해달란다.

    …네, 떠들어서 죄송합니다.

    도란이의 방으로 가니 도란이가 침대에 누워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워낙에 잠버릇 없이 얌전히 자는 애라 죽은 건 아닐까 내심 불안하다. 아까 차에서 집까지 옮겼을 때도 미동도 안 했단 말이야.

    조심스레 코끝으로 손가락을 갖다 대니 새근거리는 숨결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온다.

    …다행이다. 살아있네. 그제야 안도한 나는 생긋 웃으며 도란이의 볼을 쓰다듬었다. 자는 모습도 어쩜 이리 귀여운지. 누가 지금 나를 보면 눈에서 하트가 뿅뿅 나온다고 생각하겠다.

    내 예상은 정확했는지, 도란이 잠옷을 챙겨서 이쪽으로 온 성준이 표정이 아주 썩어있다.

    “뭐, 왜.”

    “아, 아뇨. 일단 애 옷은 갈아입혀야 하니까 잠시만 밖에 나가 계셔주시면….”

    성준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거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을 빠져나가기 전에 힐끔 뒤를 돌아봤다. …란이 속살이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둘이 어쩌고 있나 궁금해서.

    아니, 물론, 완전히 그런 의도가 없다고는 솔직히 말 못 하겠지만.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면서도 정성스레 상의를 입혀주고 있는 성준이다. 저럴 때 보면, 친구가 아니라 도란이 보호자 같다니까. 어쩐지 피식 웃음이 나온다.

    도란이 옷을 다 갈아입힌 건지, 성준이가 방에서 나왔다. 도란이의 말대로 보복범죄의 우려가 있기에 우리는 나름의 대책 회의에 들어갔다.

    일단은 우리 부모님께 알려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빠한테 알리면, 아빠가 근무했던 경호 업체에 부탁해주실 테니까. 부모님께 당할 후환이 두렵긴 하지만, 이제는 나만의 일이 아니니까.

    도란이를 위해서, 나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도란이를 지킬 거다.

    “그럼, 부모님한테는 언제 말할 거야?”

    “전화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아서 란이가 깨어나는 대로 바로 찾아가려고.”

    “누나, …종종 성묘 드리러 갈게.”

    “아예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라! 이 새끼야!”

    아주 오랜만에 사랑스러운 동생에게 사랑이 가득 담긴 헤드록을 걸었다. 이혁이가 괴롭다는 듯 팔다리를 퍼덕거리며 다급하게 항복 선언을 했다. 그러자 우리를 지켜보던 지연 씨가 재미있다는 듯 입을 가리고 키득 웃는다.

    아, 이거 좀 뻘쭘하네. 어쩐지 일반인 코스프레가 해제된 느낌이다.

    “그럼 이소야, 또란 깨어날 때까지 여기 있을 생각이냐?”

    “응. 란이, 누가 옆에 없으면 불안해서 금방 깬다며. 그리고 나도 걱정되니까 자는 동안 지켜보려고.”

    “하긴, 여기 방범 철저하게 해놔서 안전하긴 할 거야. 아닌가. 보안 업체 직원들 오기 전까지 네가 침입자들 반 죽여 놓…”

    “뭐? 다시 말해봐.”

    “아, 아닙니다.”

    물론, 란이한테 조금이라도 해코지할 놈들이 침입하면, 사지 멀쩡하게 보내주지는 않을 생각이지만,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지연 씨가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냐고. 나도 사회적으로 쌓아놓은 이미지라는 게 있거든?

    내가 성준이를 매섭게 째려보고 있을 때, 갑자기 이혁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도! 나도 여기 있을래.”

    “…방해되니까 꺼져.”

    “뭐? 아 왜! 나도 형 지킬 거야!”

    “응, 필요 없어.”

    내가 단칼에 거절하자, 떼를 쓰기 시작하는 이혁이다. 키도 쪼그만 게 저러니까 진짜 철부지 초딩 조카가 떼쓰는 거 같다. 그런 이혁이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지연 씨다.

    지연 씨는 한숨을 쉬면서 우리 남매를 번갈아 보더니 이혁이를 일으켰다.

    “매니저, 일어나. 나 집에 데려다줘.”

    “내가 왜?”

    “아, 빨리! 우리 집 앞에 고기 사줄게.”

    “…고기? …시, 싫어! 형이랑 있을 거야!”

    저 식충이가 웬일이래. 그 좋아하는 고기도 마다하고. 그래도 고기보단 도란이가 소중하긴 한가 보다. 어쩐지 복잡한 기분이라 한숨이 나온다. 이 상황을 빤히 지켜보던 성준이도 지연 씨에게 동참해 이혁이를 잡아끌기 시작했다.

    “야, 고기 좋다. 고기. 나도 고기 당기는데. 우리 찰거머리 떼어낸 기념으로 회식이나 하러 갈까요? 우리 다요미도 부를까.”

    “네네, 저희 집 근처에 맛있게 하는 집 있어요!”

    “싫다고! 나 형이랑 있을 거라고!”

    성준이에게 거의 들리다시피 해서 집을 나가는 이혁이다. 이혁이를 들쳐메고 나가는 두 사람의 등에서 천사의 날개가 보이는 것 같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두 사람한테 제대로 한 턱 쏴야겠다.

    …불쌍한 내 동생 이혁이한테도.

    미안하다. 한 달 동안 누나랑 도란이를 위해 고생해줘서 고맙긴 한데 이거랑 그건 별개란다. 오랜만에 란이랑 단둘이 있고 싶거든. 더는 복도에서 세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두 사람에게 메신저로 감사의 메시지를 전달하고는 도란이 방으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빗자루계인님// 헉, /ㅅ/ 옆집남자 코멘트에서 봤어요! 엄청 반가웠습니다 (부끄)

    이루네님// 신께서는 란이에게 귀여움을 주고, 눈치를 가져가셨....(애도)

    月光天女璉님// 재밌다고 해주셔서 감사해요 /ㅅ/ 전 독자님이 제 글을 재밌게 봐 주시는 게 제일 좋아요!

    류x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란이는 귀여움이 매력이죠!

    soae님// ㅋㅋㅋㅋㅋㅋ 역대급 눈치제로 4차원 남주입니다 XD

    Sirouki님//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어제 실수로 <옆집남자> 연재분을 5-10분 정도 잘못 올리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여기서 <옆집남자> 연재분을 보시고 고개를 갸웃하셨을.... 11분께 죄송합니다 (- -)(_ _)

    아이고 이혁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끼리끼리 논다더니 도란이 주변 사람들은 왜 한결 같이 눈치가 없는 걸까요(...)

    그나마 둔탱이 같은 성준이라도 이쪽으로는 눈치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XD

    다음 연재는 언제가 좋을까요. 일요일? 월요일?

    토요일 연참하고 싶지만 아는형님 보러갈 ㄱ....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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