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0 57. 내가 책임지겠다고 =========================
도란이가 시킨 대로 망원경으로 오피스텔 아래를 샅샅이 살피는 성준이다. 황당하면서도 동시에 무슨 상황인지 궁금해서 베란다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같이 아래를 살피고 싶지만, …망할 고소공포증 때문에 용기가 나질 않네요.
흡사 첩보 요원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살피던 성준이의 입이 쩍 벌려졌다. 왜? 뭐?
“와, 미친. 진짜 왔어.”
“어? 뭐가?”
“또란! 비상! 레이드 몹 출몰! 사거리 횡단보도 대기 중!”
성준이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욕실에다 대고 냅다 소리를 지른다. 기차 화통을 통째로 삶아 먹은 것 같은 우렁찬 목소리에 도란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욕실에서 나왔다.
“…아, 왜 이렇게 일찍 오고 난리야. 아직 머리도 덜 말랐는데.”
“평소에도 귀찮다고 안 말리는 놈이 무슨.”
“극성 안티팬과 오랜만에 마주하는 거니까 멋지게 보이고 싶단 말이야. 이런 매생이 같은 헤어스타일로 마주하긴 싫다고. 아, 아까 일어나자마자 씻을 걸 그랬어.”
“머리꼬라지가 매생이 같아도 저 새끼보단 네가 훨씬 나으니까 빨리 움직여.”
“진짜?”
성준이의 칭찬에 꽃받침을 하더니 애교스럽게 웃는 도란이다. …기, 기습당했다. 제 좌심실·우심실이 격하게 날뛰고 있어요. 갑자기 왜 성준이가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라고 비장하게 말했던 게 떠오르는 거지.
“응, 오피스텔로 오고 있어. 지금 오면 될 것 같아.”
도란이는 방 안으로 들어가 누군가와 짧은 통화를 마치더니, 침대 옆에 놓인 가방을 들고 나왔다. 그러더니 식탁 위에 놓인 자신의 태블릿과 노트북을 가방 안에 넣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얘네가 지금 뭘 하려는 건지 가늠이 안 된다.
대충 짐을 싼 건지, 가방을 닫으려던 도란이는 도로 지퍼를 열어 뭔가를 꺼냈다. 잠깐만, 저게 뭐야. 전기충격기?!
“김쭌, 이거 잘 챙겨.”
“오케이.”
성준이가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기라도 하듯, 진지한 표정을 하며 도란이가 건넨 전기충격기를 만지작거린다. 중요한 전투를 앞둔 것 같은 비장한 분위기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둘을 지켜보기만 하는 나다.
얼떨떨한 상태로 두 사람에게 이끌려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궁금증은 산더미처럼 커졌지만, 엘리베이터 내에 긴장감이 가득 감돌아서 입도 벙긋 못 하겠다. 엘리베이터에서 재빨리 내린 성준이는 전기충격기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찾는 게 없는 모양인지, 안도의 숨을 내뱉고는 우리보고 오라고 손짓한다.
이 미친 두 놈 때문에 괜히 나까지 긴장되잖아. 침을 꿀꺽 삼키고는 성준이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갑자기 내 손을 꼭 잡는 도란이다. 사람 떨리게 왜 또 이러냐고.
“이소야.”
“…왜.”
“…아까 내가 울컥하는 바람에 얘기를 못 했는데,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져도 그냥 우리 믿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 알았지?”
“뭔데? 대체 뭐하려는 건데?”
“설명할 시간이 없어. 넌 이거 한 가지만 하면 돼. 충격적이고 기가 막힌 얘기를 들어도 제발 가만히, 가만히만 있어. 열 받아서 한 대 팬다거나, 쌍욕을 한다거나 하지 말고.”
내가 무슨 사람 패는 기계냐? 나도 최소한의 이성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거든?! 순간적으로 울컥했지만, 어느 때보다 진지해 보이는 도란이 때문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도란이가 왜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지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도란이의 손을 잡은 채, 오피스텔 밖으로 나온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오피스텔 앞에서 우리 두 사람을 째려보고 있는 박원호를 발견했으니까. 뭔데? 저 인간, 왜 또 여기 온 건데?
씩씩거리며 박원호에게 다가가려 했는데, 그보다 한발 빨리 나를 자기 뒤에 숨기는 도란이다. 그러자 박원호의 인상이 더욱 구겨졌다. …아니, 그쪽이 뭐라고 인상을 구기세요.
“하나 남겨두길 잘했네. 심심하면 확인하시나 봐요? 우리 부둥켜안은 지 얼마 안 지났는데.”
“이 새끼야. 역시 네가 우리 헤어지게 하려고 수작 부린 거 맞지. 당장 이소 옆에서 떨어져.”
“하하, 뭐래. 망상도 정도껏 해야지. 형씨랑 얘기할 때마다 내가 나쁜 놈이 된 것 같잖아요. 기분 더럽게.”
두 사람의 대화에 내 눈이 더욱 크게 떠졌다. 얘기할 때마다? 둘이 전에도 만난 적이 있다는 소리야? 그리고 연이어 들리는 도란이의 말에 그야말로 너무 놀라 굳어버렸다.
“그나저나 우리 집에 몰카 설치하신 거, 꽤 좋은 카메라인가 봐요? 조명을 켜지 않아서 제대로 안 보이는 건 아닐까 내심 걱정했는데. 카메라 화질이 얼마나 짱짱하면, 이소인 걸 바로 알아보고 나타나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미친, 몰카를 설치했다고? 그것도 도란이 집에?! 이제야 왜 도란이가 현관문을 바꾸고 잠금장치를 늘린 것도 모자라, 보안업체와 계약까지 맺은 건지 알 것 같다.
저 미친놈이 또다시 자기 집에 몰래 침입하는 걸 막기 위해서.
그야말로 나락까지 떨어진 박원호의 추악한 모습에, 저 자식을 좋아했던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지기까지 한다. 동시에 차오르는 분노와 나 때문에 미친놈한테 휘말린 도란이에게 느끼는 미안함. 나도 모르게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내가 자기 손을 꽉 잡자, 도란이가 엄지손가락으로 내 손을 부드럽게 만지작거린다. 마치 괜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다정한 손길에 손힘이 점점 풀린다.
반면, 박원호는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너야말로 망상증 있는 거 아냐? 생각보다 훨씬 미친놈이네. 이소야, 저런 놈 옆에 붙어있지 말고 당장…”
“제가 박원호 씨 덕분에 몰카 탐지기도 구매했거든요. 그쪽이 망가트린 제 소중한 물건에 탐지기 한 번 대 볼까요? …아, 또 슬퍼지려고 그래. 그거 이제 더는 못 구하는 한정판인데.”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울컥했는지 도란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미안. 란아, 울지 마. 내가 하나 사줄… 아, 한정판이랬지. 미안, 내가 하루빨리 타임머신을 개발할게. 아니면, 중고천국 같은 곳이라도 열심히 뒤져볼까?
잔뜩 당황한 박원호는 나를 애절한 눈빛으로 간절하게 쳐다본다. …진짜 너 이제 사람 새끼가 아니라, 인두겁을 뒤집어쓴 괴물로 보이니까 제발 그딴 눈빛 하지 마. 소름 끼쳐. 더럽고, 추악해서 무섭다고.
“…이소야. 아니야, 저 자식이 거짓말하는 거야. 자기가 미리 피규어에 초소형 카메라 붙여놓고 나한테 뒤집어씌우는 거라고.”
“나 피규어라고 말한 적 없는데.”
“….”
“하하, 고마워라. 제가 소 잃고 외양간 고친 바람에 몰카를 누가 설치한 건지 증거가 부족했는데. 제가 애먹을까 봐 친히 자백도 해주시고. 엄청 친절하시네.”
도란이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가방을 뒤지더니 뭔가를 꺼냈다. …예전에 도란이가 소설 때문에 전문가에게 자문하러 가야 한다길래, 내가 선물로 줬던 녹음기다. 그게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은.
…얘 보기보다 용의주도한 타입이구나. 새삼 감탄스럽다.
다급해진 박원호가 녹음기를 빼앗기 위해 이쪽으로 다가왔다. 행여나 도란이한테 무슨 해코지라도 할까 봐 이번엔 내가 도란이를 뒤에 숨겼다. 성준이도 들고 있던 전기충격기를 박원호에게 들이밀며 가까이 오지 말라고 경고했다.
“와, 나 꼭 슈퍼 배관공에 나오는 복숭아 공주님이 된 것 같아.”
넌 지금 이 상황에 농담이 나오냐?! 애가 크면 클수록 깡만 세져서. 물론, 이 상황에서 어릴 때처럼 벌벌 떨면서 울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는 좀 진지해져라, 인간아!
“쭌, 나 잠깐 찐하게 퍼포먼스 할 거니까, 그동안 뒤치기 안 당하게 감시 부탁해.”
“오냐.”
성준이와 무언가 사인을 주고받더니, 내 허리를 양팔로 감싸고서 자기 쪽으로 가까이 당기는 도란이다. 오랜만에 도란이 얼굴을 온전히 마주해서인지, 그동안 죽어있던 심장이 세차게 벌렁거린다.
멀리서 얼굴 보는 것도 힘든데,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몇십 배로 견디기가 힘들다고!
설상가상으로 도란이가 내 쪽으로 점점 고개를 숙인다. 도란이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미치겠네! 사, 사, 사람 살려. 심장 터질 것 같아.
살기 위해 다급히 거리를 벌리려는데, 생긋 웃으며 한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는 도란이다.
“저번에 나한테 퍼부었던 거, 그대로 돌려받는다 생각하고 얌전히 받아들여.”
“…뭐? 읍.”
도란이가 나직이 속삭인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도란이의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에 맞닿았다. 살짝 벌린 입 사이로 파고든 혀가 내 혀를 스칠 때마다 짜릿한 느낌이 감돈다. 마치 탄산음료를 입안 가득 머금은 것처럼.
…뭐지? 이거 꿈인가? 아니, 이런 잡생각을 하는 것도 아까워.
그대로 도란이의 목을 감싸 안고 끌어당겼다. 내가 무슨 상황에 놓여있는지도 잊을 정도로 정신없이 탐미했다. 술에 취해 저질렀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황홀하고 아찔한 키스를.
황홀함에 취하기도 잠시, 박원호가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자 내게서 멀어지는 도란이다. …저 새끼 내가 꼭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죽이지 못하더라도 평생 저주할 거야! 이 망할 새끼야!
씩씩거리며 박원호을 째려보는데, 도란이가 내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린다.
그러더니 촉촉해진 내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주면서 배시시 웃는다. 그 웃음에 하늘을 뚫을 기세였던 분노가 땡볕에 놓인 아이스크림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늘 느끼는 거지만, 난 란이한테 너무 약해.
“전에 내가 이렇게 말했었죠. 내가 이소 옆에 붙어있는 것 때문에 얘가 자기 짝도 못 찾고 독수공방하게 되면, 그땐 내가 이소 책임지겠다고.”
“…란아.”
“근데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박원호 씨 같은 사람이 이소 옆에 들러붙어 있는 꼴이 보기 싫어서 그냥 내가 가지려고.”
도란이가 그대로 나를 내 품 안에 가뒀다. 향긋한 샤워코롱 향기에 잠깐 유혹당할 것 같았지만, 그것보다는 도란이를 보고 싶었다. 슬쩍 고개를 들어 도란이를 올려다봤다. 박원호와 마주친 이후, 처음으로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진 상태였다.
살벌한 눈빛으로 박원호를 쳐다보던 도란이가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꺼져, 새끼야. 내 여자 옆에서 알짱대지 말고.”
============================ 작품 후기 ============================
이루네님// 가장 좋아하는 월요일 새벽에 등장했습니다 :D (따란)
soae님// 히익! (주섬주섬 화요일 연재분을 준비한다)
한겻S2님// 앗, 화, 화요일 밤에 오도록...하겠습니다..^p^..
빗자루계인님// 란이의 사생활은...덕질하고...놀고...자고... (절레절레)
샤냥꾼님// ^p^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모모w님// 헉, 저도 모모님 사랑해여 /ㅅ/
여러분이 그렇게 소환주문 외운다고 제가 순순히 나타날 것 같아욧?
넹 맞음 ㅋ ^p^ㅋ(소환 난이도 튜토리얼 : 에이온)
귀여움과 상남자를 오가는 도란이 주식 팝니다! 마구 올라라!
다음 연재는....... ㅇ<-<..
(소환주문 효과가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