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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58화 (58/97)

00058 55. 너희는 참 여전하구나. =========================

정확히 말하면, 풍선 바람 인형을 연상케 하는 기다란 팔이 우리 사이에서 위아래로 파닥거리고 있다. 이런 기다란 팔을 가진 사람은 내 주변에 딱 한 사람뿐인데.

…역시나, 성준이다.

그러고 보니 얘, 휴일마다 도란이 집에 출석 도장 찍지. 그것도 아침 댓바람부터. 오늘도 출석 도장을 찍은 걸 보면 도란이가 살아있기는 한가 보다. 이상한 걸로 도란이의 안위를 파악하고 안도하는 나다.

성준이는 양팔을 열심히 휘적거리며, 우리 사이로 게걸음을 하고 비집고 들어오더니 박원호를 째려보기 시작했다. 눈싸움하는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 박원호를 내려다보던 성준이가 박력 넘치게 소매를 걷어 올렸다.

오오, 김성준. 포즈는 좀 웃기지만, 역시 다혜와 미래를 함께할 예비신랑!

“이보셔 형씨! 목숨을 소중히 여겨야지! 이소한테 그렇게 개기다간 요단강 건너 조상님이랑 하이파이브한다고!”

…네가 그럼 그렇지. 너한테 기대한 내가 바보천치다. 야, 저 자식 집착쩌는 스토커 새끼거든? 그런 놈한테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 진지하게 설교하지 말라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성스러워서 꼭 찬송가 같은 거라도 부르며, 저 자식의 인생을 축복해줘야 할 것 같잖아!

“미친놈아. 저 새끼 내 스토커거든?”

“풉.”

“…죽고 싶냐, 김성준.”

“야, 미친 스토커 자식아! 우리 이소 느님 귀찮게 하지 말고 썩 꺼져! 나한테 죽기 싫으면!”

이따금 느끼지만, 이 인간이 직장생활에서 배운 건 처세술과 박쥐 같은 태세전환인 것 같아. 평소에 얼마나 직장 상사한테 딸랑거렸으면 태세전환이 5초도 안 걸려. 갑작스럽게 등장해 헛소리를 늘어놓는 성준이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는 박원호다.

내가 누누이 말하는데, 너보다 어이없는 인간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요.

“근데 이 자식, 상판대기가 엄청 익숙한데. 형씨, 우리 구면인가?”

“….”

“일방적으로 잠수탄 주제에 인제 와서 나랑 다시 시작하자고 씨불이는 내 전 남, 아니 스토커.”

“헐, 이 새끼가 그때 그 새끼야? 이거 완전 개또라이 아냐?”

준또라이가 개또라이라고 칭하는 이 상황이 굉장히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하긴, 저 새끼가 또라이 취급당해도 싸긴 하지. 또라이가 인증한 개또라이. 딱 맞네.

“어이, 개또라이. 적당히 들이대고 꺼져. 뭔데 내 친구한테 개수작 떨고 지랄이야.”

박원호의 정체를 안 성준이가 이번에는 진지하게 박원호를 위협한다. 사실 성준이는 허우대만 우람하지, 싸움 같은 건 할 줄 모른다. 기껏해야 큰 키로 머리끄덩이를 선점하고, 주먹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정도.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박원호는 키 190cm 몸무게 0.1톤의 거구를 자랑하는 성준이한테 잔뜩 쫀 듯 보인다. 시선을 회피하더니 슬슬 뒷걸음질을 치는 걸 보면.

참다못한 성준이가 주먹을 올리며 신경질을 내자, 그제야 황급히 오피스텔을 벗어나는 박원호다.

혹시나 박원호가 주변에서 얼쩡거리기라도 하고 있을까 봐, 오피스텔 주변을 샅샅이 확인하고 돌아온 성준이는 이쪽으로 오자마자 내 어깨부터 덥석 잡는다. 그러더니 엄청 다급하게 언제부터 스토킹 당했냐고 묻는다. 어우, 내 걱정이라고는 안 하는 애가 이러니까 눈물 날 것 같잖아.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했더니 인상을 팍 찌푸리고 육두문자를 내뱉는 성준이다.

“…미친 새끼. 한 달 동안 그 지랄을 떨었다고? 그래서 집에도 못 들어갔고?”

“어.”

“어쩐지 우리 다요미가 자꾸 밖에서 만나자고 하더라. 그나저나 다요미는 왜 나한테 말을 안 한 거야. 섭섭하게.”

“다혜한테 섭섭해하지 마. …내가 부탁한 거니까.”

사실 다혜는 성준이한테 말하려고 했었다. 이런 일일수록 주변 사람들한테 알리는 게 중요하니까. 하지만, 내가 만류했다. 이혁이가 매일 지켜주고 있기도 하고, 나 때문에 다혜가 결혼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신랑이라도 아무 걱정 없이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도란이한테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분명 도란이랑 가장 친한 성준이라면, 내가 스토킹 당하고 있는 사실을 알자마자 도란이한테 말할 게 분명하니까.

나 역시, 도란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고.

성준이 옆에 있으면 어떻게든 들리는 게 도란이 이야기다. 어떻게 지내는지, 집에 오지 않는 내 걱정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나 때문에 화가 많이 났는지. 솔직히 한 달 동안 궁금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듣기 싫으면서도 가장 듣고 싶은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도란이 이야기를 들으면, 기껏 마음을 다잡은 게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가뜩이나 힘든데 그렇게 되기까지 하면, 아무리 나라도 버틸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다혜한테 부탁했다. 되도록 성준이와 마주치지 않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사실대로 말하지 말아 달라고.

“와, 진짜 권이소 너무하네. …란이는 아냐? 너 스토킹 당하는지?”

“…글쎄. 박원호랑 내가 마주친 건 아는데, 스토킹 당하는 건 모르고 있을걸.”

“딱 봐도 란이한테 알리기 싫어서 나한테도 숨긴 거구먼?”

“…응.”

평소에는 둔탱이인 주제에 이런 건 또 귀신같이 알아채는 성준이다. …도란이는 반대인데. 364일 둔탱이여도 좋으니까 하루만, 아니, 내가 널 좋아하고 있다는 것만 잠깐이라도 알아채 주지. 바보 같은 자식.

“그게 숨겨서 될 문제냐? 한 사람이라도 더 알아야 그 인간 감시를 하든, 고소미를 먹이든 할 거 아냐!”

“…됐어. 걔 하나 없다고 해서 문제 될 것… 어떻게든…”

“야, 왜 울고 그러냐. 란이랑 싸웠냐? 내가 란이 한 대 패줄까? 엉?”

“…몰라. 나 이제 걔 싫어. 진짜 싫… 싫어야 하는데.”

아, 쪽팔려. 왜 자꾸 청승맞게 눈물이 나오는 거야. 여태 꾹 잘 참았는데. 왜 하필이면 성준이 앞에서 질질 짜고 난리냐고.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다독이던 성준이가 갑자기 내 손목을 잡았다.

“안 되겠다. 내가 그 새끼 한 대 패줄게.”

“…어?”

그러면서 나를 끌고 성큼성큼 오피스텔로 들어가는 성준이다.

얼떨결에 들어온 오피스텔. 한 달 만에 봐서인지, 내부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이다.

…그리고 도란이 집 앞도 오랜만이네. 고작 한 달 지났는데도 달라진 게 많다. 전보다 잠금장치가 많아지고, 문 디자인도 조잡하면서 좀 더 튼튼해 보이는 걸로 바뀌어 있다. 거기다 성준이가 누르는 걸 보니 아무래도 비밀번호까지 바꾼 것 같다.

바뀐 비밀번호가 뭔지 짐작도 못 하겠네. 정말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아주 많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도란이 집은 외부만 바뀌고, 내부는 기억과 똑같다. 여전히 깔끔하고, 곳곳에 자리 잡은 피규어도 그대로고, 너무나도 익숙한 도란이만의 냄새도 그대로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세상모르고 자는 것도 그대로고.

남은 스토커 때문에 개고생하다 왔는데, 너는 태평하게 퍼질러 자는구나. 울컥하면서도 새근새근 자는 모습에 그동안 쌓였던 게 스르르 녹는다. 이러면서 무슨 수로 짝사랑을 접겠다는 건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성준이는 긴 다리를 쭉쭉 뻗어 침대로 가더니 그대로 도란이 배에 강스파이크를 날렸다.

“일어나! 새끼야!”

“악!”

갑작스러운 공격에 도란이가 배를 붙잡고 끙끙대며 괴로워한다. 분명 안쓰러운데, 왜 한편으로는 엄청 통쾌한 거지. 평소 같으면 성준이를 말리겠지만,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네. 하하, 묵은 체증이 싹 날아간다. 더 괴롭혀라, 더!

한참을 고통스러워하더니 꾸물거리면서 일어나 침대에 앉는 도란이다.

그나저나 얘, 왜 잠옷을 입다 말았어. 단추가 모조리 풀린 것도 모자라 한쪽 팔만 끼워놓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 건데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이나 보이고, 감사합… 아니, 이게 아닌데.

아무래도 눈이 떠지지 않는지, 도란이가 눈을 꼭 감은 채로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야! 김쭌! 내가 배 때려서 깨우지 말랬지! …으아, 아파라.”

“지금 이렇게 퍼질러 자고 있을 때가 아니거든!? 이소한테 스토커 붙었다고!”

“…이송하다 스티커가 붙어?”

아직 잠도 덜 깼네. 귀가 아플 정도로 크게 말했는데도 못 알아듣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 성준이가 답답한지, 자기 가슴을 두들기더니 도란이 귀에다 대고 쩌렁쩌렁하게 소리친다.

“이소한테 스토커 붙었다고! 권이소! 네 소꿉친구!”

“…아악! 미친놈아!”

청각이 민감해서 시끄러운 걸 질색하는 도란이에게 성준이가 날린 최악의 공격. 효과는 굉장했다! 덕분에 언제까지고 떠지지 않을 줄 알았던 도란이 눈이 번쩍 떠졌으니까.

“죽을래?! 고막 터지는 줄 알았잖아!”

“난 너 때문에 속이 터진다!”

“…아아, 진짜 김쭌 이 미친 새끼…! 어, 권이소다.”

“….”

도란이가 부르는 내 이름에 가슴이 시큰거려서 그대로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덕분에 도란이가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 아니, 알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다고. 오히려 모르는 게 약이다.

“어쨌든 이소 지금 스토킹 당하고 있어! 방금 그 새끼 보고 오는 길이고. 스토킹 당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간대. 지금 이렇게 쳐 자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그래서 뭘 어떻게 하라고.”

“작전 회의를 해야 할 것 아니야!”

“…응, 작전 회의 좋네. …10분만 자고.”

목소리가 점점 늘어지더니 이내 말이 없는 도란이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앉아서 졸고 있다.

얼씨구? 왜 이렇게 내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냐. 성준이도 마찬가지인지, 이번에는 등짝에 스파이크를 먹인다. 또다시 고통스러운 비명이 방 안 가득 울려 퍼진다. 얼씨구나! 좋구나!

성준이는 익숙하게 옷장을 뒤지더니 괴로워하는 도란이에게 체크남방을 던졌다.

“야! 이거 입고 옥상으로 따라와!”

“…아, 제발. 나 오늘까지 안자면 죽… 아니다. 입혀줘, 엄마.”

“…하아. 팔 내밀어, 팔.”

한숨을 쉬면서도 옷을 입혀주는 성준이다. 쟤네가 친구인지, 쌍무적 부양 관계인지 이따금 헷갈린다. 옷을 입은 도란이는 하품을 하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위에는 잠옷을 입고 있었으면서 아래는 청바지를 입고 있냐. 이건 무슨 언밸런스한 패션이래.

“나 씻고 가면 안 돼?”

“그냥 옥상 잠깐 갔다 오는데 뭘 씻어. 그냥 나와.”

“안 돼. 나 요새 팬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산단 말이야. 잠깐 밖에 나갈 때도 신경 써야 한다고.”

“괜찮아. 안 씻은 거 티 안 나.”

“오케이.”

잠깐 옥상에 가는 거면서도 태블릿과 휴대폰을 바리바리 챙기는 도란이다. 심지어 노트북까지. 무슨 옥상에서 사이버 매치라도 하냐? 어이가 없어서 한숨이 나온다.

헛웃음을 짓고 있는데 도란이와 눈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외면해버렸다.

“권이소.”

“…왜.”

“너 스토킹 당한다며. 우리 집에서 나오지 말고, 문 잠그고 있어. 보안업체 계약했으니까 너희 집보다 안전할 거야.”

그렇게 말하며 성준이의 뒤를 따라 나가는 도란이다. 웃기시네.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얌전히 도란이 집에서 죽치고 기다리는 나다.

============================ 작품 후기 ============================

한겻S2님// 흑흑, 엄청 아쉬웠는데 한겻님 말씀에 사르르 녹아내렸어요 /ㅅ/

kkyllim님// 헉, 저도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루네님// 행복하셨다니 기뻐요 /ㅅ/ 일요일 새벽에 출몰한 에이온입니다! :D

soae님// ㅋㅋㅋㅋㅋㅋㅋ 심영의 동지로 만들었어야 했는데(오열)

multi89님// 빨리빨리 지나가라라고 하시기에 일요일 일찍 나타났어요!

빗자루계인님// ㅋㅋㅋㅋㅋㅋㅋ 주인공이 도란->계인으로 바뀔지도(?)

sn님// ㅋㅋㅋㅋㅋㅋ 물기 전에 거시기를 깠어야 하는ㄷ..(?)

연화령님// 그렇습니다, 또라이도 인정한 진상입니다. 그나저나 제 걱정을 해주시다니 /ㅅ/ 잠 잘자고 있으니 괜찮아요!

드디어 연참동안 분량이 공기였던 란이가 나왔습니다!

두 또라이들이 동시에 나오니 분위기가 급 밝아졌다(...)

역시 <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의 밝은 분위기는

두 또라이들이 집도하는 듯합니다.

다음 연재는 월요일? 화요일? 아니면, 일요일 ㅎ?

어떤 날짜가 좋으세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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