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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57화 (57/97)
  • 00057 54. 한 달이 되어가도 =========================

    몇 년 전, 갑자기 허브를 키우고 싶어서 그 생명력 강하다는 로즈마리 화분을 산 적이 있었다. 하루에 몇 번이나 지켜보며 애정을 쏟고, 물도 꼬박꼬박 주고, 신경 써서 햇볕도 매일 쬐게 했건만, 한 달도 못 버티고 비명횡사했던 내 첫 식물, 로즈마리.

    지나친 관심은 도리어 독이 된다는 꽃집 아주머니의 조언을 그때까지만 해도 수긍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로즈마리의 심정을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내 애정이 죽고 싶을 만큼 부담스러웠구나.

    요즘 내 일상은 내 책상에 배달되어있는 꽃바구니를 버리는 걸로 시작한다.

    당연히 발신자는 박원호. 돈이 남아도시는지 매일 손편지가 꽂혀있는 꽃바구니를 보내는데, 그야말로 귀찮아죽겠다. 처음에는 부러워하던 직장 동료들도 내가 꽃바구니를 받는 족족 버리니까 스토커한테 시달리고 있냐며 걱정하고 있다.

    요새는 후배가 나보다 먼저 출근하면, 꽃바구니를 깔끔하게 버려놓기도 한다.

    집에 못 들어간 지도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다. 젠장, 아까운 내 집세. 이참에 오피스텔 빼고 본가로 들어갈까 고민에 잠겨있는 나다. 언제까지 다혜네 집에서 신세 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솔직히 오피스텔로 다시 들어갈 생각은 매일 하고 있지만, 금세 체념하고 만다.

    그 미친놈이 매일 우리 집 앞에서 버티고 있으니까.

    처음 일주일 동안은 회사 앞에도 매일 나타났었다. 다행히 나를 걱정한 이혁이가 내 퇴근시간에 맞춰서 데리러 나오는 덕분에 요즘은 회사 앞에 출몰하지는 않는다.

    대신, 오피스텔 근처를 서성거린다고 한다.

    이혁이가 내 옷이나 생필품을 챙겨주러 종종 오피스텔로 가는데, 그때마다 마주치면 소름이 끼친다며 몸서리를 쳤다. 그 얘기를 듣고 솔직히 나도 너무 소름이 돋아, 그날 밤은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경찰에 신고한 적도 있는데, 연인의 치정 싸움 정도로만 생각하고 신고를 받아주지 않았다. 메신저나 전화 내용도 보고 싶다는 내용이 전부라, 협박죄 같은 걸로 잡아넣을 수도 없다고 하고. 한마디로 증거 부족.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피하기만 하기를 반복, 그 덕에 반강제적 홈리스 신세인 나다.

    그래도 요즘 들어 밥은 잘 먹고 다니고 있다. 아침은 매일 다혜가 챙겨주고, 점심·저녁은 후배가 나를 억지로 식당에 끌고 가 밥을 먹인다. 내가 안 먹으면 자신도 안 먹겠다나 뭐라나.

    당연히 처음에는 거절했는데, 그냥 한 말이 아니었는지 진짜로 한 끼도 먹지 않길래 마지못해 같이 먹고 있다. 입맛은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와 얘기를 하며 먹으니 어찌어찌 넘어가기는 한다.

    …그리고 도란이는 그날 이후로 연락이 없다.

    화난 걸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내가 싫어진 걸까. 아니면, 귀신같이 내 마지막 바람을 알아차린 걸까. 마음을 정리하기 전까지 연락하지 말기를 바랐었다는 걸. 그게 맞으면 하루빨리 마음 비워야겠네.

    우습게도 짝사랑 관두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것과 달리, 여전히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나다.

    그래도 요즘은 많이 나아졌다. 예전에는 떠올리기만 해도 울컥하고, 그립고, 서운하고. 복잡한 감정들이 어지러이 뒤섞여 눈물바다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심장만 아릴 뿐, 그냥저냥 넘어가고 있다. 덤덤해진 건지, 아니면 눈물이 말라버린 건지는 잘 모르겠다.

    오늘 점심시간 역시, 나를 잡아끌고 중국집으로 온 후배다.

    뭐 먹고 싶으냐고 묻길래, 빨리 먹을 수 있는 거면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했더니 이리로 오게 됐다. 내 상태가 좋지 않은 걸 잘 아는 후배는 요즘 들어 부쩍 나를 배려하고 신경 쓴다. 그게 너무 고맙고, 한편으로는 미안하다. 주변 상황이 정리되면 잘 챙겨줘야지.

    지금도 내가 갈 수 있는데, 자기가 반찬을 가져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난 후배다. 오늘따라 손님들이 많아서, 셀프 코너의 줄이 생각보다 길다. 어쩐지 많이 미안하네.

    …그리고 심심하다.

    쉴 새 없이 조잘대는 후배가 없으니 몹시 지루해졌다. 꼭 도란이가 있다가 없는 것처럼. 하아, 또 도란이 생각이네. 이따금 한 번씩 무의식적으로 떠올릴 때마다 괴로우면서, 자괴감이 몰려온다. 대체 걔가 뭐라고 아직도 이러고 있는 건지.

    괜히 울컥해서 식탁 위에 놓인 도란이의 책을 째려봤다.

    후배는 도란이의 모든 책을 최소 5권 이상 갖춰놓고 있을 정도로 도란이 소설의 광팬이다. 며칠 전에 듣기로는 팬카페 스텝도 맡고 있다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 도란이 때문에 우리 출판사로 지원했을 정도니 그 빠심이 어느 정도인지는 불 보듯 훤하다.

    얼마나 좋으면 언제나 어디서나 책을 꼭 들고 다니잖아.

    그나저나 책 위치가 좋지 않다. 아까 서빙하시는 분이 테이블을 치고 가서 책이 모서리 끝부분에 걸쳐져 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위태한 게 아무래도 안쪽으로 밀어 넣어야겠다.

    책을 옮기려고 하는데, 손힘이 없어서 그런지 도로 놓아버렸다. 아이고, 후배가 아끼는 책인데. 다행히 바닥에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책 커버가 벗겨졌다.

    이리저리 살펴보니 책 커버가 찢어지지는 …잠깐만, 이게 뭐야.

    내가 헛것을 보고 있나. 어디서 본 듯한 사인이 책 커버 뒷면을 전부 차지하고 있다. 아무리 확인해도 이거 분명 도란이 사인이다. 심지어 후배의 이름인 ‘To. 지연 씨’까지 쓰여 있는 사인.

    도란이는 나름 인기 작가지만, 한 번도 팬 행사를 연 적이 없다. 자신이 누군지 알리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무리 열성 팬이라도 도란이 사인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뭐야?

    때마침 후배가 오길래 다급하게 사인의 출처를 물어봤다.

    “저기, 지연 씨. 이 사인 뭐야? 분명 오키드 작가 건데.”

    “…네, 네? …아, 그, 그러니까 아아! 제가 아는 사람이 오키드 작가님이랑 아는 사이라 만난 적이 있거든요! 그때 받았어요!”

    내 물음에 잔뜩 당황하더니 말까지 더듬거리며 얼버무리는 후배다. 도란이는 친한 사람이 아니면, 자기가 작가라는 사실을 숨기는데? 의심의 싹이 순식간에 꽃을 피웠지만, 이내 시들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걔랑 나랑 무슨 상관이야.

    오늘도 변함없이 나를 데리러 온 이혁이다. 꼴에 경호학과에 관련 자격증까지 보유했다고, 땅꼬마 주제에 요즘은 좀 듬직하게 느껴진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다혜의 집까지 배웅하더니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툴툴거린다.

    웬일로 듬직하다 했더니 역시 철들려면 한참 멀었구나, 내 동생아.

    그래도 여태 고생한 게 있으니 한 번쯤은 동생의 불평을 받아줘도 좋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는 오구오구해가며 달래줬더니 똥 씹은 얼굴이 되는 이혁이다. 이 자식이?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누나는 집에도 못 들어가고.”

    “내 말이 그 말이다. 멀리 이사라도 가야하나.”

    “진짜 누나는 어쩌다 그런 거랑 사귀어서는.”

    이혁이의 말에 잠시 발끈했지만, 내가 생각해도 그 인간을 좋아했던 과거의 내가 병신 같아 꽉 쥔 주먹을 도로 내려놓았다. 내가 웬일로 자기한테 밀리자, 잔뜩 의기양양해져서는 박원호 뒷담화 겸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는 이혁이다.

    “그 새끼, 완전 중증 스토커라고. 누나 집에 갔을 때 마주칠 확률이 80% 이상이면, 문제 있는 거 아냐?”

    “그러게.”

    “한 달 가까이나 피하고 있으면 포기하고 나가떨어져야 정상아냐? 나 같으면 지긋지긋하고, 자괴감 밀려와서 때려치우겠다.”

    “그러게.”

    “진짜 그 인간 하나 때문에 몇 명이나 개고생하는 거야. 나도 그렇고, 누나도 그렇고. 다혜 누나도 곧 결혼하는데 누나 신경 쓰느라 준비도 못 하고. 그것뿐이야? 란이 형도 그 새끼한테 멱살을 잡히질 않나, 매일 전… 아.”

    신나서 이야기를 늘어놓더니 잔뜩 당황한 얼굴로 입을 막는 이혁이다. 네 누나, 멘탈은 나가도 귀는 멀쩡하거든? …다 들렸다, 이 자식아.

    “란이 뭐.”

    “아냐. 아무것도.”

    “아니긴 뭐가 아니야! 란이가 멱살을 왜 잡혀. 빨리 아는 거 다 말해. 당장!”

    평소 같으면 내 기에 눌려서 마지못해 실토할 녀석이 오늘은 때려죽여도 말 못 한단다. 한참을 설득해도 요지부동이다. 결국, 이혁이를 설득하는 걸 포기한 나는 이혁이 멱살을 잡고 있던 걸 풀었다. 됐다, 거지 같아서 내가 그 새끼 직접 만나서 알아낸다.

    란이한테 무슨 헛짓거리를 했는지.

    ***

    와, 소름 끼쳐. 진짜로 우리 오피스텔 앞에 서 있잖아.

    휴일 아침이 되자마자, 박원호 멱살잡이하려고 한 달 만에 그리운 내 고향, 오피스텔로 왔다. 헤어진 여친을 기다리는 듯한 아련한 표정에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온다, 개자식아.

    도란이한테 이 새끼, 저 새끼 한 걸로도 모자라 애 멱살을 잡아? 넌 오늘 나한테 죽었다.

    “야, 박원호.”

    “…아! 이소야!”

    미친 새끼야. 소름 돋으니까 내 이름 부르면서 웃지 마. 당장에라도 두들겨 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일단 진정하고 얘기부터 들어보자. 도란이한테 뭔 짓을 했는지.

    만일 도란이한테 개떡 같은 짓 저질렀으면, 내가 감방 신세 지는 한이 있더라도 너 죽여 놓는다.

    이 새끼가 도란이한테 했다는 것처럼 멱살을 꽉 잡고 물었다. 도란이한테 무슨 짓 했냐고. 이혁이한테 애 멱살 잡았다는 얘기는 들었으니까 둘러댈 생각하지 말라고. 내 으름장에 한숨을 쉬던 박원호가 슬픈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미친 새끼.

    “그래, 내가 그 자식 멱살 잡은 건 맞아. …미안, 너무 열 받아서 그랬어.”

    “야, 네가 란이한테 열 받을 게 뭐가 있는데. 아니, 그 전에 네가 뭔데 란이 멱살을 잡는데!”

    “…나는 어떻게든 네 마음 돌리려고 애쓰는데! 정작 자기는 태연하게 다른 여자 만나고 있으니까 눈이 안 돌아가고 배기냐고!”

    “…그건 또 무슨 정신 나간 소리야? 하다 하다 과대망상증까지 있냐?”

    박원호는 고개를 젓더니 휴대폰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뭘 보여주려고 이러는 거야. 바짝 경계한 상태로 박원호의 행동을 주시했다. 단순히 사진만 보여주려던 건지, 갤러리 화면을 내게 보여준다.

    …정말 도란이가 여자와 카페에서 만나고 있는 사진이다. 그것도 내가 잘 아는 인물, 지연 씨.

    미친. 입에서 미친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온다. 내가 미친 여자처럼 실성한 듯 웃어 재끼자, 내 손을 잡으며 말하는 박원호다.

    “…이소야, 걘 이미 가망 없어. 그러니까 너답지 않게 짝사랑 같은 거 하지 말고 나한테 와, 응? 내가 진짜 잘할게.”

    “하, 하하. 미치겠다.”

    자연스레 내 허리에 팔을 감더니, 아마도 내게 키스하려는지 서서히 내 얼굴로 다가오는 박원호다. …그래, 그렇게 원한다면 받아줄게. 나도 이제 진절머리난다.

    나는 조금씩 다가오는 박원호의 입술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힘세고, 강하고 튼튼한 이빨로. 세게 깨물었는지 혀끝에 비릿한 피 맛이 감돈다. 퉤퉤. 입맛 버렸네. 내가 깨물 건 예상 못 했냐? 예상 못 했겠지. 내가 지금 얼마나 빡쳐있는 지도 모르는 새끼가.

    하다 하다 도란이 도촬까지 하냐? 진짜 정신 나간 새끼 아냐, 이거.

    대체 외국물을 어떻게 먹으면 사람이 이렇게 미칠 수가 있는지 의구심이 싹 튼다. 분명 전에는 이렇지 않았었는데. 그야말로 연구 대상이다, 연구 대상. 이 인간 연구하면, 노벨상은 떼 놓은 당상이겠다.

    내가 문과인 바람에, 좋은 연구 대상을 눈앞에 두고도 연구를 못 하네. 안타까워라.

    “진짜 어이없네. 도란이가 딴 여자 만나면 뭐? 내가 질질 짜면서 너한테 기댈 줄 알았냐? 차라리 절에 들어가서 비구니가 되면 됐고, 수도원 가서 수녀가 되면 됐지, 너랑은 안 사겨, 새끼야!”

    “…하아.”

    “그리고, 도란이가 여자를 만나든 말든 네가 왜 나한테 그걸 이르는데? 난 눈치 없는 새끼도 싫고, 고자질하는 새끼도 질색인데, 유감스럽게도 넌 그거 두 가지 전부 다 포함하고 있네. 그래서 네가 나랑 안 되는 거야. 제발 좀 꺼져!”

    일순간, 묵묵히 내 말을 듣던 박원호의 눈빛이 달라졌다. 웃던 얼굴은 어디 가고 없고, 무표정한 얼굴로 서서히 내게 다가온다. …미친. 나 웬만한 거에 안 쪼는데, 이건 좀 무섭다. 와.

    바짝 경계하면서 당장에라도 거시기를 한 대 깔 기세로 준비하는데, 내 손목을 피가 안 통할 정도로 세게 잡는 박원호다.

    “미친 새끼야, 이거 안 놔?”

    “…대체 어떻게 하면 받아줄 건데! 그 자식이 뭐라고 우리가 이래야 하냐고!”

    “너 진짜 무슨 피해망상증 있냐? 도란이 없었어도 난 너랑 안 사귀어! 너같이 이미 떠나간 여자한테 집착쩌는 미친놈이랑 왜 사귀겠냐고!”

    “권이소!”

    으, 손목 부러질 것 같다. 셰프들이 무거운 조리도구를 사용해서 손힘 하나는 세다더니, 아무래도 맞는 말 같다. 젠장. 까짓것 난 오늘 손목 부러지고, 넌 중요부위 잃자, 새끼야.

    그렇게 생각하며 한쪽 다리를 슬며시 뒤로 젖히는데, 누군가가 내 앞을 막아섰다.

    ============================ 작품 후기 ============================

    연화령님//... ㅠㅠㅠ 5분차이로 당일 4연참 오버해버렸어여 (오열)

    이루네님// 헉 /ㅅ/ 너무 기뻐여! 제가 이소랑 동급이 되다니! (신남)

    샤냥꾼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한숨)

    soae님// 이번엔 멱살잡이....! 거시기까기는 미수(주륵)... 어떠세요!

    한겻S2님// 저도 재밌다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ㅅ/!

    힝힝 ㅠㅠㅠ 하루 4연참하려고 했는데, 몇 분 차이로 다음날이 되어버렸어 8-8...

    이렇게 된 이상 24시간 4연참으로 ㅇ<-<....(장렬히 산화한 에이온)

    그래도... 연참 덕분에... 발암구간을 하루만에 넘겼ㄷ....

    저.....쉴거예요 이제... 일요일에 봐요....ㅇ<-<

    (시체는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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