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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56화 (56/97)
  • 00056 53. 내가 왜 사연팔이를 듣고 있어야 하나 =========================

    아, 꼴 보기 싫은 얼굴을 테이블 너머로 마주해야 한다니. 덕분에 점심·저녁 모조리 걸렀는데도 속이 더부룩하다. 진짜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 1분 1초도 마주하기가 싫었는데. 제가 지금 전 남친이라는 찌끄래기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거든요.

    그것도 스토커처럼 이틀 동안 집·회사 번갈아 쫓아다니는 인간이면 더욱요.

    박원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입에서 18, 28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차라리 도란이 얼굴 보는 게 백배 낫… 나 왜 또 도란이 타령이래. 짝사랑 그만두기로 했잖아. 그만하자. 제발 그만!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박원호가 웃으며 내게 말을 건다.

    “뭐 마실래?”

    “그쪽이랑 마주 보면서 뭐 마시고 싶진 않거든?”

    “그래도 카페잖아. 1인 1음료 시키는 게 규칙이고. 나랑 같은 아메리카노 마시자, 그럼.”

    내 동의는 구하지도 않고 일어나 카운터로 가는 박원호다. 저 쓴 커피 안 좋아하거든요? 게다가 빈속에 커피 안 마셔요, 이 인간아. 뭐라 따질까 하다가 귀찮아서 내버려 뒀다.

    자기가 시켰으니 자기가 알아서 마시든지 말든지 하겠지. 난 속 타니까 옆에 있는 냉수나 떠다마셔야겠다.

    카페에 손님이 별로 없어서인지, 음료가 생각보다 금방 나왔다. 나한테 아메리카노를 들이밀길래 안 마신다고 단호하게 말하며, 도로 돌려줬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테이블 옆에다 갖다 놓는 박원호다.

    한시라도 빨리 이 인간 옆에서 벗어나야지.

    무슨 개떡 같은 용건인지 선아에게 대략적인 스포를 들은지라 솔직히 궁금하지도 않고, 안 봐도 비디오지만, 듣기 전까진 돌려보내 주지 않을 기세라 예의상 물어봐 주기로 했다.

    “그래서,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이틀 동안 남의 집이랑 회사 앞에서 스토커마냥 기다린 건데?”

    “…꼭 그런 식으로 날카롭게 말해야겠어?”

    “하하, 바라는 것도 많으시네. 왜, 막장 드라마처럼 냉수 샤워라도 시켜줄까?”

    “…권이소! …하아. 아니다. 내가 잘못한 거니까.”

    진짜 어제부터 피해자 코스프레 장난 아니다. 박원호. 불쌍하고 가련해서 눈물이 다 나네.

    누가 보면 내가 일방적으로 연락 끊고, 몇 년 동안 소식도 없다가 불현듯 나타나 다시 사귀자고 말하고 있는 줄 알겠어요. 기가 차서 허파에 바람이 숭숭 들어갔는지 헛웃음이 자꾸 나온다.

    “어제도 말했지만, 우리 다시 시작하자.”

    “어제도 말했지만, 싫다고요.”

    “이소야, 제발…. 난 너 없이 못 살 것 같다고.”

    “어이구, 저 없이 못 살 것 같다는 인간이 몇 년 동안 잠수를 타셨어요? 몇 년 동안 냉동인간으로라도 지내셨나 봐요?”

    내 말에 인상을 찌푸리는 박원호다. 왜, 뭐. 내가 무슨 틀린 말이라도 했냐? 뭘 잘했다고 인상을 찌푸려. 행여나 질세라 박원호보다 한층 더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고 매섭게 째려봤다. 눈에서 레이저 나올 정도로.

    팽팽한 눈싸움에 먼저 물러선 박원호다. 오예, 이겼다. 언제 인상 썼냐는 듯 나를 아련하게 바라보더니 한숨을 쉰다.

    “농담하는 거 아냐.”

    “나도 농담하는 거 아냐.”

    “장난 아니라고.”

    “나도 장난 아냐.”

    미치겠네, 진짜. 이렇게 온몸과 마음에 진심을 가득 담아서 말하는데, 이게 농담에 장난으로 보이냐? 이 인간, 원래 이렇게 꽉 막힌 인간이었나? 콩깍지가 벗겨져서 이런가, 아니면 유학 갔다 오더니 인간이 이상해진 건가.

    이거나 저거나 상관없다. 어느 쪽이든 이 인간과 나는 이제 완벽하게 남이니까.

    “분명 나는 어제도 말했어. 다시는 그쪽이랑 얼굴 마주하고 싶지도 않고, 다시 시작하지도 않을 거라고. 유학 생활 동안 내 생각 많이 하셨다면서요? 그럼 내가 어떤 인간인지 잘 알 거 아냐. 난 한 번 아닌 건 끝까지 아니야.”

    “이소야, 제발. 나한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어.”

    “아, 그러니까 그 사정 듣고 싶지 않다고요. 제발 나 좀 그만 귀찮게 하라고!”

    참다못해 카페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장담하는데 내일 내 목소리에 할아버지께서 빙의할 거다. 새벽 내내 꺼이꺼이 울고, 그것도 모자라 점심시간에는 익룡 빙의해서 선아랑 맞다이까고, 하다 하다 카페 내 고성방가까지.

    조금만 더 하면 득음할 것 같다. 아, 목 아파. 이따 편의점에서 목캔디 사 먹어야지.

    그래도 이렇게 단호박 수백 개 삶아 먹은 듯 단호하게 말했으니, 이쯤 되면 내가 자기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깨닫고 물러나겠지. 목을 잠시 가다듬은 뒤, 박원호를 힐끔 쳐다봤다. 그리고 내가 한참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단박에 깨달았다.

    박원호의 눈빛이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다고 말해주고 있으니까.

    “들어. 아니, 들어줘. 제발.”

    미친, 방금 나한테 명령조로 씨불인 거 맞지?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하도 황당해서 입 벌린 채로 가만히 있으니까, 내가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이러는 줄 아는지 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내가… 유학 생활 동안 연락 못 했던 건 어머니 때문이었어.”

    세상에나, 저상에나. 나왔어요. 마마보이 같은 사연! 저런 인간을 좋아했던 과거의 내가 진심으로 혐오스러워질 것 같다.

    와, 진짜 권이소. 남자 보는 눈 더럽게 없네! 대체 저런 인간이 잠수 탄 것 가지고 그렇게 반 폐인처럼 살았냐? 지금의 나였다면 거리로 나가서 자진모리장단에 맞춰 봉산탈춤을 ‘얼씨구나’ 하고 췄겠다!

    “어머니께서 하도 너랑 교제하는 걸 반대하시니까 협상을 했었어. 일단은 유학 생활에 매진하고, 끝나서도 너를 못 잊을 것 같으면, 그때 교제든 결혼이든 허락해주신다고.”

    “하하. 하하하하하.”

    “정말 요 몇 년 동안 필사적으로 매달렸어. 하루빨리 배울 거 배워서, 너한테 다시 돌아오려고. 그래서 이렇게 왔는데, 대체 넌…”

    하, 하하. 하하하하하하. 이제는 아예 대놓고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구네. 치가 떨린다, 진짜. 아주 진절머리가 나. 박원호의 ‘ㅂ’자만 들어도 경기가 일어나겠다.

    “저기요, 제가 무슨 조선 시대 열녀를 꿈꾸는 춘향인 줄 착각하시나 본데요. 저 21세기에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고요. 내가 왜 그쪽을 기다려야 했는데요.”

    “…이소야.”

    “아니, 뭐 그때는 사랑했으니까 오빠 말대로 기다렸을 수도 있어. 오빠가 사실대로 말만 했었더라면. 근데 나한테는 한마디 언질도 없이 오빠가 엄마랑 멋대로 정한 거잖아. 왜 두 사람이 정한 일에 내가 피해를 봐야 하고, 나를 못된 년인 것처럼 말하는데?”

    “너라면, 말하지 않아도 기다려 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만큼 믿었고, 사랑했으니까…!”

    와, 이게 말이야 방귀야. 유학 가서 입으로 방귀 뀌는 법을 배워오셨나. 이쯤 되니까 도란이를 짝사랑하게 된 게 오히려 고마워질 지경이다. 이 인간이 이 정도로 제정신 아닌 인간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네.

    마음고생의 대가로 똥차를 영원히 떨어트릴 수 있게 됐으니 어떻게 보면 다행이네.

    “아아, 유감스럽게도 제가 미처 독심술을 익히지 못했네요. 아이고, 다 제 탓입니다. 제가 마법 학교라도 가서 독심술을 연마했어야 하는 건데. 배우는 김에 텔레파시도 터득하고, 그렇죠?”

    “꼭 그렇게 비꼬면서 말해야겠어?”

    “아까부터 다시 시작하기 싫다고 직설적으로 귓가에 때려 박았는데도 흘려들은 건 오빠잖아. 그렇게 원하면 또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줄게. 오빠랑 다시 시작 안 해. 나 이제 오빠 안 좋아하고, 다신 보기 싫어.”

    “이소야! …너 진짜 왜, 왜 그렇게 잔인해진 거야.”

    내가 살면서 사람의 눈물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적이 있던가. 도란이가 울었을 때는 내 가슴이 쓰릴 정도로 동요했었는데, 저 인간이 우는 건 아무렇지도 않다.

    아니,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네.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서 콧방귀가 나오고 있으니까.

    박원호가 테이블에 눈물로 한강을 연성하든 말든 꿋꿋하게 가방을 싸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네네, 저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년입니다. 울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세요. 다신 보는 일 없길 바랍니다. 그긋드 으즈므니.”

    끝부분에는 열이 받쳐서 이를 부드득 갈면서 말했다. 이렇게까지 말했으니까 알아듣겠지. 못 알아들으면 진짜 경찰서에 신고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며 다혜네 집에 가려고 택시를 잡으려는데, 내 팔을 붙잡는 박원호다.

    아무래도 이 찰거머리 떼어낼 방법을 진지하게 연구해야겠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내가 앞으로 잘할게. 진짜 잘할게. 그러니까 제발 나한테 한 번만 기회를 줘.”

    “내가 오빠한테 마지막으로 주는 기회는 이거야. 더는 더러운 기억으로 남지 않게 내 앞에서 영원히 쿨내나게 꺼져주는 거.”

    내 말에 입술을 질끈 깨무는 박원호다. 하, 예전에는 마냥 착해 보이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독기가 잔뜩 오른, 그야말로 소름 끼치는 얼굴이다. 진짜 오만 정이 다 떨어지네.

    박원호가 내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놓더니 앞머리를 쓸어 올린다. 이대로 또 튀어야지. 그렇게 생각한 나를 멈추게 한 건 박원호의 한마디였다.

    “어제 집 앞에서 봤던 그 새끼 때문에 그래? 그 새끼가 너 꼬시기라도 했어?”

    그대로 눈이 돌아간 나는 처음으로 박원호의 뺨을 후려쳤다.

    봐 주는 거 없이 전력으로 패서 그런지, 맥없이 바닥에 쓰러지는 박원호다. 가만히 참고 있으니까 내가 가마니로 보이나. 깽값 물고 폭행죄로 빨간 줄 그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이 인간, 내가 조져놓을 거야.

    “…함부로 그 새끼라고 말하지 마. 오빠가 뭔데 란이한테 이 새끼 그 새끼 거리는데.”

    “진짜 맞나보네. 근데 걔는 너 친구라고만 생각하던데.”

    “….”

    “너 짝사랑 같은 거 못하는 성격이잖아. 괜히 마음고생 하지 말고, 그냥 나한테 와.”

    와, 진짜. 제대로 빡쳐서 머리로 열이 치솟는다. 자기가 뭔데 나한테 오라 마라야. 그것보다 더 열 받는 건, 저 인간이 하는 말 중에 일부는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거.

    …그쪽이 뭔데, 내 아픈 곳 후벼 파는데. 나도 걔가 나 친구로만 보는 거 뼈저리게 알거든?

    “…야, 진짜 꺼져. 나한테 죽기 싫으면.”

    “누나!”

    “…엥? 권이혁?”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놀라서 입이 떡하니 벌려졌다. 당황한 건 박원호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도 그렇겠지. 작은 고추가 맵다고, 내 동생이 쪼끄만 땅꼬마인 것과 달리, 얼마나 강한지 자기도 잘 아니까.

    …전투력에 능력치가 모조리 쏠린 탓에 머리가 청순하지만.

    이혁이는 우리 쪽으로 달려오더니, 나를 자기 뒤에 숨기고는 박원호를 보며 으르렁댄다. 큭, 28년 동안 살면서 처음으로 동생 새끼 둔 보람을 느낀다.

    “뭐야, 우리 누나한테 집적대지 말고 꺼져.”

    “…또 보네, 처남. 오늘은 이만 갈게. 다음에 보자.”

    “처남 좋아하시네! 다음에 보긴 뭘 봐! 한 번만 더 우리 누나한테 집적대면 뼈도 못 추릴 줄 알아!”

    …하. 진짜 지친다. 이번엔 다른 이유로 타임머신 제작하고 싶네. 저 인간이랑 만나지 않기 위해서. 그대로 맥이 빠져서 비틀거리자 이혁이가 놀라서 나를 부축한다. …짜식. 남자 다 됐네.

    “땡큐, 오늘은 누나가 고기반찬 쏜다.”

    “아싸! 진짜지?”

    이혁이가 얼마나 대식가인지 잘 알기는 하지만, 오늘은 무척이나 고마워서 특별히 한우로 사줘야겠다. 근래 들어 식비가 굳었으니 돈도 여유롭고. 그렇게 생각한 나는 오늘만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동생, 이혁이를 이끌고 고깃집으로 갔다.

    ============================ 작품 후기 ============================

    이루네님// 서울시내 구경하게 4연참 달려야겠어요. /ㅅ/

    soae님// 뺨 한대 올려붙였습니다... 부족하죠?

    샤냥꾼님// 독자님들 멘탈이 더 걱정됩니다 ㅜ_ㅜ...

    nenotokn님// 헉, 재밌다고 해주셔서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ㅅ/

    명색이 남자주인공인데 분량이 공기화 되어가는 도란이(...)

    최근 분량으로만 보면 박원호 씨가 남주인줄...

    이혁이의 하드캐리 /ㅅ/ 뭐니뭐니해도 가족이 최고죠.

    저 오늘 4연참갑니다 '-^ 밤에 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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