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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54화 (54/97)

00054 51. 짝사랑 이제 안 해. =========================

오피스텔 건물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야말로 정신없이 달렸다. 뒤를 돌아보니 다행히 쫓아오지 않은 듯 보인다.

이쯤이면 됐겠지. 열대야에 뛰려니까 죽을 것 같다. 도란이 팔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땀을 닦았다. 그 순간, 뒤에서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뒤로 돌아보니 도란이가 고개 숙인 채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아있다.

…아 맞다. 얘 은근히 운동 체력 꽝이지.

“란아! 괜찮아?”

“…죽을 것… 같…”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금방 물 사 올게!”

근처에 있는 편의점으로 후다닥 뛰어가 생수 두 병을 사 왔다. 매우 힘든지 아직도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도란이다. 더울 때는 덥다고 안 뛰고, 추울 때는 춥다고 안 뛰는 애를 고생시킨 것 같아 좀 미안하다.

아무래도 페트병 뚜껑 딸 기력도 없는지 뚜껑을 쥐다 말고 도로 놓아버린다. 재빨리 내 손에 들려있는 페트병 뚜껑을 따서 도란이에게 건넸다.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그대로 자기 머리에 부어버리는 도란이다.

…어지간히도 더웠구나.

잠시 숨을 고른 도란이가 앞머리를 젖히면서 나를 째려본다. 미치겠네. 왜 물에 젖은 모습도 섹시하고 난리야. 자꾸 쳐다보게 되는 바람에 시선을 못 피하잖아.

“…무슨 헨젤과 그레텔도 아니고, 갑자기 왜 팝콘을 유료스킨 결제한 것처럼 휘날리면서 달려야 하는 건데.”

“풋, 아니, …죄, 죄송합니다. 많이 힘들어?”

“힘들다 뿐이야? 한여름에 뛴다고 죽는 줄 알았거든? 그보다 아까 그 남자 누구야? 아무리 생각해도 초면은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히 떠오르는 대답이 없어 말문이 턱 막힌다. 몇 년 전에 일방적으로 연락 끊고 잠수 탄 개자식이라고 사실대로 말할까. 아니면, 이 동네 정신 나간 미친놈이라고 뻥을 쳐야 할까.

둘 중 어떻게 말하는 게 나을지 머리를 팽팽 굴려도 모르겠다. 일단 오해하지 않도록 해명부터 하자.

“…혹시나 괜한 오해 할까 봐 말하는데, 나 아까 그 남자랑 아무 사이 아니다? 자기 멋대로 남자친구니 뭐니 씨불인 거지. 난 그 사람한테 요만큼도 감정 없어.”

“누가 그거 물었어? 아까 네 반응 보면 충분히 알고도 남으니까 누군지나 말해.”

이런 건 말하지 않아도 잘 아는 양반이, 왜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건 요만큼도 눈치를 못 채냐. 갑자기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답답해져서 한숨이 나온다.

“…전 남친.”

“아, 혹시 그때 그?”

“…응.”

박원호와 사귀었을 때는 나와 거의 어울리지 않아, 박원호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 도란이지만, 내가 박원호와 헤어지고 나서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는 잘 안다. 우리 부모님이 나를 챙겨달라고 부탁했는지, 어느 순간부터 실연당해 힘들어하고 있던 내 옆에 있었으니까.

내 이야기를 듣더니 생각에 잠긴 도란이다. 도란이 답지 않게 진지해 보이는 모습에 괜히 마른침이 꿀꺽 삼켜진다.

“언제부터 연락이 다시 닿았는데? 설마 그동안 계속 그 남자가 쫓아다닌 거야?”

“…어? 아, 아냐. 오늘 처음 봤어.”

“우연히?”

“아니, …선아한테 물었대. 나 어디 가면 볼 수 있냐고.”

한숨을 쉬더니 미간을 찌푸리는 도란이다. 나를 걱정하는 도란이의 반응이 좋으면서도 싫다. 친구라서 걱정하고 있는 걸 잘 아니까. 이럴 때는 친한 친구인 게 싫다. 차라리 남이었으면, 나를 생각해주는 반응에 설렐 일이 없었을 텐데. 괜히 기대하지 않아도 될 텐데.

“무슨 일 생길지도 모르니까 부모님한테라도 알리지그래?”

“아니, 됐어. 내가 애도 아니고. 무엇보다 우리 엄마·아빠, 그 인간 보면 당장에라도 죽이려고 할걸.”

“그건 그러네. 그럼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라도 연락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어?”

도란이의 말에 괜히 울컥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내 분노의 화살이 갑자기 자신에게 겨눠지니까 당황한 듯 도란이 눈이 동그래졌다. 평소 같으면 왜 애꿎은 애한테 화를 내냐며 스스로 멈췄겠지만, 지금은 도저히 못 그러겠다.

나도 지쳤어. 매번 너한테 기대하는 내가 싫어. 기약 없는 짝사랑도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왜 내가 무슨 일 생기면 너한테 연락해야 하냐고.”

“갑자기 왜 화를 내고 그래? 위험한 일 생기면 주변 사람한테 연락하는 게 당연한 거잖아.”

“그러니까 왜 하필 너한테 연락해야 하냐고. 네가 왜 내 연락을 받으려고 하는데.”

“네가 부모님께 알리기는 싫다며. 그리고 나도 네가 걱정되니까…”

“네가 왜 날 걱정해? 대체 왜?”

도란이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신경질적으로 물기 젖은 자기 머리를 턴다. 도란이 입에서 나오는 한숨이 내 가슴을 후벼 판다. 잠시 눈을 감은 채로 이마를 짚더니, 나를 올려다보며 입을 여는 도란이다.

“친구니까 당연하잖아.”

확인사살. 내가 비참해질 정도로 일말의 고민 없는 대답. 남루할 정도로 후벼 파진 가슴에 누군가가 소금이라도 뿌렸나 보다. 너무 쓰라리고 아파서 괴롭다. 악의 없고, 당연한 사실이지만, 내게는 세상 무엇보다 잔인하게 느껴진다.

친구라서 걱정한다는 말이.

싫다. 이젠 진짜 싫다. 내 마음을 요만큼도 눈치 못 채는 도란이도 싫고, 기약 없는 짝사랑만 반복하는 것도 싫고, 혹시나 하고 순간적으로 기대했던 내가 싫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좋아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내가 너무나도 싫다.

안 해. 더럽고 치사해서, 거지 같아서 안 해. 짝사랑 같은 거 더는 안 할 거야. 이러다 나까지 혐오하게 될 것 같아. 네가 그렇게 날 친구로밖에 안 보니까, 나도 어떻게든 친구로 돌아가 줄게. 더는 마음고생 하기 싫어.

너 잃을까 봐 노심초사하기도 싫고, 널 볼 때마다 아파하는 것도 싫어.

“…네 걱정 필요 없으니까 하지 마.”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어떻게 안 해. 하나뿐인 소꿉친…”

“그만!”

불난 데 부채질하고, 상처에 연고 대신 염산 뿌리냐? 친구라는 소리 더 들었다간 멘탈이고 뭐고 다 망가질 것 같으니까 제발 그만 하라고.

네가 나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무 잘 아니까 더는 확인 사살하지 말란 말이야. 잔인한 새끼야.

어떻게든 참으려고 했는데 눈물이 자꾸만 나온다. 가로등 조명 아래에서도 내 눈물이 보이는지 도란이가 놀라서 일어났다. 나한테 다가와 눈물을 닦아주려고 하는 도란이의 손을 쳐냈다.

…제발 다정하게 대하지 마. 네 다정함도 나한테는 상처만 안길 뿐이니까.

“됐어. 내 일에 신경 꺼. 내가 알아서 해. 우리 부모님한테 말하지나 마. 그게 도와주는 거니까.”

“…권이소.”

“경고하는데, 더는 내 일에 상관하지 마. …박원호보다 네가 더 나빠. 이 새끼야.”

그대로 등을 돌려 도망치다시피 도란이와 멀어졌다. …어떻게 잡지도 않냐. 진짜 못돼먹은 새끼. 하하, 진짜 미치겠네. 짝사랑 그만하겠다고 생각한 주제에, 왜 또 멋대로 기대하고 난리야.

뼈저리게 깨달았잖아. 도란이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만해, 그만하자. 이소야.

계속 바보 같은 짝사랑 이어가면, 너만 힘들고, 지치고, 아플 뿐이야. 오늘처럼 나를 미워하고, 애꿎은 도란이를 미워하게 될 거라고. 그러니까 그만하자.

…소중한 친구 잃기 싫으니까, 여기까지만 하자.

시계를 보니 벌써 자정이 훌쩍 넘었다. 열 받아서 선아한테 화풀이하려고 했는데 그러지도 못하겠다. 자고 일어나서 연락해야지. …그런데 나 어디서 자지? 오피스텔 앞에 박원호가 기다리고 있기라도 할까 봐 집에는 못 들어가겠는데.

찜질방에서라도 자야 하나. 아니면, 피시방? 출근해야 하는데 이게 뭐야.

한참을 고민하다 다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내일은 비번인지, 아직 자고 있지 않는 다혜다. 자초지종을 간략히 말하자, 다혜가 잔뜩 놀라며 자기 집으로 오라고 말한다.

그러다 이내 자기가 데리러 갈 테니 위치가 어디쯤인지 묻는 다혜다. 이러니까 내가 예뻐할 수밖에 없지. 자기 일처럼 걱정해주는 둘도 없는 착한 동생이니까.

…그리고 도란이도 자기 일처럼 걱정해주는 둘도 없는 착한 친구지.

그렇게 생각하자, 이제. 짝사랑 접기로 했으니까 친구라고만 생각하자. 그런데 왜 이렇게 심장이 아프지? 왜 자꾸 눈물이 나오지? 왜 자꾸 도란이가 보고 싶어지냐고.

다혜와 전화하고 있다는 사실도 깜빡 잊고 서럽게 오열했다. 갑자기 내가 울자, 다혜가 놀라서는 내 위치를 다급하게 물었다. 꺼이꺼이 울면서 말했는데도 어떻게 알아들은 건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앞에 나타난 다혜다.

다혜를 보니 괜스레 더 서러워져 울고, 또 울었다. 그동안 거지 같은 짝사랑 때문에 마음고생 한 걸 실컷 퍼붓듯, 눈물은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빗자루계인님// 이소가 짝사랑을 접으려고 합니다! 이소를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

soae님// 끊는 것도 멋대로, 다시 시작하는 것도 멋대로. 이기적인 남자입니다.

샤냥꾼님// 어떡하죠. 이소가 포기선언했는데 ;ㅅ;

이루네님// ㅋㅋㅋㅋ 남자다운 매력보다는 사랑스러움으로 승부하는 도란입니다. 재밌게 봐 주셔서 감사해요 /ㅅ/ 즐거운 금요일 자주 봐요!

천사같은 독자님들 제게 꿀과 같은 휴식을 윤허해주시다니 /ㅅ/

(사실 옆집 늑대때문에 쉬지는 못했다고 한다. (주륵))

차칸 독자님들을 위해 금요일 스페셜 연참갑니다. '-^

헉, 그러고보니 저 연참 처음인 것 같아요 /ㅅ/ 떨려.

몇 연참 갈까요? (두근두근) 일단 점심 때, 또 봐요 우리♡ X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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