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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53화 (53/97)
  • 00053 50. 여덟수라도 있는 걸까. =========================

    …하, 하하하. 뭐냐, 이 거지 같은 상황.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상태라 헛것이 보이나 했는데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봐도 박원호 맞다.

    요 몇 주간 멘탈이 탈탈 털린 거로는 부족했나보다. 와, 진짜 어이없어.

    그래, 뭐. 평생 외국에서 유학 생활 하는 건 아니니까 한국에 다시 올 수도 있어. 그런데, 대체 무슨 낯짝으로 나한테 아는 체하는 건데? 유학 간 이후에 일방적으로 연락 끊고 잠수 탄 주제에.

    그것도 나를 아주 보고 싶었다는 듯한 눈빛을 하고서.

    사람 면전에 대고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어이가 없어서 자꾸만 실성한 듯 웃음이 튀어나온다. 꽃만 달면 이 동네 미친년인 줄 알겠어요. 안 그래도 빡치니까 날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지 마세요, 이 자식아. 소름 끼쳐.

    “뭐야? 여태 연락도 없으시길래 먼 나라로 유학 떠나셔서 무슨 큰일이라도 겪으신 줄 알았는데, 살아는 있었네?”

    “…이소야.”

    “기분 더러우니까 그 입으로 내 이름 부르지 마.”

    가시 돋친 내 말에 상처받은 얼굴을 하는 박원호다. 미친, 진짜 기가 차네. 누가 보면 내가 매정하게 까고 있는 줄 알겠어요. 착해 보이는 얼굴로 피해자 코스프레 하지 마. 일방적으로 연락 끊고 잠수 탄 게 누군데 상처받고 난리야.

    아니, 저 인간이 상처받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지. 이왕 받는 거 내 얼굴은 쳐다도 보기 싫을 정도로 받으시고 제 인생에서 부디 꺼져주세요.

    “…많이 달라졌네. 머리도 많이 길었고, 옷차림도 여성스러워지고. 순간 못 알아볼 뻔했어.”

    “못 알아보실 뻔하시지 말고, 그냥 못 알아보시지 그러셨어요. 제 스타일 품평은 그만하시고 갈 길 가세요. 다시는 아는 체하지 마시고요.”

    “이소야. 나랑 잠깐만 얘기하자.”

    유학 가서 배우라는 요리는 안 배우고 뻔뻔함만 배워왔냐? 이렇게 까대는데도 꿋꿋하게 나한테 다가온다. 한 방 먹이고 기절시켜 버릴까. 그나저나 우리 집 앞으로는 왜 쏘다니는 거야? 재수가 없으려니까.

    내가 자기를 벌레 보듯 쳐다보고 있는데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코앞까지 다가온 박원호가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는다. 이 인간이 진짜 죽고 싶어 환장했나.

    “미친, 이거 안 놔? 놔. 나한테 먼지 나게 처맞기 싫으면.”

    “…보고 싶었어.”

    나 지금 누구랑 대화하니? 내 손 놓으라니까 갑자기 왜 나를 보고 싶었다는 얘기를 씨불이는 거야. 유학 갔다 오시더니 국어 능력이 퇴화하셨어요? 내가 지금 놓으라고 말하잖아.

    내가 째려보고 으르렁대도 놓을 기미가 없자, 힘을 줘서 억지로 뺐다. 아파죽겠네.

    “아, 예. 저는 그쪽 얼굴 쳐다도 보기 싫으니까요. 가시던 길 마저 가세요. 다신 보는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내가 가려고 했던 곳은 너희 집 앞인데, 그럼 거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거니?”

    “뭐?”

    와, 미친.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이쪽으로 우연히 온 게 아니었다고? 아니, 대체 내가 자취하고 있는 오피스텔은 어떻게 알아낸 거야. 한국 오자마자 내 신상이라도 조회하셨나? 무슨 스토커세요?

    주먹을 꽉 쥐고 티 나지 않게 경계태세를 유지했다. 일단 이 인간이 어떻게 내가 사는 위치를 알아냈는지 물어보자. 대답이 주옥같으면 명치를 세게 후려쳐서 기절시킨 다음, 포돌이한테 신고해야지.

    “내가 이 근처 사는지 어떻게 안 건데. 아니, 그전에 이미 끝난 사이에 왜 전 여친 현 거주지는 알아내시고 그러세요.”

    “…선아한테 물어봤어. 너랑 만나서 할 얘기가 있다고.”

    이선아. 너 다음에 만나면 나한테 죽을 줄 알아라. 감히 내 허락도 없이 신상정보를 함부로 유포해? 그것도 이 인간한테? 가뜩이나 심란해서 미치겠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꼴 보기 싫은 인간까지 마주하게 됐잖아.

    내 인생 요즘 왜 이러지? 아홉수야 익히 들어왔지만, 여덟수도 있나? 내 나이가 28이라서 이십팔 같은 상황만 일어나고 있는 건가? 입에서 이십팔 소리가 저절로 나오네.

    “진짜 어이가 없네. 알려달라고 순순히 알려주는 선아 년도 노답이긴 한데, 그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건 오빠인 거 알지? 일방적으로 연락 끊고 잠적하신 주제에 인제 와서 나랑 무슨 할 얘기가 있는데.”

    “…미안. 나한테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어.”

    “아, 예. 그러시겠죠. 그 사정 굳이 듣고 싶지 않으니까 그대로 뒤돌아 꺼져주세요.”

    “이소야, 제발. 우리 다시 시작하자.”

    하, 하하, 하하하하하하하. 방금 이 인간이 내뱉은 말, 안 들은 귀 삽니다. 이 인간 안 본 눈 삽니다. 이 인간에게서 나에 대한 기억만 소거시킬 수 있는 쿠폰 삽니다. 진짜 이십팔 같은 인간이네. 하도 기가 차니까 이젠 웃음도 안 나온다.

    넋이 나간 채 눈앞에 있는 남자만 기가 찬다는 듯 쳐다봤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 누구보다 간절한 얼굴로 나를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유학 생활 동안 내 생각을 얼마만큼 했는지 구질구질하게 늘어놓는 박원호다.

    그렇게 애타게 나를 사랑하셨던 분께서 왜 연락을 끊으셨어요. 내가 얼마나 힘들어했었는데.

    그쪽에 대한 감정을 완전히 비우기 전에, 내가 도란이를 좋아하기 전에 나타나 줬으면 내가 지금 이렇게 아파할 일도 없잖아. 도란이랑 멀어질 일도 없잖아.

    …적어도 친구 관계까지 잃게 될까 봐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만, 더 듣고 싶지 않아. 우린 이미 오래전에 끝났어. 그리고 끝을 맺게 만든 건 오빠고. 난 이제 그쪽한테 전혀 관심 없거든? 솔직히 말하면 꼴도 보기 싫어.”

    “…이소야. 우리 누구보다 사랑했잖아. 누구보다 행복했잖아. 제발 그때로 돌아가자, 응?”

    뻔뻔하기도 정도가 있지, 내가 무슨 콘솔 게임이냐? 그쪽이 기억하는 대로 저장해뒀다가 그쪽이 원하면 다시 돌아가게? 마지막으로 말해도 안 되면 그냥 기절할 정도로 한 대 패자. 그다음, 스토커로 고소미를 먹이든지, 이사를 하든지 해야지.

    “나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하는 거 알지. 싫다고, 꺼지라고!”

    “…이소야.”

    “와, 이게 무슨 상황이래.”

    박원호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세차게 두근대는 심장, 언제 인상이 구겨졌냐는 듯 씰룩 올라가 있는 입꼬리. 도란이가 박원호 뒤에 서서 우리를 빤히 보고 있다.

    …한 손에는 영화관 팝콘을 들고 먹으면서. 너 지금 무슨 영화 감상하냐?

    “싸우는 소리가 들리길래 구경하려고 왔는데 아는 얼굴이네. 안녕.”

    “…어, 안녕.”

    갑작스러운 도란이의 등장에 놀란 건 박원호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놀라기도 놀란 건데, 대놓고 구경하러 왔다는 도란이의 말에 어이가 실종한 눈치다. 아니, 얘가 엉뚱하긴 해도 그쪽보다 어이없는 인간은 아니에요. 그쪽이 뭔데 란이를 그런 눈으로 보고 난리야.

    “…근데 그 팝콘은 웬 거야?”

    “성준이랑 새로 나온 거미맨 영화 보고 왔거든. 먹을래? 캐러멜 팝콘인데.”

    “아, …땡큐.”

    자기 앞에 서 있는 박원호를 가뿐히 무시하고, 내 앞으로 와서 팝콘을 내미는 도란이다. …역시 개썅 마이웨이이자 초절정 마이페이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모르는 사람한테는 요만큼도 관심이 없구나.

    도란이에게서 팝콘을 받아들고는 한 조각 집어 입에 넣었다. …달콤하니 맛있네. 아니, 잠깐만. 나 왜 싸우다 말고 팝콘을 집어 먹고 있지.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가면 갈수록 도란이화 되어가는 것 같다.

    일단 저 인간부터 떼어내고 팝콘을 뜯든 콜라를 곁들이든 해야지.

    팝콘을 도란이한테 건네려는데, 갑자기 내 허리를 한쪽 팔로 감더니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도란이다. …엄마야, 깜짝이야. 이거 완전 백허그잖아. 오랜만에 도란이랑 닿았는데 그게 도란이 쪽에서 먼저 한 백허그라니.

    해, 행복해. 날아갈 것 같아. 엄마, 나 오늘 계 탔어!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감사합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내 바람과 달리, 내 허리를 감싸고 있는 팔은 금세 풀어졌다. 젠장. 대신 내 양쪽 어깨에 손을 올려, 나를 자기 앞에 세우더니 내 뒤에 숨는 도란이다.

    “얍, 권이소 방어막. 형씨는 누구신데, 얘랑 동네 시끄러울 정도로 치정극 찍고 계시는 거예요?”

    “…그러는 그쪽은 누구길래 이소한테 붙어있습니까.”

    “지나가던 동네 사람이자, 권이소 친구인데요.”

    …친구. 하아, 그래. 친구지. 근데 왜 내 입에서는 자꾸 한숨이 튀어나오냐. 혹시라도 남자친구라거나, 썸타는 사이라거나, 그런 말이 도란이 입에서 나오길 기대한 내가 바보 천치다.

    앞에 있는 박원호가 똥 씹은 얼굴이든 말든 장난스러운 말투로 응대하는 도란이다.

    “어쨌든 형씨, 이소 그만 귀찮게 하세요. 자꾸 이소 신경 건드리면, 얘한테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아요. 얘 주먹이 얼마나 아픈데.”

    이따금 느끼는 건데, 란이 넌 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 일전에 이혁이 앞에서도 ‘네 누나, 폭력 고릴라 아니야’라며 나를 옹호하다 말고 이혁이 의견에 동요하더니!

    근데 내 주먹이 웬만한 남자보다 센 건 사실이라 뭐라 반박하지도 못하겠다, 젠장.

    어떻게 하면 도란이한테 나약하고 보호 본능 일으킬 것 같은 이미지로 새겨질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박원호가 내 팔을 붙잡고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내가 무슨 물건이냐?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게?

    그보다 오랜만에 란이랑 살이 맞닿고 있는데 왜 멋대로 떼고 지랄이야!

    “어, 방어막 뺏겼다.”

    “그쪽이 신경 쓸 일 아니니까 가던 길 마저 가시죠.”

    “신경 쓸 일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할 문제고. 아까도 물었지만, 그쪽이야말로 대체 누구예요? 어디서 본 거 같긴 한데.”

    도란이의 말에 흠칫했다. 끽해야 한 번 소개해줬고, 둘이서 마주친 적도 별로 없는데 박원호를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하고 있는 것에 놀라서. 낯선 사람에 대한 관심이 요만큼도 없는 도란이다.

    …그런 애가 내 남친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 어쩐지 기분이 묘하다.

    잠깐만, 도란이가 이 인간이 누군지 떠올리면 어쩌지? 이 인간에 대해 떠올리고는 우리 가족한테 얘기라도 한다면….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온몸에 핏기가 가셨다.

    나를 야생동물 키우듯 험하게 대하는 우리 가족이지만, ‘까도 내가 까’라는 정신이 투철해서인지, 내가 남에게 험한 대접받는 건 절대 참지 못한다. 박원호가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고 잠수 탄 이후, 내가 몇 달간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잘 아는 우리 가족은 ‘박원호’라면 그야말로 치를 떤다.

    아빠는 “내 딸 눈에 피눈물 나게 한 새끼 내가 죽여 놓을 거다.”라며 마주치는 순간, 그 인간 그날로 제사 치르는 거라고 내게 엄포를 놓으셨다. 제 누나 귀한 줄 모르는 이혁이 역시, ‘전 남친’ 얘기만 나오면 부득부득 이를 간다.

    우리 집 최강 실세인 엄마는 두말할 것도 없고.

    가만히 있어도 치를 떠는데, 내 앞에 찾아와서 다시 시작하자는 헛소리를 했다는 걸, 우리 가족이 알게 된다면 …우리 집 식구 죄다 빨간 줄 그어질지도 몰라.

    망했네. 이거 가만히 구경하고 있을 일이 아니잖아.

    목숨 부지하고 싶으면, 제발 란이 앞에서 헛소리하지 말고 조용히 사라져라. 내 간절한 바람에도 도란이 이상으로 넌씨눈인 이 인간은 금기 발언을 당당하게 꺼냈다.

    “권이소 남자친구입니다. 그러니까 더는 끼어들지 마시죠.”

    남자친구 좋아하시네! 앞에 ‘전’ 안 붙이냐, 이 새끼야? 기가 차는 뻔뻔한 발언에 그나마 유지하던 이성이 날아갔다. 도란이 역시,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것도 잠시, 이윽고 뭔가 알아챈 듯 눈을 크게 뜨는 도란이다.

    “잠깐만. 그쪽…”

    도란이가 무언가 확인하려는 듯 조금씩 이쪽으로 다가왔다. 점점 다가오는 도란이를 보고 잔뜩 멘붕한 나는 별의별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안 돼. 행여나 박원호를 알아보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우리 가족한테 방금 있던 일들을 말한다면. 아니, 뭣보다 란이가 내가 이 인간이랑 다시 시작하는 줄 알고 오해라도 하면 어떻게 해!

    찰나의 순간, 머리를 풀가동해 내가 내린 해결책. 일단은 두 사람을 떼어놓는 게 우선이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도란이의 팔을 잡고 냅다 뛰었다.

    ============================ 작품 후기 ============================

    이루네님// 제가 왔어요 /ㅅ/ 반겨주세요!♡

    빗자루계인님// 어맛 /ㅅ/ 계인님 칭찬에 부끄부끄

    soae님// ㅋㅋㅋㅋㅋㅋㅋ 가상연애라는 게 없어도 연인급 포스를 자랑하는 애들이지만.. 정작 본인들은 그걸 모름 (숙연)

    sn님// ㅋㅋㅋㅋㅋㅋㅋㅋ 도란이가 그러고 있다면 이소는 개이득인 부분? /ㅅ/

    보통 남자들이 여자를 자기 뒤에 숨긴다면,

    란이는 이소를 방패막이로 자기 앞에 세워둡니다.

    근데 이게 더 안전한 게 함정. 이소가 란이보다 강하니까요 (...)

    다음 연재는 금요일입니다. 이번에는 진짜로 금요일에 올 거야.

    목요일에 오라고 부추기셔도 금요일에 올 거라구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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