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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52화 (52/97)

00052 49. 변하지 않은 듯 변해버린 =========================

가상연애가 끝난 지 어느덧 3주가 넘어가고 있다. 사흘 정도는 완전히 멘탈이 나갔던 것 같다.

가상연애가 끝나서라기보다는 도란이가 나한테 선을 그었다는 것에 충격받아서. 살면서 한 번도 당한 적 없고, 당할 줄도 몰랐던 일이 일어나니 마른하늘에 날벼락, 아니, 차라리 날벼락이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솔직히 가상연애가 끝나건 말건 상관없다. 내가 원하는 연애는 가짜가 아니라 진짜 연애니까. 그 가능성이 박살 나버린 지금은, 너무나 상관있게 되어버려 유감이긴 하지만.

사흘 동안 산송장처럼 살던 나는 서서히 마음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말이 가상연애였지, 친구일 때와 크게 차이는 없었으니 괜찮지 않겠느냐고. 달라져 봤자 스킨십할 수 있는 핑계가 사라졌다뿐이지, 나머지는 큰 변화가 없을 거라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가상연애를 했다고 해서 오글거리는 말을 주고받았던 적도 없고, 특별한 데이트를 했던 것도 몇 번 되지 않고, 대형 사고를 쳤던 그 날을 제외하고는 친구일 때도 이따금 하던 스킨십만 해왔던 우리다.

그래서인지 가상연애가 끝난 이후, 달라진 점에 대해서 당장에 체감하는 건 없었다.

통화하는 빈도가 줄었다뿐이지, 도란이는 매일 연락을 해왔다. 밥은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같은 짧은 안부 인사뿐이지만. 그래도 내가 통화를 길게 끈다고 해서 끊는 법은 없었다.

만나서 얘기를 나눌 때도 큰 변화는 없었다.

아저씨가 돌아오셨지만, 여전히 부자 관계가 소원한 상태라 도란이의 텐션이 낮다는 것 빼고는. 언제나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딱히 어색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연애와 관련한 대화들은 피해가는 게 느껴지긴 하지만.

아저씨 재혼 때문인지, 너는 그저 친구일 뿐이라고 선을 긋는 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도란이가 나를 피하지도 않았다. 내가 약속을 잡으면 불편해한다거나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거절한다거나 그러지는 않는다. 어쩌다 마주칠 때도 시선을 피한다거나 난처한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내가 건드리면 움찔거리며 몸을 피한다. 보통 때 같으면, ‘내가 무슨 혐오물질이냐’라고 하며 씩씩댔겠지만, 지은 죄가 있어 그러지도 못하는 나다.

이 정도면 그래도 내가 예상한 범위다. 대형 사고를 쳐놓고도 친구 관계는 어찌어찌 유지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변화들은 가상연애가 끝나서 생긴 게 아니라, 내 잘못에 대한 대가이니 내가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즘 들어 절실히 깨닫는 중이다.

가상연애라는, 별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던 게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지.

그리고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히 ‘합법적 스킨십 허용권’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웃기지만, 연애 같지 않은 연애였음에도 나름의 구속력을 지니고 있었다.

상대방의 최우선이 내가 되도록 만드는 구속력이.

가상연애를 했을 때만 해도 나와 어울린다고, 성준이를 제외한 다른 친구들과는 약속을 잡지 않았던 도란이다. 요 몇 개월 동안 못 만난 친구들을 몰아서 보기라도 하듯, 가상연애가 끝난 이후부터 도란이는 집에 붙어있는 일이 거의 없다.

내가 약속을 잡으려고 하면, 대부분은 선약이 있어서 다음으로 미뤄지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가상연애를 할 때는 내가 보고 싶다고 하면, 언제나 나를 먼저 보러왔던 도란이다. 정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고 나한테 왔었다. 물론 약속이 미뤄져도 며칠 뒤에는 만날 수 있긴 하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다.

다른 지인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버리게 됐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게 되니까.

요새는 성준이보다 뒤로 밀려난 느낌도 든다. 나랑은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날까 말까 하면서 성준이랑은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하고 있으니까. 요즘 도란이가 어울리는 빈도를 보면 성준이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그다음이 이혁이나 사촌 누나 부부, 그다음이 다른 친구들, 그리고 맨 마지막이 나인 것 같다.

이런 상황이 무척이나 불만이지만, 나에게 도란이를 잡아둘 수 있는 카드는 어디에도 없다. 평생을 알고 지낸 소꿉친구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도록 강요하지 못하니까.

가상연애를 했을 때는 그 자체로도 좋은 핑곗거리였지만, 서로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암묵적으로 있었다. 내가 도란이를 좋아하지 않았을 때도, 다른 약속들보다 도란이와의 약속을 우선시했던 건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러지 못한다.

지나치게 많은 약속에 불만을 가져도, 나와 같이 있어 주지 못하는 거에 서운함을 느껴도,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여자 목소리에 의문이 생겨도, 나는 가상연애를 했을 때처럼 내 의견을 피력하지 못한다.

그저 덮어두고, 괴로워할 뿐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니 아무리 나라고 해도 서서히 지쳐가고 있다. 그도 그럴게 28년간 살면서 겪어보지 못했던 일들이 줄줄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솔직히 지치지 않는 게 이상하다.

28년 동안 알고 지낸 소꿉친구를 짝사랑하게 된 것도 모자라, 그 소꿉친구가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선을 긋는 이 거지 같은 상황.

언제나 참지 않고 직설적으로 내뱉었던 내가 묵언 수행이라도 하는 것처럼 의견을 제대로 내뱉지도 못하고,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쿨하게 포기했던 주제에, 아직도 구질구질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이 상황이 스스로가 생각해도 한심하고, 고통스럽다.

술이라도 퍼부어서 잊고 싶지만, 그러지도 못하겠다.

한동안 술은 거들떠보기도 싫으니까. 술 때문에 이런 사달이 벌어졌는데, 또 마시는 건 정신이 나간 거지. 이미 멘탈은 산산이 바스러진 상태지만, 이성은 아직 남아있으니까 그 정도 판단은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도란이가 술 취한 내 모습을 보고, 나를 싫어하게 될까 봐 겁난다. 아주 많이.

네 연애는 끝났다고, 사형선고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인 주제에 나는 아직도 도란이를 신경 쓰고 있다. 도란이의 연락만 기다리고, 우연이라도 마주칠 수 있기를 고대하며 늦게까지 오피스텔 주변을 서성인다.

이러면서 지울 수 있을까, 잊을 수 있을까, 내가… 도란이를 포기할 수 있을까.

도란이의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쓰라릴 정도로 두근대는데, 도란이 말고 다른 남자는 관심도 없게 되어버렸는데, 도란이와 이어질 수 있다면 기꺼이 내 모든 걸 바칠 수 있는데.

하지만, 이런 내 바람이 이뤄지지 않을 거라는 건, 머리로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다.

일전에 다혜가 말했던 게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돈다. 자기 친구가 반년간 대쉬를 했음에도 도란이와 이어지지 못했다는 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좀 반신반의했었다. 설마하니 그렇게나 철벽을 쳤을까.

다혜가 말하는 철벽남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 여자애의 심정이, 다혜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아주 잘 이해된다. ‘철벽을 쳐봤자 얼마나 치겠어?’라고 생각했던 내가 우습게 여겨질 만큼 직접 당해보니 장난이 아니다. 그나마 소꿉친구라고 이 정도지, 생판 남이었으면 난 일주일도 못 버티고 나가떨어졌을 거다.

아니, 차라리 남이었으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한 번도 나에게 거리를 둔 적이 없던 애가 내게 벽을 세우니까 더 미칠 것 같고, 견디기 힘들고, 괴롭고, 하루하루 지쳐간다.

나날이 더해가는 고통이 매일 도란이에게 다가갈 용기를 갉아먹고 있다. 다시 도전해볼 만큼의 용기는 부족하게 되어버린 지 오래다. 도란이를 죽어도 포기 못 한다고 매일 울부짖는 마음이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점점 ‘포기할까?’라는 생각이 자라나고 있다.

포기하면 고통스럽지 않을 거라는 달콤한 유혹을 하면서.

어느덧 저녁 10시. 퇴근은 한 지 오래지만, 혹시라도 집으로 오는 도란이랑 마주칠까 봐, 집에 들어가지 않고 오피스텔 주변을 돌아다니는 나다.

이전 같으면 우리 집에 놀러 오라고 연락을 하거나, 도란이 집에서 기다렸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용기도 나지 않는다. 부담스러워하면 어쩌지? 만일 도란이가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친구 관계까지 끊어버리려 하면 어쩌지?

마음이 지쳐가니까 나답지 않은 괜한 걱정을 자꾸만 하게 된다. 이전 같았으면 잡생각이라고 넘기고도 남았을 텐데, 지금은 그런 걱정에 마음이 동요해버린다.

나아가지 마, 그대로 멈춰서 우연을 기다려, 시간이 약이야, 지나고 나면 잊을 수 있을 거야.

나는 오늘도 머리가 건네는 속삭임에 저항하지 않고 몸을 맡겨버린다. 절대 포기 못 한다고 발악할 기력도 바닥나버렸으니까. 그래, 머리야. 너는 너대로 씨불여라. 나는 이제 모르겠다. 정말 네 말대로 되면 되는 거고, 아니면… 말라죽는 거고.

“…이…소야? …이소 맞지?”

담벼락에 기대 멍하니 한숨만 내뱉고 있다 보니, 누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다행이다. 오늘은 얼굴 볼 수 있겠네. 가슴 아파하면서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건 또 뭐야. 요즘 들어서 내 신체가 제각기 따로 노는 빈도가 늘어가는 것 같다.

그래도 웃는 얼굴로 마주할 수 있겠네. 도란이가 불편해하지는 않겠다. 행여나 힘들어하고 있는 게 티가 날까, 잠시 얼굴을 정돈하고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원호 오빠?”

그리고 내 시선의 끝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나를 바라보고 서 있다.

============================ 작품 후기 ============================

빗자루계인님// 왈칵 8-8.... 후폭풍이 앞으로 계속 될텐데 계인님 굳건히 버티셔야 해여....

violetmoon님// 공략난이도 헬 같은 남자....

샤냥꾼님// 독자 님들도 어려워하고, 자까도 어려워하고(?), 이소도 어려워하는 란이의 마음(...)

soae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소가 가여우니 후회물로 장르 급선회할까요!?

이루네님// 헉, ㅠㅠ. 이렇게나 좋아해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하지만 끝이 다가오고 있어요 8-8

화요일에 등장했습니다!(따란)

오늘은 시리어스~ 시리어스~ 시리어스 노래 부르다 새드엔딩 나는 거 아닐까.

다음 연재는 목요일 :D (이래놓고 수요일에 올지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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