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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51화 (51/97)
  • 00051 48. 가상연애를 종료합니다. =========================

    으, 어제 너무 많이 마셨나. 누가 내 머리가지고 징을 치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댕댕 울린다. 그나저나 나 왜 침대에 누워 자지 않고 내 방바닥에서 자고 있냐. 덕분에 머리도 모자라 온몸이 쑤신다. 그래도 엄청 흡족한 꿈을 꾼 것 같아 기분이 좋긴 하지만.

    대체 그동안 얼마나 참고 있었으면 꿈을 꿔도 무슨 그런 꿈을 꾸냐. 그것도 아주 생생하게.

    꿈이라서 망정이지, 현실이었으면 난 진짜 도란이 얼굴 못 보지. 웃으면서 거실로 나온 순간, 온몸의 핏기가 싹 가셨다. …분홍색 러그에 붉은 얼룩이 져 있는걸 봐 버렸으니까.

    잠시만, 잠시만요? 이거 꿈 아니지? 나 아직 잠이 덜 깼나?

    잡아 뜯을 기세로 볼을 세게 꼬집었다. 아프다, 그것도 아주 많이. 급격히 몰려오는 현실감에 블루 스크린이 뜬 것처럼 동작을 멈춘 나다. 지끈거리는 숙취 속에서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더듬으면 더듬을수록 서서히 떠오른다. 내가 새벽에 도란이한테 저지른 미친 짓이. 점점 선명해지는 기억에 내 머릿속에서는 세 음절이 스쳐 지나갔다.

    …망했다.

    나 진짜 미쳤나 봐. 제정신이냐? 권이소?!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그렇지, 사고를 쳐도 그런 초대형 사고를 치냐! 가뜩이나 멘붕 중인 애한테 뭔 짓을 한 거야. 나 이제 도란이 얼굴 어떻게 보냐고! 출근 준비를 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머리만 쥐어뜯고 있는 나다.

    아니, 잠깐만. 침착하자. 뭘 고작 이 정도 일 가지고 이렇게 난리를 치고 있어.

    지금이라도 당장 수능을 치든, 편입을 하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대에 들어간 다음, 죽기 전까지 타임머신을 만들면 해결되는 거잖아. …가 가능할 리가 있겠냐!

    망할 본능 자식아. 주인이 술에 좀 취했다고 해서 그렇게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어도 되는 거냐? 이성, 너는 본능이 나댈 동안 대체 뭘 한 건데! 집 나가지 않고 굳건히 자리를 지켰어야 할 거 아니냐고!

    죽자, 차라리 그냥 죽어버리자. 한강 물 수온부터 체크할까?

    아, 진짜 어떻게 하지. 필름 끊긴 척하고 시치미 뚝 떼고 있을까. 아니, 이게 시치미 뗀다고 될 문제냐고. 시치미 떼서도 안 되는 거고!

    …엄마, 아빠. 나 어떻게 해. 그동안 쌓아놓은 공든 탑이 술 때문에 와르르 무너지게 생겼어.

    이전에는 도란이가 없어서 죽을 것 같았다면, 지금은 도란이 때문에 죽을 것 같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도란이한테 저지른 사고 때문에. 도란이가 돌아오면 그동안 준비해왔던 고백을 건네고, 받아주든 받아주지 않든 천천히 조심조심 다가갈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매일 다짐해놓고 A, B, C, D가 아니라 A에서 K로 단숨에 점프를 뛰냐. 권이소 똥 멍청이야.

    이런 생각 하면 안 되는 걸 아는데, 도란이라도 필름이 끊겼으면 좋겠다. 걔도 눈이 풀릴 정도로 취했었으니까 만약에, 아주 만약에 필름이 끊겼을 …리가 없지. 필름이 끊길 정도로 퍼마신 애가 집을 치우고, 나를 방 안으로 옮겨 놨겠냐고.

    게다가 퇴근 시간이 코앞인데, 아직도 도란이한테서 연락 한 통 없잖아.

    아저씨랑 트러블이 생겼던 며칠간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연락을 안 했던 적이 없는 도란이다. 연락을 못 할 상황이면, 사전에 말을 하든가, 문자라도 한 통 보냈었는데. 그런 애가 통보도 하지 않았는데 연락이 없다는 건 …난 이제 끝났다.

    눈앞이 노랗다는 게 어떤 건지 알 것 같다. 그리고 오늘따라 일이 더럽게 안 풀리고 있다는 것도 잘 알겠다. 평소였다면, 이른 퇴근에 기뻐서 몸부림을 쳤겠지만, 지금은 슬퍼서 몸부림이 쳐진다.

    …나 진짜 어떡하냐. 단언컨대 내 인생 최대의 난관에 빠져버렸다.

    이것 때문에 도란이와의 모든 관계가 그야말로 개박살 나면 어쩌지? 그러게 도란이가 제일 싫어하는 짓은 왜 해서. 그놈의 술이 뭐길래, 자제력도 없이 지옥 구렁텅이로 다이빙하고 난리야!

    미치겠다. 그러고 보니 나, 도란이가 싫어하는 일을 골고루 저질렀네.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억지로 하는 거랑 약속 안 지키는 거.

    물론, 그때도 지금도 장난기 하나 없는 진심이긴 하지만, 짓궂은 스킨십 안 하겠다고 약속까지 해놓은 주제에 그때보다 더한 걸 저지르냐. 거기다 경찰 아저씨가 당장 내 팔에 은팔찌를 채워도 이상할 게 없는 사고잖아.

    도란이가 어떻게 나오든 죄인인 나는 뭐라고 반박할 수조차 없게 되어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빌자. 무조건 빌자. 손의 지문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빌자. 멍석 깔아놓고 멍석말이를 당하든, 석고대죄를 하든 도란이 화가 풀릴 때까지 잘못했다고 싹싹 비는 거야.

    그런데 왜 이렇게 도란이를 마주할 용기가 안 나냐! 단축키 하나만 누르면 통화가 되는데, 왜 그걸 못해서 30분 동안 휴대폰만 바라보며 고사를 지내고 있냐고!

    …침착해, 권이소. 용기를 내. 차일피일 미루면 미룰수록 감당하기 어려워진다는 걸 알잖아.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거야.

    심호흡을 깊게 하고서 단축키를 누르려는데, 그보다 한발 빨리 수신 화면이 켜졌다. 너무 놀라서 딸꾹질까지 나온다. 딸꾹질을 멈추기 위해 숨을 꾹 참고서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는데 …도란이다. 멍멍이, 아니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먼저 연락하지도 못했는데, 기껏 온 전화까지 받지 못하면 난 그야말로 끝이다, 끝. 딸꾹질이 나오든 말든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권이소.”

    “히끅…. 네.”

    “퇴근했지.”

    “…네.”

    “집 앞 카페로 와.”

    …세상에. 실화냐, 이거. 도란이 목소리 완전 착 가라앉았는데. 내 귀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니라면, 분명 진심으로 빡쳤을 때 나오는 목소리였다고. 진짜 망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훨씬 안 좋아. 지금이라도 타임머신을 찾아서 떠나야 하나.

    신이시여, 부디 제게 다시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그때는 본능을 철저히 억누르고 성녀와도 같은 삶을 살겠습니다. 서서히 저물어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며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빌었다.

    근래 들어 도란이를 보는 게 이렇게 껄끄러웠던 적이 없었는데. 설레서 죽을 것 같긴 했어도 좋으면 좋았지, 껄끄럽지는 않았었다고.

    …하긴, 지은 죄가 있으니 당연한 거겠지.

    오늘따라 카페 문이 천근만근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진다. 낑낑거리며 문을 여는데, 내가 연약해서 문을 못 여는 줄 아셨는지 어떤 분이 다가오셔서 친절하게 열어주셨다.

    감사합니다. …너무 감사해서 눈물 날 것 같아요.

    한 발, 두 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우리가 자주 앉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정말 많이 화난 것인지 굳은 얼굴을 한 도란이가 앉아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데, 도란이의 목을 감싸고 있는 스카프가 보인다.

    …한여름에 목을 칭칭 감싸고 있는 스카프. 부자연스러운 모습에 오늘 밤에 있었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괴롭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인사를 꺼내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심호흡했다. 그 순간,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도란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미치겠다. 너무 놀라서 기껏 멈추게 한 딸꾹질이 또다시 도질 것 같다.

    마음의 준비할 새도 없이 테이블로 걸어간 나는 로봇처럼 뻣뻣하게 손을 올리고서 인사를 건넸다.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아, 안녕. 좋은 아침.”

    “바깥 깜깜하거든.”

    “그, 그러네. 좋은 …밤.”

    시작부터 망했어요. 아아, 도란이의 시선이 따갑다. 탐탁지 않게 쳐다보는 게 눈에 들어온다. 어색하게 웃으며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돌리는데도 여전히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으아, 도란 님. 제가 잘못한 건 맞는데요. 잘못했다고 사과는 할 수 있게 해줘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면 암만 나라도 도저히 입이 안 떨어진다고.

    “권이소.”

    “…네? 아, 아니. 응?”

    “너 기억하고 있지.”

    “…어? 어?! 뭐, 뭐, 뭐를?”

    “이거.”

    도란이가 스카프를 살짝 내렸다. …맙, 맙소사. 내가 아주 제대로 물어뜯어 놨구나. 기억보다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키스 마크에 저절로 고개가 숙어진다. 미안해 죽을 것 같은데, 그 와중에 왜 또 도란이가 섹시해보이고 난리야.

    진짜 정신 못 차리고 시도 때도 없이 나올래, 음란마귀야? 너 때문에 어떤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지 보고 있으면서도 눈치 없이 불쑥 튀어나오냐?

    어찌 됐든 내가 죽일 년이다. 도란이를 좋아해서 그런 거든 어쨌든 간에, 내가 자제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잖아. 빼도 박도 못하게 내 잘못 맞으니까 진심을 담아서 사과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도란이를 향해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죄송합니다. 진짜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사과한다고 해서 네 화가 풀릴 거라고 절대 생각 안 하지만, 그래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하아….”

    한 손으로 미간을 감싼 도란이가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쉰다. 그 한숨에 내 심장이 뚫리는 것 같이 괴롭다.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한 애한테 혼란만 가중해준 것 같아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미간을 짚은 채 고개 숙여 생각하던 도란이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천장을 보면서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뱉더니 나를 쳐다본다. 차마 도란이의 시선을 마주할 수가 없어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일단 앉아.”

    “…응.”

    엄마한테 혼날 때보다 빠른 속도로 착석했다. 양손이 저절로 공손하게 무릎으로 향한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통설적으로 하는 말이 정확히 맞는 것 같다. 화내지 않는 사람이 제대로 화를 내면 엄청 무섭다는 거.

    농담이 아니라, 엄마가 화내는 것보다 몇 배로 무섭다. 행여나 내 행동 하나가 밉보여서 분노의 도화선이 될까 봐, 꼼짝도 하지 못하겠다. 부동의 자세로 얼마나 있었을까. 도란이가 경고하듯 말했다.

    “…너 진짜, 그 지경 될 때까지 술 마시지 마라. 알았어?”

    “응, 다신 안 그럴게. …죄송합니다.”

    사과를 꺼내고 도란이를 힐끔 쳐다봤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조금 표정이 풀려있다. …일단은 한시름 놓은 건가? 아니, 놓긴 뭘 놓아. 대형사고 친 주제에 제대로 용서받을 때까지 긴장 놓지 말고 빌어야지.

    “이소야.”

    “…어?”

    “나 봐.”

    평소만큼은 아니지만, 목소리에서 다정함이 묻어나온다. 그 목소리에 조금은 도란이를 마주 볼 용기가 난다. 천천히 고개를 들고 도란이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잠깐만. 어떡하지. 못하겠어. 도저히 못 하겠어.

    시선을 주고받자마자 고개를 도로 푹 숙였다. 새벽에 있었던 일이 겹쳐 보여서 도란이의 얼굴을 도저히 마주하지 못하겠다. 용기를 내서 재차 시도해도 결과는 같았다. 5초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는 나다.

    “…이소야, 나 보라니까.”

    “아, 아니 그… 미안. …목이 뻐근해서 도저히 못 들겠어.”

    씨알도 안 먹힐 핑계. 내뱉으면서도 좀 더 그럴듯한 건 없나 후회스럽긴 했지만, 다시 기회를 준다고 해도 감탄을 자아낼 핑계가 떠오르지 않을 게 분명하다. 또다시 도란이에게서 한숨 소리가 들린다.

    “…됐어. 그냥 이대로 말할게. 이제 그만하자.”

    “어? 뭘?”

    “가상 연애.”

    무덤덤하게 내뱉는 도란이의 말에 심장이 철렁했다. 놀라서 도란이를 쳐다봤지만, 이내 나를 응시하는 도란이의 시선을 피했다. 뭘 잘했다고 피하고 앉아있냐. 스스로가 한심해서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보통 때의 나 같으면, 가상 연애를 끝내자는 말에 “그럼 나랑 진짜 연애할래?”라고 뻔뻔하게 얘기했겠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저지른 죄가 있어서,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리고… 도란이의 눈빛이 너무나도 낯설어서.

    단순히 가상연애를 끝내자는 의미로 말한 게 아니었다. 친구 이상의 관계는 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말로 하진 않았지만, 도란이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내 책임도 있어. 아무리 가족 같은 소꿉친구라고 해도, 이성 친구한테 해서는 안 될 부탁이었는데.”

    “…란아.”

    “어차피 내 상황이 이 모양이니, 계속한다 한들 의미 없을 게 뻔하고. 그냥 어렸을 때 했던 장난처럼, 가볍게 넘기고 원래대로 돌아가자. 그게 가장 나은 것 같다.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먼저 갈게.”

    다급히 붙잡으려고 했지만, 도란이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변해버려 그대로 손을 내려놓았다. 하, 진짜 …제대로 말아먹었네.

    살면서 처음 봤다. 아니, 도란이가 나를 그렇게 쳐다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타인을 쳐다보듯 무심하면서도 경계심이 서려 있는 눈빛. 다가오지 말라고 벽을 세우는 경계심이 나를 도란이에게 다가가지 못하게끔 제자리에 멈춰 세웠다.

    시야를 어지럽히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한동안 카페 의자에 멍하니 주저앉았다.

    ============================ 작품 후기 ============================

    시눙님// 아주 제대로 후폭풍 겪고 있는 이소입니다 ㅠ_ㅠ.....

    soae님// 전 도란이 괴롭히는 게 넘나 좋아요 ^p^ 하지만, 란이만 괴롭히면 불공평하니 이소도 괴롭히기로 했습니다(?)

    마카로나주님// 야생성 대신 철벽력이 눈떠버렸습니다(...)

    sn님// 이성이 끊길 정도로 지나친 음주는 위험한 겁니다 ㅜ_ㅜ..

    빗자루계인님// 헉, 개인지를 사주시겠다니 말만으로도 감사해요 /ㅅ/ 언젠가 독자님들께 좋은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D

    망했어요. 망했어요.

    도란이의 철벽이 생성되었습니다(솔직히 생길 만했지)

    게임으로 따지면, 배드엔딩 분기점에 도달한 이소입니다.

    아이고, 이소야 ㅠ_ㅠ..

    다음 연재는 언제가 좋을까요

    화요일? 수요일?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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