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0 47. 네 입술 갖고 싶으니까 =========================
내 품에 안겨 한참을 소리 없이 울던 도란이가 어느 정도 진정 됐는지 천천히 고개를 든다. 눈가가 촉촉하게 젖은 걸 보니 내 마음이 아려온다. 도란이 눈에 맺힌 눈물이 보기 싫어 도란이 얼굴을 닦아줬다. 내 손길에 애써 입꼬리를 올리는 도란이다.
역시 나는 도란이가 웃는 게 제일 좋지만, 이렇게 억지로 웃는 건 하나도 설레지 않아.
억지웃음에 오히려 아까보다 심장이 더 아프다. 문득 나만큼이나 아파하고 있을 사람이 떠올랐다. 도란이네 아저씨. 얘기 들어보니 아저씨께는 말도 안 하고 한국에 온 것 같은데. 분명 하나뿐인 아들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노심초사하고 계시겠지.
아저씨께 연락을 하는 게 어떠냐는 내 권유에 도란이가 고개를 젓는다. 도란이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아직은 아저씨 목소리가 듣고 싶지 않은가보다. 그래도 아저씨 걱정하고 계실 텐데.
나라도 아저씨한테 연락해야겠다. 도란이 여기 있으니 걱정하시지 말라고.
“그럼 내가 아저씨한테 전화하고 올게. 너 여기 있다고. 잠깐만 기다려, 알았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도란이다. 비 맞은 강아지마냥 애처로워서 혼자 두려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통화 빨리 끝내고 와야겠다.
혹시나 아저씨 목소리가 도란이에게 들릴까 봐 도란이와 멀찍이 떨어져서 전화를 걸었다. 내가 전화를 걸기가 무섭게 도란이한테 무슨 연락 온 게 없냐며 다급하게 물어보시는 아저씨다.
내 예상대로 아저씨 상태도 도란이만큼이나 좋지 않으시다. 새삼 아저씨께서 성악가가 아니라 피아니스트이셔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저씨께서 성악가였다면, 이런 목소리로는 절대 공연을 못 하셨을 테니까.
“네, 도란이 지금 한국에 와 있어요. 저랑 같이 있고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아, 이 자식. 다행, 다행이다.”
수화기 너머로 뭔가가 우당탕 엎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주변에서 놀라는 목소리도 연이어 들려온다. 아무래도 아저씨가 온몸의 힘이 빠지신 건지, 바닥에 주저앉으신 듯하다.
한동안 끅끅거리며 서럽게 오열하시던 아저씨는 도란이 좀 부탁한다고 내게 당부를 하셨다. 걱정하지 마시라며, 아저씨를 안심시키고는 전화를 끊었다. 아저씨가 우셨다는 건 도란이가 괜찮아졌을 때 알려줘야겠다. 지금 말하면 란이가 더 우울해할 테니까.
통화를 마치고는 도란이에게로 다가갔다. 내가 옆에 온 것도 모를 정도로 깊게 생각에 잠긴 도란이다. 이쪽도 아저씨만큼이나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짧게 한숨을 쉬고는 도란이를 내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제야 허공만 쳐다보던 도란이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왔어?”
“응. 아저씨가 너 좀 부탁한대. 그러니까 나한테 말해. 하소연이든 뭐든 전부 다 들어줄 테니까.”
내 말에도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하는 도란이다. 말을 하라고 했더니 왜 입을 꾹 다물고 있어, 청개구리야. 눈치를 보니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듯 보인다. 이럴 때는 그냥 내가 궁금한 걸 묻는 쪽이 낫다.
뭐부터 물어보는 게 좋을지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아저씨한테 재혼 상대가 생긴 거.”
“…아버지가 유럽에 가시기 전에 얼굴 보려고 본가에 들렸었거든. 그러다 우연히 아버지 폰을 보게 됐는데 때마침 그분한테 메신저가 온 거야. …사랑한다고.”
“그래서?”
“차마 아버지한테 물을 용기는 나지 않아서 아버지 모르게 알아봤어. 그런데 아버지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재혼하고 싶어 하는 상대가 있다는 걸 알고 있더라. …나는 전혀 몰랐는데.”
도란이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 모습에 내 얼굴도 잔뜩 찌푸려졌다. 도란이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짐작이 돼서 더욱 가슴이 쓰리다. 나름대로 위로를 하려고 도란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자 도란이가 한숨을 쉬면서 나한테 더욱 기댄다.
“이런 이야기를 나눠도 괜찮을 것 같은 상대가 이소 너희 아버지라서, 아저씨랑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었어. 아버지가 아직 나한테 말할 용기가 나지 않으셔서 숨겼던 거니 너무 서운해하지 말라고, 아저씨도 만나본 적 있는데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지.”
“…만나보니까 어때? 괜찮은 분 같아?”
“…응. 아저씨 말대로 정말 좋은 분이더라.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복잡한 심경이었어.”
도란이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린다. …나 진짜 얘가 아파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어. 눈물 한 방울이 내 어깨에 닿을 때마다 심장에 염산을 끼얹은 것처럼 쓰라리고, 아프다.
“아버지도 아버지 인생이 있다는 걸 머리로는 잘 아는데. 진짜 너무 잘 아는데. 마음은 서운하고, 자꾸만 화도 나고, 엄마랑 화가 살아있을 때 생각이 계속 나니까…”
“…알 것 같으니까 힘들면 말하지 마, 란아.”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채 애써 울음을 참는 도란이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도란이를 품 안에 감싸 안고 다독였다. 내 품에서 한동안 눈물을 흘리던 도란이가 울음을 삼키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버지한테 죄송스러워. 나랑 같이 사셨을 때만 해도 재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으셨는데. 아버지가 외로움을 많이 타는 걸 잘 알면서도 제대로 못 챙겨드린 것 같고, 내가 이렇게 치졸한 인간이었나, 자책감도 생기고. …미칠 것 같아.”
“네가 잘못한 거 아냐, 바보야. 두 분이 좋아서 만나시는 거잖아. 게다가 좋은 분이시라며. 잘된 일이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마. 응?”
도란이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여전히 눈물은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다. 나는 도란이가 진정할 때까지 계속해서 위로하고, 다독였다.
한동안 계속 눈물을 흘리던 도란이는 힘이 빠진 건지 축 처진 상태로 내게 기댔다. 눈에 보일 정도로 수척해졌는데 당연히 기력이 없겠지. 그 상태로 계속 울었으니 힘이 남아있을 리가 있나. 속상해서 자꾸 한숨이 나온다.
그런 나를 보고 힘없이 웃어 보인 도란이는 바닥에 놓인 봉지들을 가리켰다.
“그런데 저것들은 다 뭐야?”
“아, 어 …그러니까.”
나는 그제야 내가 술을 양손 가득 사서 집으로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떡하지. 네가 연락을 안 하니까 빡쳐서 술을 샀다고 사실대로 말하기도 뭣하고. 어떻게 둘러댈지 고민하다 만만한 이혁이를 들먹이기로 했다.
“그… 네가 없으니까 심심해서 주말에 이혁이라도 부르려고 미리 준비해놓고 있었어.”
“그렇구나. 지금은 내가 있으니까 나랑 마시면 되겠네.”
“어?”
“…싫어?”
“당연히 좋…! 아니. 응, 그러자.”
아, 순간적으로 이성이 날아가 버려서 나도 모르게 필터링 없이 본심이 튀어나왔네.
도란이를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몇 배로 심장에 해롭다. 눈물 때문에 촉촉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무척이나 애처로운데 귀엽고, 섹시하고, 그대로 덮치고 싶…
아니, 안 돼. 나서지 마, 음란마귀야. 상황을 봐가면서 튀어나와야지. 지금 덮쳤다가는 역효과만 날 거라고.
***
도란이를 데리고 우리 집으로 왔다. 혹시나 안주로 먹을 만한 게 있나 싶어 냉장고를 열어봤다. 도란이가 유럽에 가고 나서부터, 나 역시 밥을 챙겨 먹는 둥 마는 둥 해서 냉장고가 클린하다. 원래 계획은 안주 없이 강소주로 들이키는 거였는데.
며칠 동안 제대로 안 먹어서 살이 쏙 빠진 애한테 강소주를 권유할 수도 없고.
배달 음식이라도 시킬까. 어째야 할지 고민하다 냉동실에 치즈가 들어간 비엔나소시지가 있는 걸 발견했다. 오, 럭키. 이거랑 라면 두 개 끓여서 안주 삼으면 되겠다.
속전속결로 라면을 끓이고는 거실 테이블에 술상을 차렸다. …안주라고는 구운 소시지에 소시지가 들어간 라면뿐이지만. 혹시나 빈속에 술 마시면 속 쓰릴까 봐 즉석 밥도 한쪽에 놔뒀다.
그래도 차려놓으니까 그런대로 봐줄 만한 술상이긴 하네. 사 온 소주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식탁에 앉아 넋 놓고 있는 도란이를 불렀다.
되도록 재혼과 관련된 얘기는 꺼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오랜만에 도란이랑 얘기 나누니까 엄청 좋다. 역시 나한테는 도란이 목소리가 최상의 안주네. 술이 술술 넘어간다.
반면, 나와 달리 술을 거의 마시지 않고 있는 도란이다.
…하긴 도란이는 소주 거의 안 마시지. 소위 말하는 아재 입맛인 데다 자극적인 맛을 좋아하는 나는 소주를 엄청 좋아하지만, 도란이는 쓰다는 이유로 소주를 좋아하지 않는다. 소맥은 잘 마시지만.
어떡하지. 강소주가 당겨서 소주만 가득 사왔지, 맥주는 하나도 안 사왔는데.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 추석 선물로 스위트한 레드와인을 받았었지. 나야, 과실주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대로 찬장에 처박아뒀지만, 도란이는 단 걸 좋아하니까 소주보다는 와인이 입맛에 맞지 않으려나.
자리에서 일어나 찬장을 뒤졌다. 누구 줘버린 건 아닌가하고 조금 불안했는데 다행히 한쪽 구석탱이에 와인이 처박혀있다.
와인오프너 같은 건 키우지 않는지라, 코르크 마개를 딴다고 애먹었지만, 소주보다는 취향에 맞는지 홀짝홀짝 잘도 마시는 도란이를 보니 꺼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고생한 보람이 있네. 와인을 소주잔에 따라 마시는 아이러니한 풍경에 웃음이 나오긴 하지만.
자정이 넘어서까지 이어지는 술자리에 슬슬 한계가 오는지 어질어질하다. 도란이도 꽤 취한건지 눈이 살짝 풀려있다. 흐, 어떡해. 몽롱한 상태인 것도 귀여워. 와인을 마시는 도란이를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멍하니 와인을 입에 대더니 손에 힘이 빠진 건지 그대로 흘리는 도란이다. 덕분에 도란이 옷도, 바닥에 깔린 러그도 붉게 물들어버렸다. 입에서 피가 흐르는 것처럼 되어버렸잖아. 잘생긴 얼굴에 무슨 짓이야.
더럽혀진 러그는 안중에도 없이 도란이 얼굴부터 닦았다. 눈을 반쯤 감은 채 내 손길에 얼굴을 맡기는 도란이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말캉한 입술의 감촉, 어딘지 모르게 관능적인 도란이의 얼굴. 순간, 머릿속에서 이상한 스위치가 켜진 나는 그대로 도란이를 바닥에 눕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도란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잔뜩 당황한 얼굴마저도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입술을 중심으로 도란이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천천히 도란이 입술을 향해 다가갔다.
숨결에 이어 입술까지 맞닿으려는 순간, 그 사이를 무언가가 막았다. 인상을 쓰면서 눈을 뜨니 도란이가 손으로 입술을 가리고 있다. 젠장.
“…잠깐만, 이소야. 타임. 타임.”
“뭐.”
“너 전에 계약 조건에 그렇게 쓰라고 했잖아. 키스 이상은 금지라고. 방금… 키스하려고 했던 건 아니지?”
도란이의 말에 짜증이 치솟는다. 그딴 망할 종이쪼가리 하나 때문에 제지당한 거야, 나?
보통 때는 사랑해 마지않는 도란이의 예쁜 손이지만, 지금은 거추장스러운 장애물로만 보인다. 우악스럽게 도란이의 양쪽 손목을 잡고는 머리 위로 올렸다. 당황해서 저항하는 도란이지만, 기력이 없는 상태라 그런지, 한쪽 손으로만 잡고 있는데도 내 손아귀에서 조금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 조건 없던 걸로 해. 내가 찢어발겨 버릴 거니까.”
“…어? 왜?”
“내가 네 입술 갖고 싶으니까.”
“그게 무슨… 으읍…!”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그대로 도란이의 입술에 키스했다. 마지막 저항인 건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돌리는 도란이다. 입술을 깨문 다음, 혀로 입안을 파고들려 했지만, 쉽사리 열리지 않고 있다.
…하, 진짜. 도란이 손목을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도란이의 약점인 귀를 만졌다.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었는지, 야릇한 신음과 함께 도란이의 입이 벌려졌다.
귀를 만질 때마다 도란이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이 내 이성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그대로 본능에 몸을 맡긴 나는 도란이에게 거칠게 키스했다.
도란이의 혀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일방적인 키스지만, 그마저도 황홀해 미칠 것 같다. 체온만큼이나 뜨거운 입안. 알싸한 알코올의 맛과 달콤하면서도 진한 포도 향이 어지러이 뒤섞여, 도란이의 입안 구석구석을 탐하도록 이끌었다.
“…흣, 이, 이소야. 그만….”
그리고 나를 자극하는 도란이의 물기 젖은 목소리.
가쁜 숨소리와 함께 흐느끼다시피 내 이름을 부르는데, 그게 오히려 나를 유혹하는 것만 같아 그만하라고 애원하는 건 안중에도 둬지지 않는다. 이렇게나 쉽게 덮칠 수 있는데, 다른 새끼들이 나처럼 도란이를 덮치는 건 아닐까. 도리어 삐뚤어진 소유욕과 가학심이 계속해서 나를 부추긴다.
나 때문에 울어줘. 야릇한 음성으로 계속 내 이름을 불러줘. 내 이름만 부르고, 내 손길만 느끼고, 나만 봐줘.
문득 도란이의 얼굴이 보고 싶어진 나는 입술을 떼고 도란이를 지그시 응시했다. 눈물이 맺힌 채 풀려있는 눈, 작게 벌린 입에서 터져 나오는 달뜬 숨소리, 잘 익은 복숭아처럼 상기된 볼. 색기가 흐르다 못해, 넘치는 수준이라 키스로만 끝내는 내가 자제력이 뛰어나다고 여겨질 정도다.
또다시 미친 소유욕이 내 본능을 잠식한다. 내 거라는 표식을 새기라고 자꾸만 머릿속에서 소곤거린다.
소유욕에게 사로잡힌 나는 입술이 아닌, 도란이의 새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댔다. 포도 향이 섞인 아찔한 체향에 취해, 잡아먹을 듯 세게 깨물었다.
“아! 흐으, 아파…!”
도란이의 목을 타고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린다. 그대로 거칠게 빨아들이자 뽀얀 피부에 붉은 꽃이 피어올랐다. 만족스럽게 표식을 바라본 나는 다시금 도란이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갰다.
흥분에 취해 정신을 놓을 때까지, 나는 도란이의 입술을 탐하고, 또 탐했다.
============================ 작품 후기 ============================
빗자루계인님// (차분히 관에 못을 박는다)
샤냥꾼님// 침대가 아니라 거실 바닥에서 울려 드렸습니다. ^p^.. (음흉)
violetmoon님// 여러모로 고통받는 도란이입니다.(측은)
다른 소설은 남주가 여주를 덮친다면,
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은 남주가 여주한테 덮쳐집니다.
본격 도란이 수난시대(...)
하지만, 도란이가 덮쳐지길 바라시던 독자 님들은 쌍수를 들고 기뻐하시겠지 ^p^...
다음 연재는 월요일입니당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