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7 44. 예상치 못한 방해꾼 =========================
대망의 고백일까지 앞으로 3일, 눈치라고는 더럽게 없는 도란이한테 대체 어떻게 고백을 해야 할까. 그걸 고민한다고 요 며칠 잠 한숨 제대로 못 잤다. 그래도 밤낮없이 고민한 결과, 대강 어떻게 고백할지 얼추 계획은 잡힌 상태다.
문제는 막상 고백해야겠다고 생각했더니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기본이고, 며칠 동안 중요한 일을 앞둔 것처럼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거다. 이러다 진짜 부정맥이라도 걸리면 어떻게 하지.
이런 상태로 도란이를 보면 심장이 더욱 날뛰겠지만, 우려보다는 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크다. 하루라도 도란이를 보지 못하면 입안에서 가시가 돋을 것 같다고.
도란이랑 내가 좋아하는 새우튀김을 사 들고 도란이 집으로 갔다. 초인종을 눌러도 별 반응이 없다. 집에 없나? 불은 켜져 있는데. …하긴 도란이 집은 사람이 있건 없건, 온종일 거실 불을 켜두긴 하지.
진짜 집에 없는 건가? 계속 초인종을 눌러도 반응이 없다. 망했네. 나 혼자 2인분은 못 먹는데. 도란이랑 같이 먹으려고 산 거니까 집에 들어가서 나눠주고 나와야겠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거실과 주방을 확인해보니 도란이가 보이지 않는다. 새우튀김을 거실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혹시나 도란이가 있을까 봐 방문을 열어봤다.
작업실에는 불이 꺼져있는 게 아무도 없고, 화장실…은 있었으면 문을 잠갔겠지. 남은 건 도란이 방뿐이네.
예의상 노크를 몇 번 하고서 문을 열었다. 침대 주변과 책상 위에 A4용지들이 어지럽게 흩날려있다. 늘 집을 깔끔하게 해두는 애가 웬일이래. 의아해하면서 방 안을 둘러보니 도란이가 A4용지를 배 위에 올려놓고 침대에서 숙면 중이다.
자고 있긴 하지만, 집에 있긴 하네. 다행이다. 어찌 됐든 얼굴 볼 수 있어서.
좋은 건 가까이에서 감상해야지. 침대 끝부분에 앉아 자고 있는 도란이를 바라봤다. A4용지에 뭔가를 쓰다가 잠든 건지 한 손에는 펜이 들려져 있다.
얘는 머리가 바닥에만 닿으면 잠들어버리더라. 애기도 아니고.
물론, 잠든 모습은 애기처럼 귀엽긴 하지만. 새근거리는 숨소리도 애기 같고. 깊게 잠든 건지 내가 검지로 자기 볼을 꾹꾹 누르는데도 미동도 하지 않는 도란이다.
이렇게 세상모르고 잠들면 어쩌자는 거야. 그것도 완전히 무방비하게. 자기 집에 누가 쳐들어왔는지도 모르고 꿈나라만 헤매고 있잖아. 정말이지, 이러다 누가 도란이가 귀엽다고, 잠든 사이에 보쌈해가는 건 아닐까 스멀스멀 걱정이 피어오른다.
…잠깐, 보쌈 좋은데? 고백이 실패하면 최후의 수단으로 진지하게 고려해볼까.
문득 어쩌면 지금 도란이에게 가장 위험한 건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냐, 해치지 않아요. 상냥하게 대할 거예요. …아마도?
잠든 도란이를 바라보며 하루의 피로를 푸는데, 갑자기 도란이가 눈을 감은 채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와, 씨 놀라라. 얘 설마 몽유병 있나? 다행히 몽유병이 아니라, 잠에서 깬 건지 눈을 비비적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는 도란이다.
눈을 단추 구멍보다 작게 뜨고서 이리저리 살피던 도란이가 나를 발견했다. 아직도 잠이 쏟아지는지 눈을 감은 상태로 느리게 끔뻑거린다. 실눈을 뜨고 나를 보던 도란이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세요?”
갑자기 얘가 왜 이렇게 걱정스럽지? 만일 내가 아니라 도둑이 쳐들어와도 무방비한 상태로 “누구세요?”라고 할 것 같아. 자기 집에 외부인이 쳐들어왔는데 일단은 경계를 해야 할 것 아니야, 바보야!
마치 도둑이 들어왔는데도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반려견을 보는 것 같다.
“나야. 새우튀김 사 왔으니까 얼른 세수하고 와.”
“…와아.”
비몽사몽인 상태로 작게 만세를 하더니 화장실로 향하는 도란이다. 란이 세수할 동안 방이나 좀 치워줘야겠다. 소설 소재라도 떠올리고 있었나. A4용지를 왜 이렇게 방 안에 흩날려놓고 있는 거야.
투덜거리면서 A4용지를 줍는데, 몇몇 종이는 뭐라고 적혀져 있는 걸 발견했다. 뭐라고 쓰여 있는지 볼까나. 남의 일기장 몰래 뒤져보는 것처럼 짜릿함이 감돈다. 살짝 죄책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이렇게 잘 보이는 곳에 방치한 사람 잘못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창작의 고통을 몸소 표현하듯 신경질적으로 펜으로 휙휙 그은 낙서도 있고, 고뇌한 흔적이 엿보이는 ‘모르겠어.’라고 도배되어있는 종이도 보인다. 아무래도 진짜 신작 준비한다고 이래놓은 것 같은데.
혼자 결론을 내리고서도 호기심이 생겨 청소하면서 글씨가 적힌 종이들을 찾아봤다. 그러다가 종이에 남산타워며, 레스토랑이며 쓰여 있는 걸 발견했다.
중간중간 보이는 고뇌의 낙서들 때문에 판단하기 어렵긴 했지만, 아무래도 도란이 생일날, 내가 했던 말 때문에 고민하는 흔적들인 듯하다. 골 빠개지도록 생각하라고 했더니 진짜 생각하고 있었구나.
하여간 말 하나는 엄청 잘 듣는다니까. 예뻐 죽겠어, 아주.
…다만, 이 종이들을 보니 정답에는 요만큼도 닿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아주 잘 알겠다. 내가 그렇게 티를 안 냈나? 나만 티 난다고 생각했나? 알고 보니까 나 엄청난 포커페이스고 그런 거야?
내가 그럴 리가 있나! 방 안에서 모은 종이들을 책상 위에 탕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옆에 놓인 마리안느의 집을 신경질적으로 째려봤다. 생일의 막바지, 내가 도란이에게 준 마지막 선물인 십자수 방석을 깔고 곱게 누워있는 마리안느다.
아니! 저것도 하트잖아, 하트! 정열을 가득 담은 빨간 하트! 심지어 거기 한가운데 십자수로 그려진 그림은 뽀뽀하는 남자 여자고! 내가 커플 곰돌이도 줬잖아! 근데 왜 내가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아직까지도 눈치를 못 채고 있냐고!
“이쏘 누님, 새우튀김 세팅 끝냈어.”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쉬고 있는데 도란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아, 일단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배부터 채우고 화를 내든, 힌트를 주든, 어필을 하든 해야겠다.
짧은 시간에 앞접시며, 소스며, 가지런히 세팅해놓은 도란이다. 역시 얘는 참한 새색시 감이야.
고생했다는 의미로 새우튀김 하나를 타르타르 소스를 찍어 도란이 입에 댔다. 내가 준 새우튀김을 얌전히 받아먹는 도란이다. 오물거리며 새우튀김을 먹는 게 귀여워서 도란이의 양쪽 볼을 살며시 꼬집듯 만지작거렸다.
“도란, 너 사흘 뒤 저녁에 시간 비워뒀지?”
“아, 응.”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빼놔. 반드시 빼놔. 혹시라도 다른 약속 잡지 마.”
“알았어, 어차피 약속 잡을 상대도 마땅히 없는걸.”
그래, 꼭 빼놔. 내 인생에서 가장 진지한 고백을 할 거니까. 진지한 걸로도 모자라, 그야말로 모든 걸 다 건 고백. 으아, 고백할 생각 했더니 또다시 부정맥이 도지네. 새우튀김으로 심신의 안정을 취해야겠다.
새우튀김을 한창 음미하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거실에 걸린 시계를 보니 10시가 넘었다. …내일은 평일이니까 이렇게 늦은 시간에 성준이가 오지는 않을 텐데. 대체 누구지?
도란이도 별안간 들리는 초인종 소리에 의아한 건 마찬가지인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인터폰으로 걸어간다. 누군가 싶어서 나도 그쪽으로 다가가는데, 도란이가 놀라는 소리에 금세 의문이 사라져버렸다.
“아버지?!”
뭐? 아버지? 도란이 아버지라면 예비 시아… 아니, 이게 아니라. 아직 유럽에 계셔야 할 분이 한국에 왔다고? 도란이가 문을 열자 진짜로 아저씨가 양손에 선물을 한 아름 들고 서 계신다.
“아버지! 말도 없이 한국에는 왜 왔어요? 며칠 뒤에도 공연 있잖아요.”
“그야 우리 아들이 보고 싶어서 왔지. …어, 이소도 있었구나?”
“안녕하세요, 아저씨. 해외에서 잘 지내셨어요?”
“그래, 이소 너도 그동안 잘 지냈지? 어이구, 우리 아들. 오랜만에 안아나 보자.”
선물을 바닥에 내려놓고서 도란이와 포옹하는 아저씨다. …역시 이 집안은 스킨십이 생활이란 말이야. 우리 집은 부모·자식 끼리 끌어안는 게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데. 평소 같으면 웃으면서 포옹하는 도란이인데, 오늘은 표정이 좀 이상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서 저러나.
짧은 인사를 마치고 아저씨가 집으로 들어오셨다.
그야말로 선물을 바리바리 싸 오셨다. 마카롱이나 초콜릿 같은 달콤한 디저트도 수두룩하지만, 기념품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도란이가 좋아하는 판다와 히어로 굿즈까지…. 딱 봐도 이 선물들 전부 도란이 거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자식 사랑이 대단하시다. 아저씨가 가져온 선물들을 열어보는 데만 10분이 넘게 걸렸다.
눈앞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이 수두룩한데도 도란이는 영 달갑지 않아 보인다. 그런 도란이를 바라보며 머쓱하게 웃으시는 아저씨다. 언제나 화기애애하던 두 사람의 분위기가 지금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어색한 게 당연하겠지. 도란이 표정이 잔뜩 굳어있으니까.
평소와 다른 도란이의 모습에 괜히 나까지도 적응이 되지 않아 마른침을 삼켰다. 도란이는 말없이 아저씨를 바라보더니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말했잖아, 아들 보고 싶어서…”
“그거 말고.”
도란이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읊조렸다. 말투가 엄청 날카롭다. 아저씨께 늘 존댓말만 쓰던 도란이가 반말을 쓰는 걸 보면,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저씨한테 화도 좀 난 것 같다. 아무래도 둘 사이에 뭔가 트러블이 생긴 듯하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아저씨 역시 한숨을 쉬더니 천천히 입을 여셨다.
“…아들.”
“네.”
“공연 끝날 때까지 아버지랑 외국에서 같이 지내지 않을래?”
안 됩니다! 아저씨! 무거운 분위기에 차마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못하고 속으로 부르짖고 있는 나다. 해외에 공연이 있을 때, 이따금 도란이와 동행하실 때도 있긴 하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다.
저 며칠 뒤에 쟤한테 고백해야 한단 말이에요!
“싫어요.”
“…란아.”
“저도 여기서 할 일도 있고, 중요한 선약도 있어요. 대체 왜 매번 얘기도 없이 아버지 멋대로…!”
도란이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른 화를 삭이려는 듯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면서 숨을 내뱉는 도란이다. 아저씨의 잔소리는 능청스럽게 흘리는 도란이기는 하지만, 충고나 부탁은 순순히 받아들인다.
그런 도란이가 화를 내면서 단칼에 거절하다니. 단호한 태도에 한편으로는 안도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걱정이 더 크다. 대체 두 부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서 이러는 건지.
아저씨는 도란이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시더니 고개를 떨구셨다.
“…석진, 아니 이소 아버지한테 얘기 들었다. …란이 너도 알고 있다며.”
“…네.”
“전에 네가 그런 말을 했다고 들었다. 한 번 만나봐야 판단이 설 것 같다고.”
도란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나저나 이 대화, 왠지 모르게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다. 단순한 기시감인가? 혹시라도 기억 속에서 뭔가 단서가 발견될까 봐 차근차근 기억을 되짚었다.
“한국에 왔을 때 만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네게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단다. 란이 너는 인간관계에서는 아주 신중한 아이니까. …한 번 만나는 걸로 끝내는 것보다는 그 사람의 평소 모습을 지켜보면 좀 더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지 않겠니?”
“…알았어요, 따라갈게요. 언제 비행기인데요?”
“내일 바로 출발하면 된단다.”
“아버…! 하아, 아니에요. 내일 출발해야 하면 지금부터 짐 싸야겠네.”
열심히 낑낑대며 기억을 더듬고 있는 사이, 뭔가 일사천리로 결정된 것 같은 이 분위기는 뭐지?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내 질문에 답하듯 도란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작업실로 들어갔다.
노심초사하면서 작업실 문을 쳐다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도란이다. 곧바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도란이를 황급히 붙잡았다.
“…뭐야? 란, 너 어디가? 진짜 가?”
“응, 아버지 따라 가봐야 할 것 같아. 숙제는 갔다 올 동안 미룰게. 진짜 중요한 일이라서. …미안.”
도란이의 말에 고백하려고 세워뒀던 계획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살면서 고백 해보겠다고 이렇게까지 필사적이었던 적이 없었는데. 크나큰 각오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지금 상황이 솔직히 화도 나고, 어이도 없고, 속상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도란이가 걱정되는 게 더 크다. 아까부터 줄곧 표정이 좋지 않은 도란이지만, 지금은 아까보다도 표정이 좋지 않다. 안 좋은 감정들은 죄다 응집해놓은 듯한 표정.
입술을 굳게 다문 모습이 안쓰러워 도란이를 안고서 위로하듯 다독였다.
“…아냐, 괜찮아. 나랑 한 약속도 깰 정도로 중요한 일인 거지?”
“…응.”
“알았어. 돌아올 때까지 숙제는 잠시 보류. 대신 조심히 잘 갔다 와야 해? 지금처럼 우울해하지도 말고. 연락도 시간마다 꼬박꼬박하고.”
“…알았어, 꼭 그럴게. 고마워, 이소야.”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중요시하는 도란이가 내가 신신당부하며 했던 약속까지 깰 정도면, 뭔지는 몰라도 정말 중요한 일인가보다. 부디 큰일이 아니기를, 큰일이더라도 지금처럼 도란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는 일이 아니기를.
도란이를 다독이면서 빌고 또 빌었다.
============================ 작품 후기 ============================
soae님// 아버지가 후진 기어를 넣어버리셨습니다. (아이고 아버지.)
마카로나주님// (야광봉) 이쏘 누님! (야광봉)
빗자루계인님// 저도요.. 매운 치킨이.. 먹고 싶어요 ㅠ_ㅠ
시눙님// 한 회만에 고구마를 연성하는 프로 고구마 밭 농사꾼 에이온입니다 XD 고구마가 수확될 동안 도란이의 의중을 마구 추측해주세요!
아.....아이고, 아버님!!!!!!!!!!!!! [system] 아버지께서 본의 아니게 아들의 혼삿길을 저지하셨습니다.
오늘은 하루에 3작품 연재예요 :D
아침에는 [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 연재!
오후에는 신작인 [옆집 늑대 사로잡는 법] 연재!
밤에는 [마왕의 남자] 연재!
과로사로 기절한 에이온 ㅇ<-< (이미 싸늘해진 시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