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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46화 (46/97)
  • 00046 43. 내가 왜 이렇게까지 했다고 생각해? =========================

    식사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로 나왔다. 여기서 식사를 하면 전망대 관람은 무료라는 직원의 말에 단호하게 엑스자를 그었다. 거기까지 가면 전 죽어요, 오늘.

    그래도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밥만 먹고 가기에는 좀 아쉽긴 하다. 내가 살면서 언제 또 남산타워에 오겠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다른 층에는 뭐가 있는지 살펴봤다. 전망대…는 가뿐히 패스, 식당도 패스, 식사는 방금 끝냈으니까.

    위에서부터 차근차근 뭐가 있는지 살펴보다가 아래층에서 특이한 걸 발견했다. 테디베어 갤러리.

    그러고 보니 도란이 판다 엄청 좋아하는데. 길 가다가 귀여운 판다가 그려져 있으면 그걸 반드시 구매해야 하는 진성 판다덕후…. 곰도 판다 사촌이니까 어쩌면 좋아하지 않을까?

    “란아, 여기 갈래?”

    “어디? …테디베어 갤러리?”

    “응.”

    내가 가리킨 곳을 빤히 보더니 이내 나를 바라보면서 눈을 크게 뜨는 도란이다. …뭐? 왜? 의아하다는 내 표정에도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던 도란이가 감탄을 하기 시작한다.

    “와, 이쏘 누님. 이제 다른 곳 둘러볼 여유도 생긴 거야? 장족의 발전이네.”

    “…겨우 잊고 있었는데 자각하게 흐지 믈르그.”

    잠시나마 공포를 잊고 있었는데 도란이의 말에 순간적으로 온몸이 오싹해졌다. 아, 다시 생각해도 내가 제정신이 맞나 의심이 든다. 어떻게 자발적으로 높은 곳에 오자고 할 수가 있지? 이렇게 벌벌 떨면서?

    그래도 란이랑 같이 있는 덕분에 아까처럼 무섭지는 않다. 만일 여기에 란이랑 또다시 올 수 있다면, 오늘처럼 날 든든하게 지탱해준다면 또 올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큰 용기를 내서라도 또 오고 싶어.

    레스토랑에서부터 쭉 잡고 있던 도란이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손바닥을 간질거리듯 매만졌더니 웃음을 터트리는 도란이다.

    “아하하, 미안. 네가 괜찮다면 나도 좋아. 재밌을 것 같다.”

    나는 왜 뜬금없이 얘가 좋다고 하는 말에 설레고 난리야. 하다 하다 딴 거 좋다는 말에 대리만족이나 하고 있냐. 한심하다, 권이소.

    여러 가지로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테디베어 갤러리에 도착했다. 정말, 이름답게 그야말로 곰 인형 밭이다. 귀여운 인형, 개성 넘치는 특이한 인형. 종류도 다양하다. 테마에 맞춰서 여러 가지 옷을 입은 테디베어들이 무척이나 귀엽다.

    …물론, 토깽이 네가 인형 중에선 최고로 귀엽단다. 행여나 네가 더울까 봐 엄마가 나오면서 미니 선풍기까지 틀어주고 왔잖니. 그러니 질투하지 말렴.

    토끼 옷을 입은 테디베어를 보고 감탄하다가 문득 내 방 침대에 누워있는 토깽이가 생각나 토깽이에게 마음속으로 사과를 건넸다. 엄마는 너 말고 다른 인형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요.

    그리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귀여워하는 건 네 예비 아빠란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히어로 옷을 입은 곰을 보면서 어린애처럼 환히 웃는 도란이를 바라봤다. 거기다 티켓을 샀더니 주신 곰돌이 귀 머리핀까지 착용하고서. 귀여움이 배로 증가해서 심장에 해롭다.

    …역시 얘가 이 중에서 제일 귀여워. 큰맘 먹고 여기 오길 잘했어. 저절로 나오는 흐느낌을 억누르며 열심히 연사 버튼을 눌렀다.

    인형의 종류가 많은 것도 좋지만, 포토존이 잘 마련되어 있는 점도 마음에 든다. 박물관처럼 전시만 된 상태였다면, 사진 찍을 장소가 없어 찍을 맛이 안 났을 텐데. 덕분에 여러 가지 테마에 걸맞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열심히 사진을 찍으면서도 이따금 의구심이 몰려오긴 했다. 나는 과연 테디베어를 구경하러 온 건가, 테디베어를 보고 좋아하는 도란이를 구경하러 온 건가. 만족스럽게 찍힌 결과물들을 보니 이내 그런 의구심이 전부 날아갔지만.

    아무렴 어때, 목적이야 어찌 됐든 내가 행복하면 된 거지.

    신나게 구경했더니 어느새 갤러리의 끝에 도착했다. 조금 아쉽긴 했지만, 곧이어 우리를 반겨주는 테디베어 샵 덕분에 아쉬움이 금세 날아갔다. 직접 만든 핸드메이드 제품들이 가득하다. 갤러리에 있는 테디베어도 귀엽지만, 얘네도 귀엽네.

    이왕 여기 온 김에 기념품으로 하나 정도는 사도 괜찮지 않을까. 아직 도란이한테 마땅히 생일 선물을 주지도 못했으니 여기서 하나 사줘야지.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데 남녀 한 세트인 테디베어를 발견했다. 커플들을 위한 기념품인가? 옷도 커플룩으로 맞춰 입은 곰탱이 들이다. 꽤 귀엽기도 하고, 무엇보다 대놓고 커플 저격 아이템이라는 게 가장 마음에 드네.

    좋아, 이걸로 결정. 그래도 생일 주인공 의사는 물어봐야 하기에 옆에서 다른 걸 둘러보고 있는 도란이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란, 생일 선물로 이거 사줄게. 어때?”

    “응? 생일 선물 아까 그 케이크 아니었어? 그걸로 충분한데.”

    그건 생일선물이라기보다는 서프라이즈를 위한 준비물이었거든. 사실 오늘 내가 직접 만든 케이크를 메인으로 깜짝 생일파티를 직접 준비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케이크도 만들기로 한 거고.

    …시작부터 글러 먹었다는 걸 깨달아버려서 파투나긴 했지만.

    “그게 무슨 생일 선물이야. 대부분은 네가 다 만들었는데. 나는 자본과 노동력을 투자한 거밖에 없거든.”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뭐?”

    “내가 돕긴 했지만, 그래도 날 위해서 준비한 거잖아. 이소 네가 준비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걸 만들어보지도, 받지도, 먹지도 못했을 거야. 그러니까 오늘 받은 생일 케이크는 엄연히 네가 나에게 준 선물이라고 생각해. 내가 받은 것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

    이럴 때면 정말 의문이 생긴다. 얘 진짜 내 마음을 알고 이러는 걸까, 모르고 이러는 걸까. 분명 이전에도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하는 녀석이었긴 하지만. 아니, 전혀 모르고 있는데 이렇게 내 심장을 정확히 노릴 리가 없잖아. 하지만….

    너무 좋은데 머릿속이 복잡하다. 뇌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는 수많은 내적갈등이 여기저기서 펑펑 터지고 있다. 심장 박동을 원동력 삼아 그야말로 머릿속이 개판이 되어버렸다. 아주 잠깐 사이에.

    모르겠어. 이젠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냥 얘가 너무 좋다는 거 말고는 진짜 모르겠어.

    “…됐어, 내가 사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얌전히 받아.”

    “넵, 이쏘 누님.”

    계산을 끝마치고는 포장을 뜯어 란이에게 남자 테디베어 하나만 건넸다. 그리고 여자 테디베어는 내가 가로챘다. 사실 처음에는 두 개 다 주려고 했지만, 한낱 테디베어라고 할지라도 란이 근처에 여자가 있는 건 용납 못 한다.

    나도 온종일 못 붙어있는데, 어디 시건방진 곰탱이가 도란이 집에 붙어있어!

    “하하, 이렇게 나눠서 가지니까 꼭 커플 아이템 같다.”

    테디베어의 얼굴에 딱밤을 먹이는 도중에 도란이 말에 기습당해버렸다.

    기습하지 말라고! 커플 아이템 같은 게 아니라, 커플 아이템 맞거든? 그래도 커플 아이템이라고 생각해줘서 좋긴 하네.

    …어찌 됐든 처음으로 생긴 커플 아이템이니까 소중히 간직해야지. 아까까지만 해도 딱밤을 먹였던 곰돌, 아니 곰순이를 정성스레 쓰다듬었다.

    분명 남산타워에 왔을 때만 해도 해가 떠 있었는데. 바깥에 나오니 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둑어둑해졌다. 확실히 어두우니까 높은 곳에 있다는 실감이 아까보단 덜하다. 반짝반짝한 불빛들만 보이니까.

    그리고 내가 야경을 엄청 좋아하기도 하고. 이따금 한가하면 야경 명소 사진들을 뒤져볼 만큼 좋아한다. 꼭 사람이 만들어낸 밤하늘 같잖아.

    왜 사람들이 남산타워까지 발걸음 하는지 새삼 알 것 같네. 서울의 야경이 엄청 잘 보인다. 확실히 직접 보는 게 훨씬 낫네. 사진이랑은 비교가 되지 않아. 왠지 이 경치를 케이블카를 타고 단시간에 즐기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려오는 건 걸어서 내려오기로 했다.

    …조금 무섭긴 하지만, 도란이 손을 꼭 잡고 걸으니 마치 은하수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든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벌벌 떨었지만, 점점 아래가 가까워져 올수록 공포보다는 아쉬움이 깊게 자리 잡았다. 주변의 야경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는 게 아쉬워서. 그리고 도란이의 자상함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끝나가는 게 아쉬워서.

    꿈같은 순간은 30분 만에 끝나버렸다. 만일 다음에도 도란이랑 올 수 있다면 그때는 야경 감상을 제대로 해야지. 어두워서 사진도 제대로 나오진 않겠지만, 카메라에도 담고, 여러 얘기도 나누고.

    그러면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 수 있겠지.

    아쉬움을 간직한 채 마지막 계단을 내려왔다. 올 때까지만 해도 기절하는 건 아닐까 엄청 걱정했는데, 어떻게든 도착은 했네. 마냥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섭섭하기까지 하고. 크, 누구 말대로 장족의 발전이네. 나 스스로가 기특하다.

    “그래도 무사히 내려왔네. 고생했어, 이소야.”

    도란이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한 건지 생긋 웃으며 말한다. 그래, 넌 내 고생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 내가 왜 심각한 고소공포증을 앓고 있으면서도 여기까지 오자고 했는지. 요리도 더럽게 못 하면서 월차까지 내가며 생일 케이크를 준비한 건지.

    “란아.”

    “응?”

    “넌 내가 왜 오늘 고소공포증까지 무릅쓰고 여기 왔다고 생각해?”

    “…어, 내 생일이라서?”

    물론,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 평소 같으면 맞는 말이긴 하니 넘어갔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그냥은 못 넘어가. 이렇게까지 개고생했으니 알고 싶어. 네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50점,”

    “…응? 뭐야, 이거 퀴즈였어? 근데 왜 50점이야?”

    “그야 절반만 맞췄으니까. 100점 만점이니까 100점 받을 때까지 맞춰봐. 내가 왜 이랬는지.”

    내 말에 모르겠다는 듯 도란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래도 평생 알고 지냈다고 이거 하나는 확실히 알겠네. 얘가 정말로 내가 자기 생일이라고 여기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그거 말고 다른 이유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네. 딱 봐도 표정이 전혀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다.

    곰곰이 생각하던 도란이는 자기 나름대로 추측을 끝낸 건지 답을 말하기 시작한다.

    “레스토랑 음식이 먹고 싶어서?”

    “5점.”

    “아니면, 내가 누나한테 맞아 죽을까 봐?”

    “…30점.”

    “그것도 아냐? 뭐지? 담력 테스트해보고 싶어서?”

    “마이너스 10점.”

    “마이너스도 있어? …진짜 모르겠다. 인간이 극한상태에 도달하면 어떻게 되는지 실험해보고 싶었던 건가?”

    “…마이너스 50점!”

    점점 해괴한 답변만 내놓는 도란이다. 그 덕에 점수는 지하 아래까지 추락해버렸다. 이대로 계속해도 내가 원하는 답은 절대로 얻을 수 없을 것 같다.

    아니, 어떻게 된 인간이 딱 봐도 티가 팍팍 나는데 이렇게까지 눈치를 못 채냐!

    내가 자기만 계속 쳐다보고 있고, 계속 만지고 싶어 하고, 연락도 꼬박꼬박하고,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게 내가 봐도 티가 나는데! 내가 널 좋아하고 있다고 꾸준하게 어필해왔는데, 왜 그쪽으로는 요만큼도 가까워지지 않는 건데!

    이대로 있다가는 찜통에 오래 쪄버린 만두처럼 내 속이 뻥 하고 터질 것 같다.

    네가 이렇게까지 눈치를 못 채면 내가 직접 떠다 먹여주마. 이 망할 눈새야. 까짓것 내가 먼저 고백하겠다 이거야.

    “도란, 고개 숙여봐.”

    “…응? 이렇게?”

    도란이가 내 말에 순순히 고개를 숙인다. 언제나 그렇지만 말 하나는 정말 잘 듣는단 말이야. 고개를 숙이니까 도란이 얼굴이 잘 보인다. 눈을 덮는 긴 속눈썹도, 도톰하고 앙증맞은 입술도.

    나는 도란이 입술을 매만지며 내 쪽으로 도란이 얼굴이 오도록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그대로 내 이마로 도란이 이마를 쾅 소리 나게 박았다. 갑작스러운 박치기에 이마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도란이다. …으, 너무 세게 박았나. 나도 머리가 띵하다.

    “아! 갑자기 왜…”

    말을 하면서 고개를 들려고 하는 도란이다. 재빨리 도란이 양 볼을 잡고는 다시 도란이와 이마를 맞댔다. …얼굴을 이렇게 맞대고 있으니까 심장이 쿵쾅거린다. 이마의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당장에라도 키스하고 싶지만, 이성으로 억누르고는 입을 열었다.

    “…너 지금 머리 아프지.”

    “네가 그렇게 세게 박았는데 당연히 아프지!”

    “아프다니까 됐네. 일주일 동안 그것보다 몇 배로 아프도록, 그야말로 골 빠개지도록 생각해봐. 내가 오늘 왜 이랬는지. 일주일 뒤에 알려줄 테니까.”

    아무리 나라도 도란이 생일날 차이고 싶진 않으니까. 그리고 멋대가리 없이 야외에서 고백했다가 차이고 싶지도 않고. 일주일 동안 나도 네 머리에 제대로 새겨질 고백을 하기 위해 뼈 빠지게 노력할 테니까. 너도 그동안 조금이라도 알아채고 있어.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 작품 후기 ============================

    soae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43화까지 왔는데 키스 한 번 못해본 두 사람 (울컥) 언젠가는....할 ... 수... 있겠죠? (착잡)

    sn님// 저도 여러모로 이소가 존경스럽습니다. 무서워하면서도 할 건 다 해 (...)

    테디베어를 보러가서 란이 덕질을 하지를 않나, 키스타이밍에 박치기를 하지를 않나. 점점 란이를 닮아가는 이소입니다. (한숨)

    그리고 이번주 일요일 +_+ 드디어 전에 예고했었던 신작이 나옵니다 여러분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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