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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44화 (44/97)
  • 00044 41. 아찔한 흔들다리 효과  =========================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화장하고, 머리를 손질하고, 옷을 입은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다행히 거울을 보니 사람다운 형태는 하고 있어서 그나마 안도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도란이 폰이랑 태블릿은 챙겨서 나온 나다.

    현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니 먼저 준비를 마친 도란이가 기다리고 있다.

    연한 파스텔 톤을 좋아하는 도란이라서 그런지 지금도 하늘색 리넨 셔츠를 입고 있다. 뭐, 파스텔 톤이 무척 잘 어울리기도 하지만.

    봐, 지금도 엄청 잘 어울리잖아. 단추를 2개 정도 풀고 있는 것도 그렇고, 소매를 7부 정도로 접은 것도 그렇고, 아까 반소매 티를 입었을 때보다 섹시한 것 같…

    너는 이런 비상상황에서도 불쑥 튀어나오니, 음란마귀야. 안 돼, 떽.

    그러고 보니 내가 입은 옷이랑 색이 비슷하네. 의도하진 않았는데 꼭 커플룩 같다. 으아, 이게 좋아서 심장이 떨리는 건지, 아니면 다가올 공포가 무서워서 심장이 떨리는 건지 모르겠다. 남산타… 단어만 떠올렸는데도 오금이 저린다.

    내 표정이 급격히 안 좋아진 건지, 도란이가 나를 걱정스레 바라본다.

    “…역시 안 가는 게 좋겠다. 이소야, 내 폰 줘봐.”

    “진짜 괜…찮다고. 나 괜찮다니까?”

    “이렇게 벌벌 떨면서 무슨….”

    “아, 안 떨거든! 됐어, 가자 출발!”

    안 떨기는 무슨. 목소리부터 도란이를 잡아끌고 있는 손까지 벌벌 떨리는데. 정신이 실종신고 한 상태인데도 이건 확실히 알 것 같다. 내가 지금 휴대폰 진동 최대 세기보다도 덜덜 떨고 있다는 거.

    그래도 간신히 도란이 차 앞까지는 왔다. 차 옆에 서 있으면서도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만 바라보고 있는 도란이다. 내가 열라고 하자 잠시 고민하던 도란이가 한숨을 쉬면서 차 문을 열었다.

    운전석에 앉고서도 시동을 걸지 않던 도란이가 머리를 헝클어트리더니 나를 쳐다본다.

    “이소야, 그냥 우리 다른 데 가자. 응?”

    “…싫어. 빨리 운전이나 해.”

    “권이소.”

    “너 자꾸 그러면 내가 운전한다?”

    8년간 썩고 있는 장롱면허의 실력을 보여주리? 내 말에 도란이가 인상을 찌푸린다. 나를 보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이내 시동을 거는 도란이다. 남산으로 향하면서 우리 둘은 한마디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심심했겠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변해가는 창밖 풍경을 보며 부디 등산부터 하산까지 무사히 해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왔구나. 남산 주차장. 혹시나 다른 데로 갈까 봐 내심 걱정했는데 오긴 왔네. 차에서 내려서 경치를 보니 좋긴 하다. …앞날이 심히 걱정되긴 하지만. 천천히 고개를 들어 꼭대기에 보이는 남산타워를 쳐다봤다. 쳐다만 보는데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저기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세상에.

    “…마지막으로 물을게, 이소야. 진짜 괜찮아?”

    “응, …괜, 괜찮아.”

    “…하아, 일단은 가겠지만, 도중에 못가겠으면 말해. 알았지?”

    “…응.”

    사실 이제 겨우 시작인데도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내 발로는 못 걸어가겠다. 누가 남산타워까지 나 좀 순간 이동 시켜줬으면 좋겠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울며 겨자 먹기로 걸음을 내딛는데 케이블카가 오는 게 보인다.

    …잠깐, 케이블카?

    어차피 내 발로도 못 걸어가겠는데, 저거 타고 가면 그나마 시간이라도 단축되잖아.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한꺼번에 확 올라가면 오히려 괜찮지 않을까. 올라가면서 눈 꼭 감고 있으면 아무렇지 않을지도 몰라.

    “란아, …우리 저거 타자.”

    “…저거? 케이블카? 네가?”

    내 말에 진짜 놀랐는지, 입을 다물지 못하는 도란이다. 너도 내가 이런 제안을 하는 게 이상하지? …나도 그래. 근데 어쩌겠어. 내 발로 걷는 것보다 차라리 저게 나은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도란이 손을 잡았다. 가만히 있으면 도란이가 분명 또 걱정하겠지. 심호흡, 릴랙스. 좋아, 가자. 도란이를 이끌고 성큼성큼 케이블카 매표소로 향했다.

    평일 이른 오후인데도 생각보다 사람들이 꽤 있다. 대부분은 외국인 관광객인 것 같다.

    평일이라서 금방 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기다려야 한다니. 이쪽이 오히려 더 초조하잖아! 엄마한테 응징당하는 거 기다리는 거보다 몇백 배는 괴롭다고! 줄이 점점 짧아질수록 불안이 날 잡아먹을 듯이 커진다.

    “…이소야, 너 손에서 땀이 엄청 나는데.”

    “더, 더워서 그래. 더워서.”

    “…그리고 내 손 점점 세게 잡고 있거든.”

    “아, 미, 미안. 놓을까?”

    “놓아달라는 게 아니라, 걱정되니까 이러지. 손은 얼마든지 세게 잡아도 상관없어.”

    지금 내 심장이 찌르르 울리는 건 무서워서인가, 도란이의 말에 설레서인가. 아, 이젠 진짜 모르겠다. 도란아, 무서워, 살려줘. 이러다가 나 뉴스에 뜨는 거 아닐까. 고소공포증 여성 A 씨, 케이블카 대기 중 심장마비로 숨져.

    아니, 딴생각, 이미지 컨트롤을 하자.

    여긴 남산이 아니다. 나는 높은 곳에 가는 게 아니다. 나는 지금 도란이랑 신혼여행을 간… 아, 망했다. 심장이 더 세게 뛰잖아. 미치고 환장하겠네!

    혼자서 속으로 발악을 하는데 어느새 줄이 우리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진짜 코앞. 우리가 맨 첫 번째 대기자다.

    아까 보니까 사람 꽉 채워서 케이블카 탑승하던데. 까딱하다가 밑으로 떨어지는 거 아냐? 커다란 케이블카가 줄에만 의지해서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게 말이 돼? 말이 되냐고! 거기다 사람까지 많이 타는데 중량이 감당될 리가 없잖아!

    아니, 잠시만. 꽉 채워서 탑승한다는 건, 첫 번째인 우리가 가장 구석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건데, …케이블카에서 구석이라는 건 창가 쪽밖에 없잖아.

    엄마! 아빠! 이혁아! 출가외인이라고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멍청한 뽀삐야! 살려줘!

    제발 천천히 오라고 간절히 비는데도 커다란 체구를 빠르게 들이미는 케이블카다.

    아, 진짜 죽을 것 같다. 이제는 다리까지 부들부들 떨려. 어떻게 하지.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도 없고. 어느새 케이블카 문이 열리고, 탑승객들이 하나둘 내리고 있다.

    진짜… 나 저거 타는 거야? 저거 타는 거냐고!

    말 그대로 머릿속이 혼돈과 파괴로 엉망진창이 됐다. 몸은 벌벌 떨리고, 눈앞은 캄캄하고. 그야말로 공황상태. 그런데 그나마 의지하고 있던 도란이의 손이 내게서 빠져나간다.

    가뜩이나 죽을 것 같은데 왜 너까지 손을 빼고 그러는데! 내가 너무 세게 잡아서 아파? 땀 차서 싫어? 으아아앙, 내가 미안해!

    도란이가 점점 흐리게 보인다.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나 아마 눈물 고인 것 같아. 무서우니까 도란이 옷깃이라도 잡아야겠다. 그러려고 손을 뻗는데, 아까 잡고 있던 손과 반대쪽 손으로 내 손을 잡는 도란이다.

    “이 손 잡아.”

    “…응.”

    맞잡기에는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내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지. 게다가 20분 가까이 땀에 젖은 손에 잡혀있었으니 손 건강을 위해 환기도 필요할 거야.

    응. 난 괜찮… 다고 생각하는데, 도란이가 갑자기 한쪽 팔로 내 어깨를 꽉 껴안는다.

    그 상태로 나를 이끌고 케이블카로 향하는 도란이다. 도란이가 나를 감싸고 있어서 그런지 좀 안정된 것 같다. 한 걸음이라도 내디디면 금세 털썩 주저앉을 줄 알았는데, 무사히 케이블카에 탑승한 걸 보면.

    …안정된 것과는 별개로 심장이 세차게 뛴다. 괴로워. 그런데 너무 좋아.

    꼭 흔들다리 효과 같잖아. 무서운 상황에서 심박 수가 증가하는 걸로 인해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다는 이론. 내 경우에는 무서운 상황을 겪기 전부터 좋아하고 있긴 했지만.

    뭐랄까, 이 쿵쾅거리는 심박 수가 오히려 증폭제가 된 거 같긴 하다.

    내 예상대로 처음에 타서 그런지 점점 구석 쪽으로 밀리는 우리였다. 사람이 타면 탈수록 점점 가까워지는 창밖 풍경에 그야말로 사형선고가 가까워져 오는 기분이다. 으, 어떻게 해. 무서워. 눈이라도 감고 있을까.

    도란이 손을 꼭 잡고서 눈을 감는데, 출발한다는 신호음이 들린다. 아악! 알겠으니까 예고하지 말라고! 가뜩이나 죽을 것…

    …뭐지. 내 몸이 갑자기 움직인 것 같은데. 원래 케이블카 타면 사람이 안에서 움직이게 되나? 슬며시 눈을 뜨자 눈앞에 온통 하늘색만 보인다. 분명 창밖이 보여야 하는데?

    신호음 때문에 공황상태에 빠졌던 나는 천천히 상황판단을 하기 시작했다. 하늘색에게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 코끝에 은은하게 감도는 익숙한 체향, 무엇보다… 나를 감싸는 도란이의 팔.

    나 지금 도란이한테 안겨있는 거야?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해. 도란이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어. 이번엔 확실히 알 것 같다. 무서워서 심장이 뛰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잠시만 나한테 안겨있어. 도착하면 알려줄게.”

    “…응.”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생긋 웃더니 내 얼굴을 자기 가슴에 파묻게 하는 도란이다. 가까워지니까 더 잘 느껴진다. 남들보다 조금 높은 체온도, 사람을 차분하게 만드는 심장 소리도. 아까 먹었던 요거트 케이크의 새콤달콤한 향이 조금은 몸에 밴 것 같아.

    평소보다 도란이의 체향이 달콤하게 느껴져.

    좀 더 선명하게 느끼고 싶다. 도란이 손을 잡고 있던 걸 살며시 놓고 그대로 도란이를 꼭 끌어안았다. …좋다. 케이블카가 움직이는 느낌도, 사람들의 말소리도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너무 좋아.

    내 심장, 지금 엄청 뛰고 있네.

    란아, 너한테는 닿고 있어? 내 심장 소리. 무섭다고 비명 지르던 아까와는 다른 말을 내뱉는 이 소리가. 쉴 새 없이 말하고 있는 이 소리가 너한테 전부 닿았으면 좋겠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 작품 후기 ============================

    sn님// 설레하면서도 할 건 다 하는 강심장, 권이소 칭찬해 ^p^♡

    사촌누님의 의도치 않은 빅픽쳐 bb..

    우리 란이 듬직한 구석이 있는 남자입니다 *-_-* (흡족)

    다음 이야기를 얼른 올려드리고 싶지만, 제가 화요일까지는 연재가 불가능해요 `ㅅT..

    독자님들.. 수요일까지 조금만 기다려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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