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3 40. 데이트 장소가 무서운데요. =========================
냉동실에서 케이크 무스가 얼 때 동안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이나 시청하기로 했다. 평일 낮 시간대라 봤던 예능을 다시 보는 게 전부기는 하지만. 그래도 옆에 도란이가 같이 있으니 지루하지는 않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저절로 입이 귀에 걸린다.
그나저나 진짜 케이크 완성되면 뭐하지. 란이가 좋아하는 딤섬이나 먹으러 갈까.
“란아, 케이크 먹고 나서 딤섬 먹으러… 자냐.”
옆을 쳐다봤더니 고개를 푹 숙인 채 쿠션을 꼭 끌어안고 숙면 중인 도란이다. 아, 진짜. 자는 것도 귀엽고 난리야. 사진 찍어뒀다가 보고 싶을 때마다 봐야지.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셔터 누르는 걸 멈출 수가 없다.
그나저나 저 자세, 귀엽긴 하지만, 저러고 자면 목이고 어깨고 안 아픈 데가 없을 텐데. 케이크 얼 동안 침대에서 재워야겠다.
“란아, 란. 일어나, 여기서 자지 말고 침대에서 자. 응?”
“…우으응.”
움직이기 싫은지 고개를 젓는 도란이다. 너 목 아플까봐 걱정돼서 그러지. 걱정 담긴 내 말에도 느릿느릿 고개를 젓던 도란이가 이제는 아예 미동도 없다. 완전히 곯아떨어졌네. 새벽 늦게 들어왔다더니 많이 피곤한가 보다. 어쩐지 미안하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잠시 고민한 나는 그냥 도란이를 소파에 눕히기로 했다. 도란이와 거리를 조금 벌린 뒤, 내 쪽으로 도란이 머리를 조심스레 끌어당겼다. 내가 이끄는 대로 스르르 딸려오던 도란이가 내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분명 전에도 무릎베개해준 적 있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긴장되고 떨리는 거지. 온 신경이 죄다 허벅지에 쏠린 것 같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도란이가 불편한지 이리저리 뒤척인다. 그때와 달리 반바지를 입고 있어서 머리카락이 비비적대니까 간지러워 죽을 것 같다. 새근거리는 숨결도 허벅지를 타고 고스란히 느껴지고. 아악! 날아갈 듯이 좋은데 너무 괴롭다!
다행히 자리를 잡은 건지 웅크린 상태로 얌전히 자는 도란이다. 잘 버텼어, 나. 기특해, 아주 칭찬해. 간신히 평정심을 되찾은 나는 그제야 도란이가 잠든 모습을 살펴봤다.
꼭 까만 대형견이 무릎 베고 잠든 것 같아. 왜 사촌 누나가 애칭으로 겸디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네. 자는 모습도 어쩜 이렇게 귀여운지.
계속 보고만 있으려니 심심해서 도란이를 살짝살짝 건드려봤다.
보들보들한 볼도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려보고, 예쁘게 내려앉은 속눈썹도 쓸어보고, 말랑거리는 입술도 꾹꾹 눌러 보… 아, 젠장. 뽀뽀하고 싶다. 도란이가 정면으로 누워있기만 했었으면 시도해보는 건데!
…덜 익어서 못 먹는 감, 찔러보기라도 해야지. 흑흑. 다 익으면 남김없이 집어삼킬 거야.
켜둔 텔레비전은 뒷전으로 둔 채 도란이만 바라보고 있는 나다. 도란이의 까만 머리칼을 쓰다듬으려는 순간, 맞춰뒀던 스마트폰 알람이 울렸다. 망할, 시곗바늘아. 왜 전력 질주를 하고 난리냐고. 전력 질주는 근무시간에만 해줘도 되거든!
시끄러운 알람이 귓가를 두드리자, 그제야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도란이다. 2시간 동안 줄곧 만져댄 나도 대단하지만, 그렇게 만졌는데도 꿈나라에서 벗어나지 않는 도란이도 대단하다.
“잘 잤어?”
“…응. 푹 잔 거 같아. 꿈에서 아기 판다가 내 얼굴에 안겨서 비비적거렸다?”
“…좋, 좋았겠네.”
“응, 좋았어.”
비몽사몽인 상태로 배시시 웃는 도란이다. 악, 기습당했다.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튀어나오려는 흐느낌을 참았다. 나도 네 얼굴 여기저기 막 만질 수 있어서 행복했어. 종종 무릎에다가 눕혀서 재워야지.
도란이가 남은 잠을 털어내기 위해 세수를 하러 가서, 내가 냉동실에 얼려둔 케이크를 꺼냈다. 무스가 좀 적긴 하지만, 일단은 케이크의 모양을 하고 있어 안심했다. 덜덜거리는 손으로 무스 틀에서 케이크를 조심스레 빼냈다.
약간 찌그러지긴 했지만, 이 정도면 만족스럽게 꺼내진 것 같다.
때마침 도란이도 욕실에서 나왔다. 기대 이상인지, 도란이도 케이크를 보고 탄성을 지른다. 첫 시식은 당연히 생일 주인공이 해야지. 들고 있던 포크로 케이크를 조금 떠서 도란이에게 먹였다.
오물거리면서 케이크를 음미하던 도란이의 표정이 점점 밝아진다.
“…와, 이거 진짜 맛있어.”
“진짜? 얼마나 맛있는데?”
“먹어본 케이크 중에 제일 맛있는 거 같아.”
입맛이 까다로운 도란이가 이렇게까지 맛있다고 말하는 건 진짜 맛있다는 건데. 잔뜩 기대하면서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상큼하면서 시원한 무스가 부드러운 시트와 함께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전혀 느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달지도 않고, 상큼하면서 달콤한 맛이 입맛을 돋우는 게 진짜 내가 먹어본 케이크 중에 베스트다.
“헐, 대박. 이게 내 손을 거쳐 간 거라고?”
“푸하하! 권이소 말하는 거 진짜 웃겨.”
“야, 나는 진심으로 놀란 거거든? …와, 진짜 말도 안 돼.”
감탄하면서 케이크를 다시 입에 넣는데, 싱크대로 가서 숟가락 두 개를 들고 오는 도란이다.
“이런 케이크는 퍼먹어야 제맛이지.”
“크, 역시 뭔가 좀 아네.”
케이크를 만들고 남은 제누와즈와 딸기를 케이크와 곁들여 먹었다. 폭신폭신하고, 상큼하고, 달달하고. 단 건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데도 쉴 새 없이 입안으로 들어가는 케이크다. 도란이도 입맛에 맞는지 엄청 맛있게 먹는다.
만들길 잘했다. 잘 먹는 모습을 보니 상상한 것보다 훨씬 뿌듯하고 기분 좋아.
도란이 손 크기만 하던 케이크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설거지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뭔가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것 같은 이 찝찝함은 뭐지? 분명 잘 먹었는데? 처음 만들어보는 생일 케이크가 이만큼 맛있으면 대성공 아닌가?
…잠깐, 생일 케이크? 맞다! 이거 생일 케이크였지!
그제야 뭘 깜빡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명색이 생일 케이크인데 초는 꽂고 먹었어야지! 기껏 초까지 사다 놓고 뭐 하는 거야! 내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자 도란이가 놀라서 다가왔다.
“뭐야, 왜. 싱크대에서 바퀴벌레라도 나왔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니까 그런 말 하지 마. 그게 아니라 으…, 우리 생일 케이크에 초도 안 꽂고 그냥 먹었어.”
“…어, 그러고 보니 그러네?”
잠시 멍하게 있던 도란이가 아이처럼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어이없는 상황에 덩달아 나도 빵 터져서 숨넘어갈 듯 웃었다. 한동안 배를 잡고 웃던 우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상의했다.
“어쩌지? 다시 만들 수도 없고.”
“그러게. 남은 제누와즈도 다 먹어버렸잖아. 초코파이라도 하나 사서 초 꽂을까?”
“아, 허탈해. 기껏 만들었는데, 정작 촛불 부는 케이크는 400원짜리 초코파이가 되어버렸어.”
“하하, 맛있었으면 됐지 뭐.”
하긴 딴생각은 전혀 안들만큼 맛있긴 했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생긋 웃는 도란이다. 그러더니 초코파이를 사 오려는지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거품 묻은 손을 대충 씻고는 도란이를 붙잡았다.
“초코파이는 지금 말고, 이따 밖에 나가서 사자. 내가 딤섬 사줄게.”
“와, 이쏘 누님. 내 생일이라고 유독 신경 써주는데?”
“왜, 내가 신경 쓰고 싶어서 쓰겠다는데 뭐 문제 있어?”
“아뇨, 전혀요.”
싱글거리며 미소 짓는 도란이가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시 멈칫하던 도란이가 이내 피식 웃으며 내가 쓰다듬기 편하도록 고개를 숙인다. 아, 진짜. 말 잘 듣는 대형견 같잖아.
“설거지할 동안 딤섬 가게 예약이나 해두고 있어. 거기 웨이팅 길잖아.”
“오케이.”
식탁 의자에 앉아 태블릿을 만지작거리던 도란이가 갑자기 화들짝 놀랜다. 뭐지? 예약 손님 다 찬 건가? 놀란 눈으로 태블릿을 살펴보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도란이다.
딤섬 가게에 전화를 거는 줄 알았는데, 도란이 입에서 튀어나온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단어였다.
“누나! 갑자기 뭐야! …아니, 밥 먹으라고 보내준 건 알겠는데.”
“…뭐야? 누구? 사촌 누나?”
“응. …누나, 그냥 마음만 받을게.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면 취소하고 다른 데로. 하아…, 예약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취소를 못 한다고? 그럼 미리 물어보든가!”
답지 않게 신경질을 내던 도란이가 한숨을 푹 쉰다. 대체 뭐 때문에 저러지? 괜히 나까지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묵묵히 전화를 받던 도란이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응, 화내서 미안해. 또 무슨 인증샷이야! 그냥 나 말고 누나랑 자형… 여보세요? 누나? 누나! 아, 끊었어!”
“왜, 뭐야. 무슨 일인데. 응?”
“…누나가 레스토랑을 예약해뒀는데 꼭 먹고 인증샷까지 찍어 오래. …하아, 혁이 시간 되려나.”
…저기요. 날 눈앞에 두고 왜 망할 이혁이한테 전화를 거는 건데요. 딱 봐도 너랑 나랑 먹으라고 언니가 챙겨준 거잖아! 이 눈치 없는 놈아! 행여나 전화가 걸릴까 도란이 손에 들린 폰을 재빨리 뺏어서 종료 버튼을 눌렀다.
“왜 옆에 있는 나를 놔두고 이혁이한테 가자고 하는데!”
“…너랑 가기는 좀 그런 곳이니까 그러지.”
“나랑 가기 그런 곳이 대체 뭔데! 어디야? 내가 확인할래.”
내 분노에도 오히려 날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도란이다. 대체 어디길래 저러는데? 난감하다는 듯 한숨 쉬던 도란이가 태블릿을 가져와 내게 내밀었다. 대문짝만하게 커플석 커플 코스라고 되어있다. 지금 이 인간, 나랑 커플석 앉아서 커플 메뉴 먹기가 싫다 이거야?
나랑 앉는 건 별로고, 이혁이랑 앉는 건 괜찮냐! 그게 더 이상하거든?
“…너 지금 나랑 커플석에 앉기 싫다 이거야?”
“그거 말고, 밑에… 장소를 봐, 장소를.”
“장소 뭐!”
도란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부분을 살펴봤다. 남산타워가 뭐가 어… 잠, 잠깐. 남산타워요? 혹시나 해서 다시 확인해도 남산타워라고 쓰여 있다.
…세상에. 맙소사. 단어만 봤는데도 온몸에서 식은땀이 줄줄 나온다.
웬만한 건 겁내지 않는 내가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세 가지. 엄마, 벌레, …그리고 높은 곳.
대부분 사람들이 높은 곳을 무서워한다지만 나는 그 경우가 좀 심하다. 오죽하면 높은 곳이 무서워서 등산도 못 한다. 5~6층 정도는 어떻게든 견딘다지만, 10층 이상이 되면 무서워서 바깥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수학여행으로 제주도에 갔을 때도 애들은 다 올라가는 성산 일출봉에 나 혼자 무섭다고 안 올라갈 정도인데. 아, 혼자는 아니었구나. 움직이기 귀찮다고 드러누운 도란이도 있었으니.
그런 내가 높은 산, 그것도 모자라 산꼭대기 위에 세워둔 타워에 갈 수 있겠냐고!
으, 싫어. 끔찍해. 무섭다고. 상상만 하는 걸로도 눈앞이 아찔하고, 손발이 덜덜 떨려. 도란이가 불안해하는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다독인다.
“그냥 혁이랑 빨리 가서 밥만 먹고 올게. 생일 파티야, 이따 셋이 같이하면 되지.”
“…싫어.”
“응?”
“…그냥 나랑 같이 가.”
높은 곳은 떠올리기만 해도 온몸이 벌벌 떨릴 정도로 싫지만, 도란이랑 떨어지는 게 더 싫다. 무엇보다 단둘이 생일을 맞고 싶단 말이야. 언제나 생일은 가족들이랑 보내는 도란이니까, 둘이서만 생일을 보낼 기회가 또 언제 올지 모르고.
“괜찮으니까 무리하지 마. 아니면, 그냥 내가 누나한테 말해서 예약비를 돌려주면…”
“아니, 갈래. 갈 거야.”
언니가 특별히 신경 써준 거잖아. 장차 미래의 형님이 되실 분의 호의를 저버릴 수야 없지. 남산타워. 단어만 떠올려도 오금이 저리긴 하지만, 죽기야 하겠어? 어차피 사람 사는 곳이니까 놀러 가기도 하는 거겠지.
애써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데도 왜 이렇게 눈앞이 캄캄하냐.
“어쨌든 나 준비할 거니까 너도 위에 올라가서 외출준비 하고 와. 빨리.”
“…진짜 괜찮겠어?”
“진짜 괜찮아! 얼른 준비하러 가 얼른.”
발걸음을 떼지 않는 도란이를 억지로 현관 밖으로 쫓아 보내고는 문을 쾅 닫았다. 혹시나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올까 봐 이중 잠금까지 걸었다. 다행히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도란이를 쫓아 보내고서 눈을 꼭 감고 기도했다.
부디 무서워서 기절하지 않게 해주시고, 아니 그냥 살려만 주세요.
============================ 작품 후기 ============================
soae님// ...? 응? 제가 작가의 말로 스포를 해버린 건가요 ;_;.. 네! 또연은 빠르면 한 달안에 끝나요! 신작은 빠르면 2주 안에 연재할 예정이니 동시연재이지 않을까요 :D
그거 아세요 여러분? 불금도 저에게는 주말입니다. ;)
사실 일요일부터 화요일 저녁까지 연재가 불가능해서 금요일에 올리는 거지만요 Tㅅ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