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8 37. 자급자족 생일 케이크 =========================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별짓을 다 한다더니 내가 바로 그 꼴이다. 오늘이 도란이 생일이라고 월차까지 내다니. 게다가 지금 내 주방에는 베이킹 재료들이 널려있다. 도란이에게 직접 만든 케이크를 선물하기 위한 준비물들.
매사에 취향이 확고한 도란이답게 은근히 입맛도 까다롭다. 단 건 좋아하지만, 느끼한 건 좋아하지 않아서 시중 빵집에서 파는 케이크들은 대부분 입에도 대지 않는다. 그렇다고 떡 케이크 같은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라서 어릴 적 도란이 생일에는 케이크가 없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생크림이나 초코케이크 말고도 다양한 케이크들이 많이 생겼으니까.
그래도 좋아하는 남자의 생일날, 내가 살면서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걸 해주고 싶었다. 란이 취향에 딱 맞는 케이크 만들어주기. 내가 정성 들여 만든 케이크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무척 행복할 것 같아.
…라고 생각해서 패기롭게 준비하긴 했는데, 나는 왜 이론과 실전은 다르다는 걸 매번 겪으면서도 현실에 순응하지 못하는 걸까.
남들은 쉽게 한다는 밀가루를 체치는 것부터 난항을 겪고 있는 나다. 이거 힘이 아니라 요령이 필요한 거구나. 뒤늦게 깨달아버린 게 문제지만. 체에 치라길래 체 손잡이 부분을 있는 힘껏 퍽퍽 쳤더니 주방이 눈 쌓인 것처럼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젠장.
주방은 엉망이 됐는데 정작 밀가루는 건진 게 별로 없고. 근데 이 짓을 3번이나 더 하라고? 시작부터 한숨만 나온다. 매캐한 공기에 기침을 몇 번 한 뒤, 이번에는 좌우로 살살 흔들어봤다.
오, 나온다. 나오는데… 속 터져. 뭐가 이렇게 자잘하게 나와. 구멍은 많고, 밀가루 입자는 작은데.
더딘 속도에 참을성 없이 과격하게 흔들었더니 다시금 밀가루가 하늘에서 눈처럼 소복하게 내려온다. 하하하하하. 이 까짓것 안 한다고 문제 생기겠냐며, 과감히 패스할까 했더니 밀가루를 체치지 않으면 시트가 부드럽지가 않단다. 미치겠다, 진짜. 이거 하나 만들다 보면 생일 끝나겠네.
한숨을 쉬며 시계를 보니 어느덧 11시다. 맙소사.
내가 일어나서 준비한 게 9시쯤이었는데. 농담이 아니라 이 속도로는 온종일 생일 케이크만 만들 것 같다. 아무래도 요리 잘하는 유니셰프의 도움이 절실한 것 같은데, 평일이라 친구들은 전부 직장에서 썩고 있을 게 뻔하다. 엄마도 한창 태권도 도장 청소할 시간이고.
내 주변에서 요리 잘하고, 평일 낮 시간대에도 한가한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단 한 사람밖에 없다. …란이. 생일 주인공한테 생일 케이크 만드는 걸 도와달라고 하다니. 이게 무슨 미친 짓인가 싶은 생각이 들지만, 도움의 손길이 없으면 내 처참한 요리 실력으로는 만들지도 못할 것 같아.
제발 란이에게 별다른 일정이 없길 바라며,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꽤 길게 가는데도 받지를 않는다. 바쁜가? 다시 걸어야 하나? 전화를 끊으려는데 수화기 너머로 란이 목소리가 들린다.
“…으응, 누나…. 나 잔다…니까.”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었는지 목소리가 잔뜩 잠겨있다. 잠긴 목소리로 칭얼대는데 귀엽고, 묘하게 관능적이고. 으, 환장하겠네, 진짜. 릴랙스! 평정을 유지해, 권이소.
“나 누나 아닌데.”
“…으응? 아, 이소 목소리 들려. 흐흥.”
아, 순간 이성 잃고 괴성 지를 뻔했다. 잠결인데도 내 목소리 알아채지 말라고. 아니, 좋아죽겠으니까 내 목소리만 매일 알아채 주세요.
도저히 못 참겠어서 수화기를 가리고 기쁨에 겨운 흐느낌을 내뱉었다. 도로 잠들어 버릴까 봐 흐느낌을 멈추고는 도란이에게 말을 걸었다. 다행히 비몽사몽이긴 해도 아직 깨어있는 도란이다.
“지금이 몇 신데 아직 자고 있어. 어제 늦게 잤어?”
“…나 집에 새벽 늦게 들어와서. 몇 시야?”
“11시.”
“…밤? 나 12시간 넘게 잔 거야?”
“뭐래.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대낮이거든요.”
“아하하, 정말이네. 왜 어둡나 했더니 눈 감고 있어서 그랬구나.”
바보 같은데 그마저도 귀여워 죽겠다. 나 어떻게 해. 진짜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나 봐. 눈앞에 있었으면 토깽이 안 듯 꼭 끌어안았을 거야. 혹시나 생일이라고 선약을 잡아놓은 게 있나 물어봤더니 별다른 약속이 없다고 하는 도란이다. 살았다.
“란아, 지금 여기 올 수 있어?”
“너희 출판사? 점심 먹자고?”
“아니, 우리 집. 네 아래층.”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하더니 갑자기 전화를 끊는 도란이다. 뭐지? 뒤늦게 스케줄 있나 확인하는 건가. 어찌 됐든 기다리라니까 기다려야지. 스마트폰을 빤히 바라보며 기다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도란이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갑자기 왜 끊었어?”
“아무리 봐도 오늘 평일인데. 폰이 고장 난 건가? …아니, 나 아직 꿈꾸나 봐. 잘 자.”
“뭔 소리야! 내가 오늘 회사 안 간 것뿐이거든? 별다른 일정 없으면 나 좀 도와줘.”
“…응? 응, 알았어. 씻고 내려갈게.”
여전히 몽롱한 듯 보이는 상태에 도란이가 다시 잠들어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온다니까 기다려야지. 그동안 설원이 되어버린 주방이나 깔끔히 치워야겠다.
주방 청소를 끝냈는데도 도란이가 오지 않아서 다시금 케이크 레시피를 살펴봤다. 어제 마트에서 재료를 준비했을 때만 해도 자신감에 넘쳤었는데, 1단계부터 막혀버린 지금, 다시 레시피를 보니 착잡하다. 다음에 만들 때, 케이크 시트는 사와야겠다.
근데 진짜 안 오네. 깨우러 가야 되나? 현관으로 걸어가는데 도어락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왔다! 문이 열리고 반쯤 눈을 감고 있는 도란이가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씻고 바로 왔는지 머리카락에 물기가 흥건한 도란이다. 얘 은근히 자기 머리카락을 내버려 둔다니까. 헤어샵은 자주 가면서 관리는 소홀하면 어쩌자는 거야.
“너 또 머리 안 말리고 그냥 왔어? 거실에 앉아있어. 말려줄 테니까.”
“괜찮은데. 있다 보면 마르겠지.”
“또 감기 걸려서 골골대지 말고 그냥 앉아있어.”
“…감기? 더운… 아니, 너희 집 왜 이렇게 추워? 에어컨 틀었어?”
응. 케이크 만들겠다고 생 쇼하면서 퍼덕였더니 더워서 견딜 수가 없었거든. 급격한 온도변화에 잠시 몸을 움츠리던 도란이가 거실 바닥에 얌전히 앉는다. 화장대 서랍에서 드라이기를 꺼내서 정성스레 머리카락을 말려줬다.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질이는지 도란이가 바람 빠지는 웃음을 터트린다. 그 웃음이 귀여워서 당장에라도 아까 못 안았던 것까지 끌어안고 싶었지만, 행여나 감기 걸릴까 봐 꾹 참고는 뽀송뽀송할 때까지 말렸다. 크, 내 인내력 칭찬해.
드라이기 전원을 끄자마자 도란이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자기 목 주변을 두르고 있는 내 팔을 잡더니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도란이다.
“…따뜻해서 좋다. 근데 뭐 도와주면 되는데?”
“추워? 에어컨 꺼야겠다. 뭐 도와달라고 불렀냐면, 주방에 저거 보이지. 저거 만드는 것 좀 도와주라.”
“저게 뭔데?”
“네 생일 케이크 재료.”
도란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네 생일 케이크 재료라고 다시 한번 친절히 말해줬는데도 상황파악이 안 되는지 날 멀뚱히 쳐다본다. 잠시 굳어있더니, 이내 상황파악을 하려는 건지 도란이가 주방 재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까, 저기 주방 카운터에 널려있는 재료들이 내 생일 케이크를 만들 재료들이고, 내 생일 케이크를 만드는 걸 지금 나보고 도와달라고 하는 게 맞는 거지?”
“응, 아주 정확해.”
“…풋, 푸하하하하하하하!”
상황파악이 끝난 도란이가 바닥을 주먹으로 치면서 넘어갈 듯 웃기 시작한다. 평소 같으면 웃지 말라고 씩씩댔겠지만,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이 상황이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고 웃긴다. 생일인 당사자한테 생일 케이크 만드는 걸 도와달라고 하다니. 자급자족 셀프정신도 아니고, 이게 뭐야.
얼마나 많이 웃었으면 도란이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눈가를 훔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 걸린 앞치마를 걸치는 도란이다. 그래도 도와주긴 하는구나. 안도하면서도 생각하면 할수록 웃겨, 드라이기를 서랍에 넣으면서 나 역시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 아까까지 좀 졸렸었는데 너무 웃겨서 잠이 다 날아갔어.”
“…이제 다 웃었냐.”
“아마도? 근데 나도 베이킹은 해본 적 없는데.”
그래도 너는 나처럼 밀가루 치다가 주방을 북극으로 만들진 않겠지.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했으면 넌 오늘 케이크 먹지도 못했을걸. 먹었어도 도로 뱉었겠지. 진짜로 처음 시도하는 건지 카운터에 놓인 레시피를 꼼꼼하게 살피는 도란이다.
가만, 살면서 처음으로 베이킹을 하는 건데 그걸 나랑 같이하는 거잖아. 어쩐지 기분 되게 좋다. 28년 동안 함께 붙어있으면서 같이 해보지 못한 게 있다는 것도 좋고, 둘이서 처음을 같이 공유하는 것도 좋아.
차근차근 생각해보면 둘이서 안 해본 것도 많구나. 새삼 즐겁다. 아직 란이와 해보지 못한 것들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평생을 함께해서인지 언제나 변하는 게 없이 지낼 거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게 전혀 없을 줄 알았다.
근데 그게 아니었네. 하긴, 란이를 향한 내 마음도 이렇게 변하고, 하루하루 새로워지고 있으니 당연한 건가. 솔직히 이제는 조금 두렵기까지 하다. 대체 이 마음에 한계는 있는 걸까. 브레이크가 없는 것 마냥, 이렇게 계속 좋아지면 어쩌잔 거야. 절대 멈출 생각은 없지만.
“와, 이거 요거트 딸기 케이크네? 맛있겠다.”
“너 딸기랑 요거트 엄청 좋아하잖아. 그래서 큰맘 먹고 만들기로 했지.”
“풋, 그리고 그걸 내가 돕는 거고?”
“아, 혼자서는 도저히 못 하겠단 말이야. 그리고 자고로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랬거든?”
“하하, 알았어. 빨리 와, 셰프 님. 조수는 열심히 도울 테니까.”
어째 셰프보다 조수의 요리 실력이 몇백 배는 우월한 것 같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야지. 시중에서 파는 요거트 케이크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맛있게 만들 거야. 결의를 다지면서 도란이 옆으로 가는 나다.
============================ 작품 후기 ============================
빗자루계인님// 헉, 뭐야. 누구야. 누가 내 독자님 댓글을 날아가게 만든 거야 ㅠㅠㅠㅠㅠㅠㅠ 때찌할 거야! (씨익씨익)
마카로나주님// ㅋㅋㅋ 분위기는 부부급이지만, 사귀고 있지도 않은 게 함정 ㅋㅋㅋ 두 사람은 언제쯤 이어질까요 :D
sn님// 내 독자님이 이렇게 귀여울 리 없어 (주먹울음) 이소의 삽질은 언제쯤 끝이 날까요 /ㅅ/
기나긴 황금연휴 연참이 드디어 끝났습니다! (자축하는 에이온) :D
연인을 넘어 부부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이지만, 아직 연인도 아니고,
심지어 자기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절레절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