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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33화 (33/97)
  • 00033 32. 도란, 너 내가 반드시 꼬신다.  =========================

    장바구니에 가득 담았던 술들을 제자리에 집어넣고, 에너지 드링크를 가득 사서 집으로 왔다. 피곤해 죽을 것 같긴 하지만,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결론을 냈으면 진행을 해야지. 이대로 잠들어버리면 찝찝해서 자는 둥 마는 둥 할 것 같으니 내가 뭘 어쩌고 싶은 건지 확실히 정하자.

    거실에 걸린 벽걸이 달력 한 장을 쭉 찢어서 거기다 하나하나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을.

    일단 원하는 것 0순위는 지금처럼 도란이랑 평생 함께 있는 거지. 친구든 연인이든 관계를 따지기 이전에, 도란이가 내 삶에서 사라진다면 큰 기둥 하나가 송두리째 뽑힌 거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친구 이상으로 가족처럼 지내는 도란이와 영원히 멀어지게 된다면 …그건 진짜 상상하기 싫다.

    그다음은 도란이가 내 마음을 받아줘서 연인이 되는 것. 크, 상상만 해도 좋다. 한 자 한 자 쓸 때마다 입꼬리가 고공 승천을 한다. 다 쓰고 나니 문득 예전에 내가 도란이한테 연애대상으로 생각도 해본 적 없다며, 너랑은 절대 연애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던 게 떠오른다.

    타임머신이 개발되어 지난날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그 입 다물라고 어퍼컷을 날리고 싶다. 아악! 내가 진짜 그때 왜 그랬지! 생각하면 할수록 후회가 댐이 터진 것처럼 와르르 밀려온다. 이대로 잠자리에 든다면, 도란이가 사는 위층까지 날릴 수 있을 만큼의 이불킥도 가능할 것 같아.

    신이시여, 아니 도란이의 청신경 님. 참회합니다, 회개합니다. 제발 도란이랑 연애하게 해주세요.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 호루스, 제우스, 토르… 등등. 알고 있는 신이란 신에게 도란이와 연애하게 해달라며 모조리 빌고 난 후, 심호흡을 크게 하며 내가 두려워하는 걸 적기 시작했다.

    가장 두려운 건 역시 도란이와 멀어지는 거다.

    언제나 직진만 했던 내가 일보 후퇴한 가장 큰 이유. 란이랑 멀어지면 정말 여러 가지로 끝장이니까.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교우관계에서도 차질이 생길 건 뻔하고, 내 평생을 공유한 사람이 사라져버리면, 내 인생을 반 이상 도둑맞은 느낌이 들 것 같다.

    무엇보다 란이가 옆에 없는 건, 내가 견디지 못할 거 같아.

    자기주관이 뚜렷해서인지,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맺고 끊는 것도 확실한 도란이라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관심조차 주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다혜가 말했듯, 여자관계에서도 철벽을 쳤던 거겠지.

    도란이가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건 엄연히 친구라는 관계에 한정해서이고, 연인이라는 관계까지 다가가면 어떨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어쩌면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거리를 두게 될지도 모른다. 솔직히 그럴까 봐 두려워서 이 마음을 없던 것으로 해야 하나 고민했었다.

    하지만, 도란이가 나를 멀리하는 것보다 딴 연놈들이 도란이를 독차지하는 게 더 싫어.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란이와 연인 이상의 관계나 스킨십 대화 등등, 그 모든 것을 취한다면, 분명 말 그대로 폭주해버릴 거다. 지금도 생각만 했을 뿐인데 쥐고 있던 볼펜을 두 동강 내버렸으니, 눈앞에서 보게 됐을 때는 이성을 유지하지 못할 게 뻔하다.

    살면서 내가 이 정도로 소유욕 강한 인간인 줄은 몰랐는데. 도란이를 좋아하고 난 이후,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제대로 알아가는 느낌이다. 쿨? 털털해? 집착이 없어? 딴 거에는 그럴지 몰라도 도란이에게만큼은 절대 그렇게 못 하겠다.

    대강 리스트를 짜고 났더니 뭐가 문제인지 확실히 보이기 시작한다.

    도란이와 연애하고는 싶지만, 도란이가 넌 연애 상대가 아니라며 철벽을 치고 멀어질까 봐 겁나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도란이와 연인이 되는 걸 눈 뜨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도란이가 날 좋아하도록 만드는 수밖에.

    살면서 남자를 꼬셔본 적은 몇 번 있지만, 이번 경우는 여러 가지로 특수하기에 인터넷에서 자문을 구하기로 했다. 소꿉친구라는 게 흔한 건 아니니까 나 같은 케이스는 거의 찾을 수가 없네, 젠장.

    아무리 찾아도 마땅한 게 없기에 그냥 남자 유혹하는 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쪽은 소꿉친구와 다르게 수두룩해서 좋은 방도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긴다. 잔뜩 기대하며 이것저것 찾아보기도 잠시, 이내 내 입에선 무거운 한숨이 튀어나왔다.

    이것들을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싶은 것들만 수두룩하니까.

    첫 번째, 부드럽고 밝은 미소로 남자를 쳐다본다. …내가 이런 게 가능할 리가 있겠냐! 게다가 이건 내가 아니라 도란이 주특기다. 특히 배시시 웃으면서 눈웃음치는 건 진짜. 어떻게 해. 상상만 해도 너무 좋아. 아, 그래서 내가 넘어갔나? 웃는 게 너무 귀여워서 심장에 큐피드의 화살을 직격타로 맞아버렸나?

    어쨌든 이건 소질은 없지만, 못할 것도 없으니 잠시 보류.

    두 번째, 남자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준다. 못할 건 없지만, …이것도 도란이가 잘하는 건데. 상냥하고 배려 깊은 성격 덕에 주변 사람의 이야기라면, 사소한 것도 진중하게 듣고 기억하는 거. 내가 도란이에게서 가장 닮고 싶은 부분.

    …이참에 노력해봐야지. 개드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좀 고민해봐야겠다.

    세 번째, 상대방을 설레게 하는 스킨십을 할 것. 살 좀 부대끼는 것 가지고 설렜으면, 진작 설렜겠지. 28년 동안 스킨십은 아주 질리도록 했거든! 아니, 솔직히 질리지는 않고 자꾸 해도 좋긴 합니다만, 문제는 …또 도란이 특기네.

    애정표현이 서툰 나와 달리, 도란이는 친한 사람들에게는 거리낌 없이 스킨십을 하니까. 여자들에게는 나나 우리 엄마, 자기 친척들 말고는 안 하지만. 잠깐만, 이거 역으로 생각해보면, 철벽남만 아니었다면 도란이 은근히 유혹하는 재주를 타고난… 철벽남이라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들이댈 때는 제발 해제해주세요.

    그나저나 설레게 하려면 무슨 스킨십을 해야 하는 거지. 벽에다 가둬놓고 “입술 박치기라도 찐하게 할까?” 하고 박력 터지게 말해야 하나. 좀 미친 것 같긴 해도 이런 수준이 아니라면, 도란이가 특별하게 여길 것 같지 않은데.

    더 좋은 수가 있을지도 모르니 차근차근 생각해봐야겠다.

    네 번째, 평소 모습과 다른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볼 거 안 볼 거 거의 다 본 사이라 어떤 게 의외의 모습일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나와 반대되는 모습을 떠올리면 소극적이고, 연약하고, 조신하고, 섬세하고. 그런 매력을 보여주려면 조신한 취미라도 배워둬야 하나?

    찾아보니 십자수, 바느질, 뜨개질, 악기 연주, 요리 정도네. 하하, 망했다. 이것들 대부분 도란이가 잘하는 거잖아. 매력을 뽐내려다가 역으로 코치 당할 것 같다.

    그래도 섬세함이 길러질지도 모르니 만만해 보이는 거 하나 정도는 시작해봐야지.

    다섯 번째, 철벽남인 경우, 신중한 경향이 있는 남자이기에 서두르지 말 것. 나도 그러고 싶은데, 도란이만 보면 진정이 안 된다고. 심장은 시도 때도 없이 격렬한 탭댄스를 추지, 머릿속에서는 팝콘 튀어 오르듯 망상이 펑펑 터져서 미칠 것 같은데.

    일단 여태까지 했던 것처럼 최대한 참아보자, 권이소. 이성이 어디까지 버텨줄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남자가 좋아하는 여성 취향을… 알 리가 없잖아! 28년 동안 걔가 여자랑 썸타는 걸 본 적이 없다고! 이상형을 알았으면 어떻게 접근해야 좋을지 진작 생각했겠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란이가 어떤 타입의 여성을 좋아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28년 동안 그런 거 하나 모르고 뭘 했냐, 권이소.

    하긴 이성 문제라면, 이성 친구보다는 동성 친구 쪽이 더 잘 알고 있겠네. 10년 넘게 도란이랑 껌딱지처럼 붙어 다닌 성준이라면 알지도 모르겠다. 생각을 끝냄과 동시에 성준이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다혜나 도란이와 함께 만난 적은 많아도 단둘이 약속을 잡고 만난 건 다섯 손가락에 꼽는 일이라 바짝 긴장한 듯 보이는 성준이다. …왜 쫄고 그래. 내가 너한테 알아낼 게 있어서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것뿐이지, 해칠 생각은 없어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느리게 삼키더니 큼큼 헛기침한 성준이가 내 눈치를 보며 말한다.

    “이소, 네가 웬일이냐. 나를 다 만나자고 하고.”

    “너한테 알아낼 게 좀 있어서.”

    그대로 굳어버린 성준이는 혹시 다혜가 부탁해서 왔냐고 조심스레 묻는다. 목소리까지 떨리는 걸 보니 필시 다혜한테 뭐 숨기는 게 있나 보네. 살짝 호기심이 생기긴 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덮어두려는데, 이번 사인회는 5장만 샀는데 된 거라며 다급히 해명하기 시작한다.

    …넌 진짜 누구 속이고 살지는 못하겠다.

    그거 때문에 부른 게 아니라며 못 박아두자 진심으로 안도하는 성준이다.

    “그거 때문에 부른 건 아니지만, 내가 묻는 걸 순순히 대답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장담 못 한다. 다혜한테 너 사인회 가는 거 불어버릴지도 몰라.”

    “…뭐가 알고 싶으십니까, 이소 님.”

    약점을 잡은 악당처럼 사악하게 웃으며 협박하자 성준이는 빠르게 정중한 자세로 바꾸며 말했다. 그 모습이 꼭 충성을 맹세한 부하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회사원이라면 갖추게 된다는 빠른 태세전환은 4차원도 예외는 아닌가 보다.

    “란이 취향.”

    “란이 취향은 나보다 더 오래 알고 지낸 이소 네가 더 잘 알겠지. 왜 나한테 묻고 그래?”

    “나는 란이 이상형을 알고 싶은 거거든? 하다못해 걔가 덕질하는 취향이라도 말해봐.”

    “걔가 덕질하는 거야, 뻔하지. 너도 알잖아. 히어로.”

    그거야 나도 알지. 등신대 피규어까지 살 정도로 좋아하는 거. 그렇다고 내가 근육 빵빵한 몸으로 빨간색 쫄쫄이 입고 돌아다녀야겠냐? 답답함에 숨을 길게 내쉬고는 좋아하는 여자 아이돌은 없냐고 물어봤다.

    이따금 둘이서 음악방송을 같이 보니까 누구 하나라도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는데, 성준이가 고개를 저었다. 성준이 말로는 도란이는 노래나 안무를 좋아하는 거지, 아이돌이 누군지는 관심이 없는 쪽이란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대체 그 인간 이상형을 추측할만한 게 대체 뭐냐고!

    “아, 그럼 AV 배우 취향이라도 말하던가!”

    “푸웃!”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인간 분무기도 아니고, 나한테 아메리카노를 뿌리는 성준이다. 내 얼굴에 아메리카노 미스트를 뿌린 것도 모자라 사레까지 들렸다. 얼씨구.

    한참이나 캑캑거리던 성준이는 내가 냉수를 건네자 그걸 들이키고는 간신히 안정을 되찾았다.

    “…야, 미친 권이소. 너 진짜.”

    “왜, 뭐.”

    “…아니, 뭔. 갑자기 왜 그런 걸 묻고 그러냐? 란이 이상형이 왜 그렇게까지 궁금한 건데. 꼭 란이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좋아하는데? 꼬시려고 묻는 거잖아, 지금.”

    내 말에 눈이 커진 성준이는 마시고 있던 아메리카노를 그대로 주르륵 흘린다. 아, 저 드러운 자식. 내가 저 인간이랑 커피를 같이 마시나 봐라. 자기 바지가 흥건히 젖은 줄도 모르고 눈만 끔뻑이던 성준이가 멍하니 감탄사를 내뱉는다.

    “…미친, 대박.”

    “그러니까 협조해라, 김성준. 네가 알고 있는 건 모조리 다 불어.”

    “…A, 그거는 말하기가 그렇고, 대신 걔가 좋아했던 여자애에 대한 정보는 조금 알려줄게.”

    …뭐? 란이가 좋아하던 여자애? 금시초문인 소리라 놀람과 동시에 당황스럽다. 왜 그 인간은 나한테는 언질도 없었던 건데. 함께 지내면서 서로에게 비밀 같은 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난 그랬으니까. 서운함과 동시에 안쪽부터 무언가가 꿈틀한다.

    전에도 느꼈던 질투라는 감정이.

    “…그래서 지금도 란이가 좋아해?”

    “야, 무, 무섭게 왜 그래. 과거형으로 말했잖아. 오래전에 당사자가 나한테 말했어. 안 좋아한다고.”

    그 말에 안도하긴 했지만,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다. 넌지시 내 눈치를 살피던 성준이는 그 여자애에 대해서 말했다. 어떤 여자일까 내심 궁금했지만, 생각보다 평범했다. 애초에 성준이가 정보를 너무 조금 풀었지만. 도란이와 잘 맞는 부분이 있는 사람이라는 게 알려준 전부다.

    “란이가 그 여자를 왜 좋아했던 건데.”

    “…어, 그러니까 그, 운명적인 만남?”

    뭔 개풀 뜯어먹는 소리야. 급조한 듯한 발언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아니, 솔직히 란이에게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다는 걸 들었을 때부터 표정은 굳어있었지만.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기 마련이고, 좋아했던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걸 잘 알면서도 어째서 나는 나답지 않게 …지나간 일에도 질투를 느끼는 걸까.

    더 알려달라고 성준이를 협박도 해보고, 설득도 했지만, 끝까지 넘어가지 않았다. 애초에 도란이가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다는 건 둘만의 비밀이었다면서. 차라리 다혜에게 사인회 문제를 까발리라는 말에 체념한 나다.

    이럴 때는 입이 무거운 성준이인 걸 나도 알고 있으니까. 도란이가 이 녀석을 신뢰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알면서도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됐어, 과거 같은 건 단박에 날려버릴 정도로 나한테 빠져들게 만들면 되니까.

    ============================ 작품 후기 ============================

    3분컵라면님// 울지마세요! 다음 편이 나왔습니다!

    tyuif님// 헉, 제 소설의 방향성을 제대로 파악하시다니 +_+ 정답입니다 (땅땅)

    저돌적 직진녀 권이소 vs 모태솔로 철벽남 도란 승자는? 언젠가는 밝혀지겠죠? (짓궂음)

    다음 연재는 화요일? 아니면 수요일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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