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2 31. 고통스러운 짝사랑 =========================
차에서 내린 뒤, 내일 일할 것들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핑계로 도란이와 금방 헤어졌다. 또 전처럼 기분이 안 좋은 게 티 나면 걱정할까봐, 걱정해서 뒤따라 올까봐 어떻게든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어두워서 들키지 않은 건지 도란이가 웃으며 힘내라고 말했다.
그 말에 밑바닥부터 울컥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계단으로 올라왔다. 3층 정도 올라오고 나서 쓰러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주저앉은 채로 꼼짝하지 않아 복도 조명이 꺼져버렸지만, 차라리 이게 낫다. 이런 모습 아무한테도 보여주고 싶지 않으니까.
처음 알았다. 내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을 짝사랑하는 게 어떤 건지.
생판 타인이나 어느 정도 알고 지내는 사람을 짝사랑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아. 혹시라도 멀어질까봐 두려워서 나도 모르게 물러나게 되고, 도란이와 연관된 모든 관계가 와르르 무너질까봐 내 뜻대로 해야겠다는 용기까지 바닥나버려.
내 삶에서 도란이가 송두리째 빠져나가면 어떤 느낌일까, 생각만 하는 것으로도 암담한 소용돌이가 나를 꿀꺽 삼키는 것 같다.
나 진짜 어쩌면 좋지? 도란이가 멀어지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내 마음을 숨겨두는 것도 지치고, 도란이 옆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건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로 고통스러워.
심장이, 머리가, 아니 온몸이 깨질 듯이 아파, 너무 아파.
이렇게 퀭한 폐인 상태로 지내는 거 상당히 오랜만이네, 하하하. 새카만 모니터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헛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며칠째 잠을 설쳐 쏙 들어간 눈에 화장으로 가리려고 시도했지만, 도저히 가려지지 않는 다크써클.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해서 홀쭉해진 볼, 멍한 얼굴로 한숨만 땅이 꺼지라 연거푸 뱉어대는 모습. 와, 진짜 실연당한 사람 같다. 시작도 안 했는데 실연당한 것 같다니.
진짜 거지 같네. 내 몰골도, 내 상황도.
오늘도 점심을 먹지 않겠다고 후배를 돌려보냈더니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렇겠지, 일주일 넘게 이러고 있으니. 와, 강제로 다이어트 되겠다. 도란이 순기능이 또 늘었네.
…하하, 이제는 이름만 떠올려도 아프다.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언제나 그렇듯 점심때만 되면 꼬박꼬박 연락하는 도란이다. 오늘도 역시 메신저로 뭐 먹었냐고 물어보네. 대충 지어내서 대답하고는 폰을 껐다.
요 며칠, 일이 있다는 핑계로 도란이를 피했다. 일부러 늦게 퇴근하거나 다른 친구와 약속을 잡아 집에도 늦게 들어갔다. 자정이 다된 시각에 집에 들어가면서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자괴감이 밀려왔지만, 마주할 용기마저 바닥나버린 사실을 잘 알기에 한숨으로 하루를 마감했다.
전화도 일부러 받지 않았다.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시큰거리는데, 목소리까지 들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으니까. 걱정 끼치기 싫어서 받을 상황이 아니라고 둘러대긴 했다. 다행히 둘러댄 게 먹힌 모양인지, 요새는 전화도 걸지 않고 메신저만 이따금 하는 도란이다.
덕분에 평온한 감정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됐지만, 가슴 한쪽에서는 도란이가 보고 싶다고,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아주 그냥 지랄발광을 하고 있다. 지금 이 상태에서 도란이 마주하면 네 주인은 죽어요, 죽어.
하필이면 좋아하는 상대 닮아서 눈치는 더럽게 없어요, 아주.
아, 미친. …도란이 보고 싶다.
빈속에 술 퍼마시면 어떻게 되는지 몇 년 전에 혹독히 체험해서 얼마나 미친 짓인지 잘 알지만, 오늘은 술기운에라도 좀 자고 싶다. 솔직히 자는 건 둘째치고 술이라도 퍼마셔서 도란이 생각을 그만하고 싶은 게 더 크다.
이왕 위장 헬게이트가 열릴 거, 바깥보다는 집에서 열리는 게 낫기에 집 앞 편의점에서 보이는 술을 대충 쓸어 담았다. 안주 먹을 기력도 없지만, 깡으로 들이부었다간 내일 꼼짝없이 월차 쓰겠지. 그냥 컵라면 하나 사서 안주 삼아야겠다.
“우와! 여기 편의점 완전 크다! 우리 학교 근처는 좁아터져서 물건도 별로 없는데! 헐, 대박. 이거 인터넷에서만 보던 과잔데. 실물로 처음 봐!”
잠깐. 이 듣기만 해도 시끄럽고 짜증이 확 솟구치는 목소리는.
처음에는 환청인가 했는데, 계속 오버하는 게 들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다. 혹시나 해서 몸을 숨기고 슬쩍 과자 코너 쪽을 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때려 패…아니, 거칠게 쓰다듬어주고 싶은 내 하나뿐인 남동생 이혁이다.
그리고 이혁이 뒤에는 …오랜만에 보는 란이가 서 있다.
“혁아, 그렇게 많이 사놓고도 또 뭐가 남았어?”
“형 달달한 거 좋아하잖아. 내가 음주 계의 신세계를 형한테 알려줄게!”
“…응, 그건 고마운데, 아이스크림 산다며. 또 과자 사려는 건 아니지?”
파스텔 톤의 하늘색 니트를 오버핏으로 입은 건지 기다란 손가락이 반 이상 가려져서는, 난감하다는 듯 한쪽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는 도란이다.
아, 윽. 미치겠다. 어떻게 해. 진짜 귀여워. 저대로 끌어안고 부비부비하고 싶어.
오랜만에 보니까 평소보다 몇 배로 뇌내 망상과 심장이 마구 요동친다. 날뛰지 마, 심장아. 평정을 유지해, 머리야. 하긴 너희가 요새 내 말을 들은 적이 없구나. 들었으면 진작 마음 접고 해탈해서 열반에 들었겠지.
“란이 형, 이거 하나만 사면 안 될까? 응, 응?”
“그거 하나만 사는 건 괜찮지만, 다른 건 금지다. 우리에게는 마트에서 한 박스 가득 사 온 과자들이 있다는 걸 잊지 마.”
“옛설.”
뭐지, 꼭 군것질 좋아하는 5살짜리 아들과 장 보던 엄마가 스낵코너에서 실랑이하는 걸 보는듯한 이 기분은. 이혁이랑 란이 둘이서만 노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라, 어느덧 예능보다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는 나다. 마치 동물농장 생태 보고서 같다고 할까. 비글과 리트리버가 만나면 이렇게 됩니다!
“근데 형, 진짜 폭력 고릴라 오늘도 늦게 와?”
“…어, 아마 그러지 않을까. 요새 계속 늦게 오는 것 같던데.”
“새벽까지 안 왔으면 좋겠다! 형이랑 놀고 싶어서 여기 오려고 해도 고릴라가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까 올 의지가 바닥난다고. 아, 고릴라 짱 싫어. 마주치기도 싫어.”
누구는 너 마주치고 싶은 줄 아냐? 뒤에 있는 도란이만 아니었어도 넌 지금 나한테 몇 대는 두들겨 맞았어. 오늘도 온종일 공복이라 힘이 하나도 없었는데, 얼마나 때리고 싶으면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야, 누나가 늦게 들어오면 걱정을 해야지, 새벽까지 안 왔으면 좋겠다니. 그리고 누나한테 고릴라가 뭐야. 이소랑 고릴라 전혀 안 닮 …풋.”
도란, 너는 실드를 칠거면 제대로 쳐라! 근데 입 가리고 부들거리면서 웃음 참는 게 마냥 귀여워서, 이혁이한테 화낼 의지까지 스르르 사라져버렸다. 권이소 중증이다, 진짜.
“그 고릴라야, 넘치는 게 힘이라서 오히려 멋도 모르고 덮치는 괴한이 걱정이지. 아마 원 펀치 쓰리 강냉이는 기본으로 가능할걸?”
“…그런가?”
뭘 “그런가?” 야! 왜 실드 치다 말고 순응하고 있는 건데! 저 인간, 도대체 평소에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으면 저런 터무니없는 개소리를 납득하고 앉아있냐고!
도란이가 동요하자, 이혁이는 신이 나서는 자기가 나한테 어떻게 맞았는지, 띨빵한 게 육하원칙까지 들먹이며, 무용담을 펼치고 있다.
권이혁, 저거 내가 반드시 죽인다. 도란이 앞에서 뭔 소리를 하고 있어!
…물론, 란이 쟤도 나랑 이혁이가 치고받고 피 터지게 싸우는 건 잘 알긴 하는데. 그래도 갑자기 과거를 참회하고 싶고, 쥐구멍으로 숨고 싶어지는 건 왜일까.
“혁이 네 말도 조금은 일리가 있는 것 같긴 한데, 기습이랑 다굴에는 장사 없다고 하잖아? 이소도 마찬가지 일 거고. 그러니까 하나뿐인 누나한테 그런 짓궂은 말 하지 말고, 누나가 일찍 왔으면 좋겠다고 기도하세요.”
“…쳇, 알았어.”
“이소보고 고릴라라고 하는 것도 좀 줄이고. 네 누나랑 고릴라, 전혀 안 닮…았거든.”
“형 말은 다른 건 다 듣겠지만, 그건 절대 양보 못 해! 솔직히 딱 봐도 고릴라잖아! 숨 쉬는 것도 고릴라스럽게 쉬고, 밥 먹는 것도 고릴라스럽잖아! 주먹 휘두르는 건 살아 숨 쉬는 고릴라 그 자체고!”
살짝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이번에는 잘 참고 꿋꿋이 실드를 치는 도란이다. 도란이 말이면 고분고분 따르는 주제에 저렇게 열변을 토하는 걸 보면 실드가 무용지물이 된 모양이지만.
저거 녹음해뒀다가 고릴라라고 말한 획수만큼 패고 싶다. 권이혁, 네가 요새 나랑 떨어져 산다고 살판났구나, 아주.
“그리고 형이 누나 닮았다고 주장하는 생물체보다 고릴라 쪽이 천 배는 더 닮았거든?”
이혁이의 말에 저절로 귀가 쫑긋 세워진다. 2주 가까이 굶었는데, 이런 기력이 남아돌다니. 내 신체는 참으로 신비롭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도란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남의 입으로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형, 전에 그랬잖아. 누나 고등어 닮았다고.”
“…이 미ㅊ”
전혀 짐작하지도 못한 닮은꼴을 듣고 육성으로 튀어나온 육두문자에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건지 아무렇지도 않게 아이스크림 코너로 향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이다.
…도란, 나를 여태 포유류나 영장류도 아니고, 어류로 보고 있었냐.
살다 살다 짝사랑하는 남자한테 고등어 닮았다는 소리를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권이소, 이제 겨우 30을 앞둔 나이에 별일을 다 겪는구나. 도란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모르겠다는 듯 볼을 긁적거린다.
“…내가 그랬다고? 언제?”
“나 말년휴가 나와서 형네 별장에서 둘이서 술 파티 벌였을 때! 누나 고등어 닮았다며!”
“몰라. 많이 취했었나, 기억이 안 나는데.”
“하긴, 형이랑 나랑 그때 완전 퍼마셨잖아. 나도 군데군데 기억이 뻥뻥 뚫린 것 같긴 해.”
“그래도 네가 이소가 고릴라라는 증거를 보여주겠다면서 고릴라 잠옷을 구매했던 건 기억난다. 며칠 뒤에 택배 상자에 웬 동물 가죽 같은 게 담겨있어서 엄청 놀랬다고.”
그 고릴라 잠옷 출처가 권이혁 너였냐? 그거 한 번 입은 이후로 고릴라라는 말만 튀어나오면 도란이가 웃게 돼버렸다고. 란이 쟤가 웃는 건 마냥 귀여워서 좋긴 한데, 짝사랑하는 남자가 그런 걸로 웃는 건 내 존엄성을 상실하는 것 같아서 엄청 씁쓸하거든?
언젠가 란이 별장 들르면 옷을 찢어서라도 이혁이한테 강제로 입힐 거야.
두 사람은 메론 맛 아이스크림, 수박 맛 아이스크림 같은 과일 맛 아이스크림만 가득 사고는 편의점을 나갔다. 남자 둘이서 뭔 얘기할 게 그리 많은지,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유리창 너머로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도란, 나는 너 때문에 며칠 동안 웃지도 못하고 폐인처럼 지냈는데, 너는 참 즐거워 보이는구나. 나는 이렇게 웃지도 못… 하는 게 아니라, 유리창에 비친 너는 왜 행복하다는 듯 웃고 있냐, 권이소.
설마… 도란이 잠깐 봤다고, 이렇게 웃는 건 아니지?
하하하, 어이가 없어서 미친년처럼 웃음이 자꾸만 나온다. 직접 얘기한 것도 아니고, 모습만 봤는데도 그렇게 좋냐. 아까까지만 해도 기운이 없어서 생기 잃은 동태눈을 하고, 세상 근심은 혼자 다 짊어진 표정을 하고 있던 주제에.
도란이를 보지 않은 10일간의 삽질 속에서도 얻지 못한 결론을, 도란이와 잠깐 마주한 10분 만에 깨달아버렸다.
도란, 난 너 절대 포기 못 해.
============================ 작품 후기 ============================
샤냥꾼님// 글쎄요 도란이 마음은 어떨지는 나중에 나오지 않을까요 /ㅅ/? (작가가 스포)
빗자루계인님// 잌ㅋㅋㅋㅋㅋ 능욕물ㅋㅋㅋㅋㅋㅋㅋㅋ 쌍방삽질이면 재밌겠네요. 둘다 고통받아라 (사악)
현이류님// 헉 시험 끝난거 축하드려여 /ㅅ/ 아마... 란이는... 심각한 천연美....를 지닌... (숙연)
soae님// 저도 얘네 둘 귀여운 맛에 쓰고 있어여 /ㅅ/
역시 저돌적인 녀자 권이소 ;) 힘내라 (짝) 도란이는 길이가 길고, 털이 많다는 이유로 성준이에게 짚신벌레 닮았다고 하는 남자입니다. (오늘도 고통받는 성준이)
다음 연재는 월요일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