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1 30.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해? =========================
언제나 그렇듯 레모네이드를 주문하고 카페에 앉았다. 여기 카페에서 파는 토피넛 라떼, 도란이가 엄청 좋아하는데 이따가 하나 사갈까. 김성준이야, 예비 아내가 알아서 챙겨주겠지. 아이스로 사야 하나, 따뜻한 걸로 사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다혜가 탄성을 내뱉으며 말했다.
“도란 오빠가 노래 잘 부르는 건 알고 있었는데, 피아노까지 잘 치는지는 처음 알았어.”
“나도 걔 피아노 치는 거 되게 오랜만에 봐. …노래까지 같이 부르는 건 처음 봤고.”
“언니도 처음 보는 거야? 와, 도란 오빠가 우리 커플 결혼한다고 모처럼 실력 발휘한 건가 보네. 대박.”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까르르 웃는 다혜가 마냥 귀엽다. 짜릿해, 늘 새로워, 역시 귀여운 게 최고야.
“근데 진짜 잘 치더라. 고2 때, 오빠가 피아노까지 치고 노래 불렀으면, 인기가 더 많았겠다 싶을 정도였어.”
“…도란이 걔가 인기가 있던 적이 있긴 했었냐.”
“엥, 언니 몰랐어? 학교 축제에서 오빠 노래 불렀을 때, 오빠한테 관심 가졌던 애들 은근 있었던 거? 내가 아는 애들 중에서도 셋이나 있었는데.”
“…헐.”
진심으로 몰랐던 사실이라 표정 관리가 안 될 정도로 경악스럽다. 다혜가 즉석에서 지어내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충격이다. 물론, 다혜가 그럴 이유가 전혀 없기는 한데, 내가 학교 소문에 둔한 것도 아니고 왜 몰랐 …아, 나 그맘때쯤에 동아리 선배한테 꽂혀서 다른 건 아웃 오브 안중이었었지.
“그래서 걔네들 다 어떻게 됐는데? 예컨대 란이랑 썸을 탔다거나… 적극적으로 애정 공세를 했다거나 뭐…”
“음, 내가 알기로는 한 달도 안 지나서 수그러진 거로 아는데.”
하긴 …그중 하나라도 썸 비스무리한 걸 탔으면, 란이가 지금까지 모태솔로 타이틀을 고수하고 있진 않았겠지. 누군가에게는 씁쓸한 현실이긴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큰 위안이 되는구나.
“그래도 내 친구 하나는 근 반년 동안 오빠한테 대쉬했었어.”
“뭐?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당연히 잘 안됐지. …걔가 대쉬하는 거 보고 깨달은 건 란 오빠, 상상 이상의 엄청난 철벽남이라는 거였어.”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에 레모네이드 마시다 사레들렸다. 젠장. 내가 콜록대자 다혜가 얘기를 멈추고 걱정했지만, 신경 쓰지 말고 얘기 계속하라고 손짓했다. 다혜야, 언니는 지금 이깟 사레들린 게 중요한 게 아니란다.
“꽤 친한 친구라서 걔가 오빠한테 대쉬하는 거 지켜보기도 하고, 도와주기도 했었거든? 내가 보기에도 어마무시할 정도로 들이대는데 진짜 교묘하게 전부 다 빠져나가더라. 관심도 전혀 없어 보였고. 그래도 굴하지 않고 꾸준하게 쫓아다녔는데, 걔가 결정적으로 오빠를 포기하게 된 이유가 있었지.”
“그게 뭔데?”
“…반년 동안 그렇게 쫓아다녔는데 란 오빠는 걔 이름도 모르더라고.”
와, 심하다 진짜.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다혜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단순히 4차원인 게 문제가 아니었구나. 나 진짜 도란이한테 고백이나 할 수 있을까. 포장도로인 줄 알고 자신만만하게 갔는데, 가까이서 보니 뾰족한 바위가 지천으로 깔린 비포장도로였다는 걸 알아챈 기분이다.
“오빠가 은근히 마이페이스 기질 있잖아. 친한 사람 아니면 관심도 안 두고, 자기 스타일 뚜렷하고. 나야 뭐, 성준 오빠랑 엮이다 보니 란 오빠랑 쉽게 가까워졌지만, 다른 애들은 의외로 접근도 못 하더라.”
“확실히 걔가 좀 그런 면이 있긴 하지.”
“그치그치, 아무튼 내가 그때 확실히 깨달은 건 란 오빠는 자기가 좋아하지 않으면 연애를 시작도 안 할 타입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언니, 파이팅!”
“풋!”
갑작스러운 다혜의 응원에 그대로 뿜어버렸다. 입안에 아무것도 없어서 망정이지, 있었으면 그대로 다혜 얼굴에 분사할 뻔했다. 그나저나 갑, 갑자기 왜 날 응원하는 거니, 다혜야? 설마…
“…티나?”
“응, 좀.”
“…라, 란이나 성준이도 눈치챘을까?”
“으음, 내가 보기에는 둘 다 전혀 모르고 있지 않을까. 나도 방금 언니랑 대화하다가 반응이 좀 격하길래 혹시나 하고 찔러본 거거든.”
아아, 어떻게든 아무한테도 안 들키려고 했는데 망했어. 내가 칭얼거리며 우는 소리를 내자 다혜가 까르르 웃으며 나보고 귀엽다고 한다. 살면서 다혜한테 귀엽다는 말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도란이를 좋아하게 될 줄도 몰랐지. 흑흑.
새삼 사람일 아무도 모른다는 게 어떤 건지 알 것 같다.
고급뷔페에서 크게 한턱 쏜 성준이 덕에 저녁을 푸짐하게 얻어먹고 도란이 차에 탑승했다. 요즘 따라 도란이에 대해 몰랐던 점을 알게 되는 일이 많아지는 것 같다. 28년 동안 붙어있었으니까 란이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점을 알게 되면 좋다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왜 나는 자꾸 누군가에게 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까. 서운하기도 하고, 내가 당연히 란이를 제일 잘 알 거라고 생각했던 자만심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멍하니 도란이 옆모습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있는데, 갑자기 도란이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어우씨, 놀라라.
“심심해? 왜 그렇게 사람을 빤히 쳐다보고 있어.”
“어? …아 그냥. 심심해서.”
“노래라도 틀어줄까?”
“응.”
나에 대해 몰랐던 점에 대해서도 알게 된 게 있다면, 쫄보 기질이 있다는 거. 다른 사람이랑 연애하거나 썸탈 때는 한 번도 이랬던 적이 없었는데, 왜 도란이 앞에서는 간이 콩알만 해지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사색에 잠겨있으니 괜히 심란해지기만 해서 노래에 집중했다.
듣다 보니 도란이가 축가 1순위 후보라며 내세웠던 곡이 흘러나온다. 문득 왜 이 곡을 축가로 부르겠다고 주장한 건지 궁금해져 물었다. 내 물음에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어깨를 으쓱이는 도란이다.
“글쎄, 내가 그 곡을 신청한 사람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는데.”
“뭐? 그걸 누가 신청해서 불렀다고? 네가 고른 게 아니라?”
“…암만 나라도 친한 친구 결혼식에 그런 노래를 축가로 들이밀 리가 없잖아. 걔네 둘 중 하나가 불러달라고 부탁해서 한 거야.”
대놓고 ‘커플 망해라’라고 하는 노래를 부르라고 사주한 범인이 누굴까. 예전 같으면 성준이라고 100% 단언하겠는데, 요새 보면 다혜도 성준이한테 4차원 기질을 많이 옮은 것 같아서 쉽사리 확답을 못 하겠다.
누군지 궁금해져서 물어보려고 도란이를 쳐다봤더니, 내가 당연하게 여긴 게 섭섭했는지 뾰로통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다. 아, 어떡해. 진짜 귀여워.
“가끔 이소 넌 나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어? …뭐, 뭐 어떻게 생각하기는! 전에도 말했잖아. 약도 듣질 않는 심각한 또라이라고 생각한다고.”
도란이의 투덜거림에 순간 너무 놀라서 아무렇게나 대답해버렸다. 망했구나. 소리가 들린다. 연애 호감도 깎이는 소리가. 진짜 살면서 한 번도 이랬던 적이 없는데, 왜 자꾸 몸이랑 마음이 따로 노는 거야.
조심스레 도란이 눈치를 보니 해탈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으, 이런 내가 진짜 싫다. 그래도 자주 하는 말이라 화나지는 않은 것 같으니 불행 중 다행이네. …연애 상대 후보에서 한 발짝 멀어지긴 했지만.
잠시 좌절하긴 했어도 내심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란이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연스레 물을 기회.
“…그럼 너는? 란이 넌,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데?”
“뭐, 네가 나를 생각하는 거랑 같지 않을까.”
도란이의 말을 듣자마자 가슴이 거센 파도처럼 철렁거렸다. 눈앞이 팽팽 돌 정도로 너무 놀라버려서, 어떻게든 티 내지 않으려고 고개를 창가 쪽으로 돌렸다. 다행히 아무 말도 없는 걸 보니 내가 놀랐는지 모르는 듯하다.
란아,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고 그런 말 하는 거야, 지금?
이런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뭐가 그렇게 두려워서 금세 자기들끼리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결국, 진짜 내뱉고 싶었던 말을 잃어버린 나는 태연한 척 연기를 하며 툴툴거렸다.
“야, 지금 나를 또라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야?”
“…응? 그게 그렇게 되나? 그런 의미로 말한 건 아니었는데.”
“그럼. …어떤 의미로 말한 건데.”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떨리고, 긴장되는 걸까. 분명 나 웬만한 일에는 눈도 끔쩍 하지 않는 강심장이었는데. 지금은 고소공포증 때문에 높은 곳에서 벌벌 떨 때보다 더 긴장되는 것 같다.
“전에도 말했잖아, 가장 소중하다고.”
“…그, 그러니까! 그건 알겠고, 어떤 사이로 생각하나 그런 거!”
“…사이? 소꿉친구 말고 별다른 게 있나?”
…망할, 혹시나 하고 조금 기대했는데 친구라고 확인사살 당해버렸다. 기분도, 날뛰던 심장도 순식간에 어두컴컴한 심해로 가라앉았다.
친한 사람이 재밌는 놀이기구를 태워주겠다며 데려간 게 번지점프대고, 고소공포증을 무릅쓰고서 큰맘 먹고 뛰어내렸는데 뒤를 보니 줄이 없는… 차라리 그런 상황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고통스럽다.
도란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소꿉친구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걸 아는데도, 원망이 자꾸만 생긴다. 필사적으로 숨기긴 했지만, 조금은 눈치채주지. 이렇게 옆에 있는데 한 번이라도 이성으로 봐주지. 독심술 같은 거라도 배워두지. 평소에는 내가 뭘 바라는지 금세 아는 놈이 이런 건 왜 전혀 모르는데.
나도 안 그랬던 주제에 도란이에게 괜한 걸 바라는 나다.
이런 내가 무척이나 싫다.
다른 사람들에게 해왔던 것처럼 “나 너 좋아한다고!” 라고 신경질도 못 내는 내가… 짜증 나.
============================ 작품 후기 ============================
빗자루계인님// 오랜만이에요 /ㅅ/ 보고싶었어요 (수줍) 아아, 유감스럽게도 란이는 눈새였습니다. 아이고, 란아 (광광우럭따)
짝사랑은 좋으면서도, 동시에 자괴감이 펑펑 밀려오는 것 같아요. 힘내라, 권이소.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