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30화 (30/97)

00030 29. 너의 그런 점이 제일 좋아.  =========================

세 사람이 잔뜩 들떠서 얘기하는 뒤풀이 여장 치정극 계획을 이제는 반쯤 체념하고 묵묵히 듣고 있는 나다. 신나게 이런저런 계획을 짜더니 얼추 마무리된 건지 셋이서 만족스러운 하이파이브를 나눈다. 얼씨구나.

“유감스럽게도 1순위 후보곡이 다른 쪽으로 쓰이게 됐으니까 그다음 후보곡을 들려줘야겠네.”

“…축가 후보가 또 있어?”

“당연하지, 난 원래 기획안은 최소 3안까지는 마련해둔다고.”

…너 회사 다닌 적 한 번도 없잖아. 기획안 써본 적도 없는 애가 무슨 기획안 타령이야. 이번에는 또 어떤 해괴한 선곡을 했을지 스멀스멀 걱정이 피어오른다. 내 한숨을 듣고 능청스레 웃어 보인 도란이는 다시 피아노 의자 위에 앉아 연주를 시작했다.

피아노 선율이 따스하게 내리는 봄 햇살처럼 싱그럽다. 잠깐 싹텄던 걱정은 날아가게 만들 만큼 부드럽게 물 흐르듯 넘실대는 연주. 귓가를 울리는 상큼한 멜로디에 저절로 몸이 선율을 훑듯 움직인다.

아까 불렀던 곡이 비록 가사는 축가에 맞지 않았어도 은은하고 감미로웠다면, 이번 곡은 화음을 많이 넣어 화려하면서도 경쾌하다. 노래 분위기에 맞게 도란이도 건반 위에서 통통 튀듯 연주하고 있다.

이 노래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노랜데. 나도 모르게 멜로디에 맞춰 흥얼거리게 된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내뱉은 가사에 입을 틀어막았다. 짝사랑하는 걸 들킬까 조마조마하는 내용이었으니까.

황급히 주변을 살펴보니 다혜 커플은 노래에 심취해 흥얼거리고 있고, 도란이도 연주를 하고 있어 나를 보지 못한 듯하다. 살았다고 안도하기도 잠시, 이 노래 자꾸 듣다 보니까 묘하게 지금 내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은데.

…미치겠다. 한 번 의식했더니 자꾸 신경 쓰게 되어버린다.

필사적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지만, 심장은 피아노 템포보다 몇 배는 빠르게 들썩이고 있다. 짓궂은 선곡에 이 인간 눈치채고 있는 건가 의심까지 생길 지경이다.

가뜩이나 내 맘을 줄줄 읊는 것 같아서 돌아버릴 것 같은데, 좋아하는 인간이 피아노까치 치며 부르고 있으니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하겠네, 진짜!

이런 나를 괴롭히려고 작정한 듯, 노래를 부르는 도란이의 음성이 귀 안으로 흘러들어와 내 몸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어 춤을 춘다. 아주 달콤하고 설레는 춤을.

노래를 더 들었다가는 심장이 들었다 놨다 수준이 아니라, 하도 쿵쾅거려 제자리에서 벗어나 저만치 던져질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목소리가 너무 자극적일 정도로 달콤해서 나방이 불빛에 이끌리듯 도란이의 음성만 좇고 있는 나다.

듣기 좋은 피아노 선율마저 뒷전으로 미뤄둘 정도로.

1분이 1년처럼 길게, 그리고 아찔하게 느껴져 정신까지 몽롱해지는 순간, 도란이와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연주를 멈춘 도란이는 생긋 눈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 계속해서 날뛰던 심장이 단번에 멎어버렸다. 놀라서, 그리고… 과부하가 걸려버려서.

“푸하하하하! 김성준 진짜 웃겨! 아하하!”

영원히 멈출 것처럼 느껴졌던 심장이 다시금 깨어난 건 도란이의 웃음소리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내게 ‘그대로 멈춰라’를 명령한 것처럼 그대로 굳어있던 나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봤다.

도란이는 아예 연주를 멈추고는, 배를 부여잡고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정도로 끅끅대고 있고, 다혜 역시 벽을 치며 웃느라 정신이 없다. 노래가 자기 때문에 끝난 지 오래인데도, 성준이는 얼굴을 오만상 구겨가며 록스타가 울고 갈 정도로 열정적인 립싱크를 하고 있다.

…저렇게 웃는 것도 무리는 아니네. 나까지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본의는 아니겠지만, 살려줘서 고맙다, 성준아. 하마터면 나 그대로 황천길 건너서 염라대왕한테 눈도장 찍힐 뻔했어.

한참을 웃던 도란이는 웃다가 눈물까지 흘렸는지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아, 배 찢어질 거 같다. …어쨌든 이게 두 번째 후보곡인데, 어때? 괜찮아?”

“…어. 아까보다는.”

솔직히 축가로 쓴다면, 아까 노래보다 몇 배로 괜찮은 곡이지만, 방금, 이 노래 때문에 저승길 체험할 뻔해서 영 달갑지가 않다. 심드렁하게 말했는데도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씩 웃는 도란이다. 웃는 걸 보니 심장 떨렸던 게 또다시 도질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너희 커플 연애하기 전이 생각이 나서. 신병휴가 나온 김 모 씨께서 휴가 내내 나를 노래방으로 끌고 가서 ‘다혜를 단념하는 내 마음이 어떤지 들려줄게!’ 라고 하면서 부른 노래이기도 하고.”

“…풋.”

“야! 무덤까지 비밀로 해주겠다며!”

“어, 노래 끝나고 질질 짰던 게 비밀인… 아, 실은 솔로 부대 전용 무덤이었습니다. 이제 솔로 아니시잖아요, 고객님.”

영업용 스마일로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하는 게 꼭 악덕 강매업자를 보는 것 같다.

생각지도 못하게 비밀이 까발려져서인지, 성준이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성준이는 이상한 소리로 울부짖으며, 도란이의 멱살을 잡고 사정없이 흔들었다. 멱살이 잡히거나 말거나 성준이를 놀려대는 도란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비밀 하나 더 까발려야지.”

“뭐, 또 뭐!”

“너 휴가 마지막 날에 그랬잖아. 만약에라도 다혜랑 이어질 수 있게 되면, 이 노래 멋들어지게 불러서 프러포즈하고 싶다고.”

“…아, 어.”

“그러니까 이 축가, 네가 불러라. 성준아.”

장난스러웠던 아까와 달리, 진심이 느껴지는 도란이의 목소리에 떠들썩했던 분위기가 단번에 사그라들었다. 도란이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성준이는 천천히 멱살을 잡은 손을 내려놓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성준이가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나도 그러고야 싶지. 근데 란이 너도 알잖아. 나 엄청 음치인 거. 사람 많은 데서 부르기는 좀….”

“알아. 그러니까 내가 도와줄게. 다른 노래는 몰라도 이 노래 하나만큼은 잘 부를 수 있도록.”

이제야 도란이가 왜 이렇게 축가 준비를 서둘렀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 헤드셋을 너무 많이 착용해서 피어싱에 염증이 생길 정도로 보컬트레이닝 자료들을 듣고, 귀가 아프다고 이어폰을 꺼리면서도 계속해서 들었던 건 성준이의 바람을 이루어주기 위해서였구나.

역시 나는 도란이가 웃을 때 귀여운 것도, 내 평생을 공유해온 사람인 것도 좋지만, 주변 사람이 무심코 내뱉은 말도 기억하고, 눈에 띄지 않게 배려해주는 상냥한 녀석인 게 제일 좋다.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가 없을 만큼 너무 좋아.

여전히 성준이가 머뭇거리기만 하고 별다른 말이 없자, 도란이가 성준이의 어깨를 토닥이며 차분한 목소리로 설득했다.

“너보고 다 부르라는 소리는 아니야. 네 노래 실력이 얼마만큼 향상 되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일단 나도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면서 서포트 할거고, 정 부담되면 마지막 후렴구만 불러도 괜찮아.”

“…란아.”

“솔직히 중요한 건 노래 실력이 아니라 노래에 담을 네 마음이잖아. 난 그걸 잘 전할 수 있게 협조만 하겠단 거야. 그리고 결혼식 날, 신부를 위한 특별한 이벤트 하나 정도는 있어야 재밌지 않겠냐.”

“…할게.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불러보고 싶다.”

“그렇지. 이렇게 나와야 내가 아는 김쭌이지.”

도란이의 말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성준이는 훌쩍거리더니 도란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자기보다 덩치가 한참 큰 성준이가 갑자기 끌어안자 괴로운 신음을 내뱉던 도란이는 이내 피식 웃으며 성준이를 다독였다.

“아, 맞아. 네가 연습하다가 막히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옆에서 도와주겠지만, 이소랑 놀 때는 예외다.”

“오케이, 접수 완료. 도란, …진짜 너는 내 인생 최고의 베프야!”

나는 왜 나랑 놀 때는 예외란 말에 설레고 난리냐. 성준이도 엄청 감동했는지 도란이를 끌어안고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한참을 도란이를 끌어안고 놔주지 않던 성준이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진짜…. 만약 란이 네가 여자고, 우리나라가 일부다처제였으면, 난 너를 두 번째 부인으로 삼았을 거야.”

“하하, 자기. 내가 두 번째야? 실망이네. 우리 헤어져.”

…그러는 너도 성준이가 두 번째라며. 물론, 가장 소중한 친구는 나니까 당연한 거지만. 속으로 의기양양 해하기도 잠시, 도란이의 거절에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도란이의 볼에 아주 찐하게 뽀뽀를 하는 성준이를 보고 패닉에 빠진 나다.

야! 김성준, 이 미친놈이! 감히 나도 안 해본걸! 악!

도란이도 갑작스럽게 볼 뽀뽀를 당하자 안 쓰던 육두문자까지 쓰며 떨어지라고 발악을 한다. 도란이의 저항에도 꿋꿋하게 찐한 볼 뽀뽀를 끝내는 성준이다. 아, 진짜 저딴 걸 부러워하고 있는 내가 어이없을 정도로 싫다.

도란이는 씩씩대면서 성준이가 입술 도장을 찍은 볼을 거칠게 닦고는 우리에게 말했다.

“어쨌든 신랑이랑 신랑 친구는 작전회의에 들어갈 거니까 신부랑 신부 친구는 다른 데 가서 놀다 오세요.”

순식간에 도란이 본가에서 쫓겨난 다혜와 나는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 근처 카페에서 시간이나 때우기로 했다.

============================ 작품 후기 ============================

허억 Otz...축가 편, 한 편 더 남았는데, 지치네요....

하루만 쉬고! 금요일에 오겠습니다 :D

(이래놓고 또 목요일에 올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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