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9 28. 축가는 미리미리 준비합시다. =========================
며칠 전, 다혜네 커플과 도란이, 나 네 사람이 쓰는 단톡방에 공지가 올라왔다.
‘축가 뭐 부를지 정했다! 이번 주 일요일 우리 본가로 올 것!’
오랜만에 보는 시끄러운 이모티콘과 함께 올라온 공지 덕에 날씨 좋은 일요일, 다혜 차에 탑승해 도란이네 본가로 온 우리다. 나야 뭐, 바로 옆집이니까 본가를 들르면 보는 게 도란이네 본가지만, 성준이는 도란이가 내 위층으로 이사 온 뒤, 처음 오는 건지 오랜만이라며 잔뜩 들떠있다.
하긴 나도 외관만 많이 봤지, 안쪽으로 들어가는 건 꽤 오랜만이네. 가족끼리 자주 만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도란이네 식구가 수가 적다 보니 우리 집에서 만나는 게 관례가 됐으니까.
초인종을 누르자 굳게 닫혀있던 대문이 열렸다. 오랜만에 보는 익숙한 내부 풍경에 조금 감회가 새롭다.
마당으로 들어가니 아저씨께서 아끼시는 난초들이 수두룩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게 보인다. …와, 전보다 훨씬 늘어난 거 같아.
도란이네 아저씨는 하나뿐인 아들을 금이야 옥이야 끔찍이 아끼시는데, 난초를 수집하시는 것도 아저씨의 애정표현 중 하나이다. 도란이의 이름이 난초에서 따온 만큼 난초만 보면 아들 생각이 나신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렇게만 보면 훈훈한 얘기겠지만, 정작 당사자인 아들 도란이는 예전부터 마당 가득 자리 잡은 난초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아저씨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셔서 요번처럼 해외로 공연을 나가거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연하는 일이 잦으시다. 덕분에 아저씨께서 공연 때문에 집을 오래 비우실 때마다 난초 관리는 자연히 도란이 혼자의 몫이 되어버렸다.
난초 관리를 강제로 도맡게 됐던 도란이는 군대에 가기 직전 그야말로 폭발해버렸다. 나날이 늘어가는 난초를 보며 착잡해 하던 도란이는 그래도 자기가 군대에 가면 난초를 관리할 사람이 사라지니까 팔거나, 더는 사지 않을 거라고 여기며 참았다고 했다.
하지만, 도란이가 입대하기 일주일 전, 아저씨께서는 언제나처럼 해맑은 얼굴로 새로운 난초를 들고 오셨다. 도란이는 아저씨 손에 들린 난초를 멍하니 보더니, 자기가 군대 갔다 올 동안 마당에 있는 난초 깔끔히 치워놓으라고 살벌하게 성질을 냈다.
…온순한 도란이가 그렇게까지 폭발한 건 지금까지 내가 본 것 중에서 세 손가락에 들어갈 정도다.
도란이가 그렇게 화내는 걸 처음 본 아저씨께서는 엄청 당황한 듯 멈칫하셨다. 하긴, 나도 순간 쫄아서 움찔했었으니까.
그래도 난초를 포기하실 수 없으셨던 아저씨는 너도 없고, 난초도 없으면 나는 무슨 낙으로 사냐고 울분을 토하셨고, 도란이 역시 내가 없으면 난초 키워줄 사람도 없는데 무슨 수로 키울 거냐고 팽팽히 맞섰다. 얼떨결에 나는 난초 하나 때문에 벌어진 부자간의 싸움을 구경하게 됐다.
나중에는 “아버지는 풀떼기야! 나야!”라는 유치한 치정 싸움으로까지 번졌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도란이가 입대하고 나서 깔끔히 사라졌던 난초였는데. …전보다 더 늘어있을 줄이야. 새삼 도란이가 본가로 출퇴근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성준이가 현관문을 부술 듯 노크하니 도란이가 구시렁거리며 문을 열어줬다.
오랜만인데도 여전한 내부다. 예술가 집안답게 엔티크한 가구로 인테리어 된 집안은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남자 둘만 살아서 그런지,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장식품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깔끔한 멋이 느껴진다.
사실, 이 집에서 깔끔하다고 느끼는 건 어떤 방 하나를 보게 되면 쏙 들어가는 감상평이긴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성준이가 화장실 옆에 있는 방문을 벌컥 열었다.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전보다 더 늘어난 것 같다며 감탄하는 성준이다. 성준이의 감상에 도란이가 땅이 꺼지라 한숨을 쉰다.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제발 아무거나 가져갈래? 어차피 아버지 여기 뭐 있는지 기억도 못 하셔.”
“오, 진짜? 나 저거 탐나는데 주라. 피리같이 생긴 거.”
슬그머니 방 안을 들여다보니 정말… 못 보던 사이에 많이 늘었다. 난초는 그래도 중간에 처분이라도 했지, 이 방에 있는 물품들은 내가 알기로는 단 한 번도 비운 적이 없다.
방 두 개를 하나로 합쳐놓은 이 방은 아저씨께서는 추억 저장소라고 칭하지만, 도란이는 쓸모없는 물품창고라고 칭하는 방이다. 아저씨께서 공연을 마치시면 반드시 그 지역의 기념품을 사 오시는데, 그게 몇십 년 동안 누적된 게 바로 저 방에 빼곡하게 쌓여있는 물품들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방 정리정돈을 수시로 했던 도란이지만, 이제는 방치하기로 결론지은 건지 기념품들이 어지럽게 쌓인 것도 모자라 뿌연 먼지까지 흩날리는 게 보인다. …사실, 나도 저걸 어떻게 치워야 할지 가늠이 안 되긴 해.
한동안 기념품들을 감상하던 우리는 도란이가 정한 축가를 듣기 위해 2층으로 향했다.
컴퓨터로 MR을 틀 줄 알았는데, 2층 거실에 있는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는 도란이다. 두 사람이 하늘나라로 떠나게 된 뒤로 도란이가 피아노 앞에 앉은 건 본 적이 없어서 기분이 엄청 이상하다.
설레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울컥하기도 하고, 두근대기도 하고. 복잡 미묘한 감정이 어지러이 뒤섞인다.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손을 풀던 도란이는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피아노 건반을 한 번씩 훑듯 가볍게 연주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연주하는 걸 보는데도 실력이 전혀 녹슬지 않았다.
아저씨 아들 맞긴 맞는구나. 피아노에 앉아 연주하는 옆모습이 아저씨 판박이다.
손을 풀기 위한 즉흥연주에서 단번에 어디선가 들어본 멜로디로 바뀌었다. 이 노래, 분명 기타곡이었던 것 같은데. 피아노로 편곡해서 들으니 기타보다 맑은 음색이라 색다르다. 도란이는 피아노와 잘 어울리는 부드럽고 청아한 미성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잠시,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거 솔로들 한풀이 송이잖아.
뭔가 딴지를 걸긴 걸어야 하는데, 노래가 너무 감미로워서 말이 튀어나오지를 않는다. 다혜와 성준이도 마찬가지인지 멍하니 감상만 하고 있다. …분명 축가 뭐 부를지 정했다고 부르지 않았었나. 설마 이걸 축가로 부르겠다는 건 아니겠지.
황당한데 노래는 듣기 좋아서 더 혼란스럽다. 그 와중에 깨지라는 부분을 달콤하게 부르지 말라고!
아무런 방해도 없이 무사히 노래를 끝마친 도란이는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태연하게 말했다.
“이걸 축가로 부를 생각인데.”
“…이 미친.”
혹시나가 역시나였냐! 어떤 미친놈이 축가로 커플 깨지라는 노래를 부르냐고! 얼추 예상은 했지만, 저렇게 당당한 태도로 선전포고를 할지 몰랐다. 당당한 도란이 때문에 오히려 벙쪄버린 우리다.
“…도란아, 축가를 그런 걸로 고르면 어떻게 해! 결혼식 날, 잘되라고 빌어줘야지, 깨지라고 비는 노래를 부르는 게 말이 되냐?”
“뭐가 어때서. 피아니스트 도현우의 아들에게 축가를 요청했으면, 가장 잘하는 곡으로 부르게 해줘야지. 이 노래 나오고부터 쭉 불러와서 자신 있단 말이야!”
…물론, 네가 노래방 갈 때마다 그 노래를 부르는 건 나도 잘 알지만. 황당함과 짠함이 겹쳐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던 성준이가 굳은 얼굴로 도란이 앞으로 다가간다.
“란. 너 인간적으로 너무한 거 아니냐?”
“뭐가.”
“…나는 널 진짜 베프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친구 결혼식에 그런 축가를 부르겠다고 할 수가 있냐?”
와, 어떻게 해. 성준이 화났다. 금방이라도 도란이 멱살을 잡을 기세다. 란이가 맞을 짓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말려야 하나 고민하는데 성준이가 버럭 소리쳤다.
“왜 봄노래를 부르겠다는 건데? 계절이 다르잖아! 우린 가을에 결혼한다고! 넌 친구가 언제 결혼하는지도 모르냐?”
…어째 분노 지점이 이상한 것 같은데. 성준이의 말에 도란이가 한숨을 쉬며 말한다.
“내가 너희 결혼식이 언제인지 모르고 있을 리가 없잖아. 안 그래도 가을로 가사를 수정할까 고민하고 있었어. …근데 묘하게 리듬이 안 맞아서.”
“가을이 리듬이 안 맞으면 fall은 어떠냐? 한 음절이니까 그럭저럭 맞지 않나?”
“그것도 생각을 해보긴 했는데, fall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헷갈리지 않을까? 아니면, 한자로 추 어때, 추.”
“…어째 좀 이상한데, 또 가을을 뜻하는 게 뭐 있지.”
이 인간들이 곡 정하다 말고 또 아무 말 대 잔치를 여네. 누가 ○○고 4차원 듀오 아니랄까 봐, 여전히 대화의 흐름을 종잡을 수가 없다. 다혜 역시 멍한 얼굴로 두 사람만 쳐다보고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다혜야. 저 미친놈에게서 벗어나.
근데 나도 저 미친놈들 중 하나를 좋아하고 있네? 젠장.
노래를 어떻게 개사할지 고민하던 두 또라이들을 슬슬 말려야 되겠다고 생각할 때쯤, 성준이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피아노를 ‘탁’ 치며 말했다.
“우리 결혼식 끝나고 뒤풀이하잖아. 그때 부르는 건 어떠냐?”
“좋은데? 그냥 부르면 재미없으니까, 내가 여장하고 너한테 차인 실연녀 컨셉으로 부를까?”
“대박! 크, 역시 도란, 넌 진짜 지니어스야.”
“오랜만에 ○○남중 팜므파탈의 매력을 뽐내볼까나.”
엄마, 얘네 둘 진짜 이상해. 난 도대체 저 또라이를 왜 좋아하는 거지. 이제는 나 자신에게까지 자괴감이 밀려온다.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만 있던 다혜가 못 참겠다는 듯 앞으로 나섰다. …그래, 다혜야. 네가 좀 말려봐.
“도란 오빠, 메이크업은 내가 해줘도 될까? 엄청 재밌을 것 같아!”
“나야 좋지. 살면서 처음으로 메이크업 아티스트께서 해주는 메이크업을 받아보겠네.”
…아니, 얘네 셋 전부 이상해. 이 중에서 나만 정상인이니 내가 여기선 제일 이상한 건가. 여러 가지로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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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이류님// 제 소설 보는 재미로 산다니 엄청 자주 와야겠네요. /ㅅ/ 오늘도 내일도 연재할테니 시험 잘 보세요!
분량이 너무 길어져서 나눴습니다. 덕분에 다음 연재는 내일 ;D
요즘 들어 권이소 생존일기가 되는 것 같네요. 이번에는 4차원들 사이에서 살아남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