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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28화 (28/97)
  • 00028 27. 친구에게 사랑에 빠질 때 =========================

    요즘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내 침대에서 동고동락하고 있는 토깽이에게 소원을 비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혹여나 잠자는 사이에 먼지가 묻었을까 토깽이를 팡팡 털어주고는 베개 위에 고이 세워놓고 빌기 시작했다.

    “오늘은 제발 도란이에게 고백…”

    하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살면서 고백 한 번도 안 해본 것도 아니고, 까짓것 눈 딱 감고 저질러버리면 되는 거 아니겠어. 문제는… 뒷감당이지.

    내가 도란이에게 섣불리 고백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한평생을 알고 지낸 소꿉친구니까.

    만약, 아주 만약에 내가 도란이를 좋아하는 것 때문에 우리 둘 사이가 어색해진다면, 나는 타임머신을 제작하기 위해 속세를 벗어날 거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도란이랑 어색해지는 건 최악 중의 최악이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어색해하는 게 슬픈 건 당연하지만, 상대가 도란이라면 그 이유는 두 번째로 젖혀둬도 좋을 정도다. 다른 사람과 다르게 도란이는 내 인생 처음부터 아주 깊게 연결되어 있으니까.

    부모님끼리 친한 사이라 틈만 나면 자주 모이지,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옆에 붙어 있어서 도란이 친구가 내 친구고, 내 친구가 도란이 친구인 수준이지, 거기다 비즈니스로까지 엮인 사이니. 만일 도란이랑 멀어진다면, 절대 우리 둘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깊은 한숨을 쉬고는 토깽이에게 빌었던 소원을 철회하고, 다시 빌기 시작했다.

    “…오늘도 제가 도란이를 좋아하는 걸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해주세요.”

    여러 가지 소원을 빌지만, 결국은 언제나 똑같은 소원으로 마무리하는 나다. 부디 내 마음 때문에 소꿉친구라는 관계가 깨지지 않도록. 이 마음을 이어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기거나, 아니면 체념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절대 들키지 않기를.

    일이 좀 한가해진다 싶으면 종종 하게 되는 웹서핑이지만, 최근 내 검색어들은 보면 볼수록 한숨만 나오는 것들만 가득이다.

    ‘짝사랑 이루어지는 법’, ‘짝사랑 포기하는 법’, ‘소꿉친구가 좋아졌어요.’, ‘연애 심리 테스트’ 등등.

    친구들이 운세나 사주, 심리테스트 책을 챙겨보는 걸 이해하지 못했던 주제에 지금은 시간만 나면 그런 것들만 보고 있다.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잘 될 거라는 말을 보면 위안을 받고, 내가 도란이 이상형이 아니라는 말을 보면 좌절하는 나다.

    흑흑, 그 인간이랑 썸탈 때도 안 이랬었는데.

    블로그 글을 뒤적거리다가 내가 도대체 뭐하는 짓인가 싶어 신경질적으로 꺼버렸다. 숨을 길게 내쉬며 앞머리를 위로 올리는데 어느샌가 내 옆에 와있는 후배와 눈이 마주쳤다.

    “선배님,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아니, 전혀. 무슨 일이야?”

    “점심시간이잖아요. 돼지불백 드시러 가실래요?”

    “아니, 괜찮아. 오늘은 입맛이 없네. 나 신경 쓰지 말고 먹고 와.”

    “네, 알겠습니다.”

    깍듯하게 인사하는 후배를 보내고 책상에 도로 엎드렸다. 아, 진짜 머리가 복잡해서 그런지 입맛이 없다. 뭘 먹을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래도 일하려면 뭔가 먹기는 해야겠고. 대충 편의점에서 빵이나 사서 때울까.

    딱히 배가 고픈 건 아니지만, 직장인에게 일할 에너지는 반드시 있어야 하기에 배만 채울 요량으로 편의점에 왔다. 점심시간이지만, 웬일로 편의점이 한산하다. 덕분에 편하게 고를 수 있겠네. 기껏해야 빵 고르는 게 전부지만.

    두리번거리며 베이커리 코너로 향하는데, 편의점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변경됐다. 아까는 시끌벅적한 음악이 울려 퍼졌었는데, 갑자기 조용한 선율로 변경되어 나도 모르게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근데 이거 어째 노래 가사가 친구에서 연인이 되는 그런 내용 같은데. 신경 쓰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청신경을 곤두세우고 듣게 되는 내가 싫다.

    내 마음을 줄줄이 읊어주는 것 같은 노래 가사에 공감하기도 잠시, 듣다 보니 이 노래는 쌍방이잖아? 난 짝이라고 짝! 내가 다가간다고 받아줄 보장이 전혀 없다고! 괜히 울컥해서 스피커를 째려보며 씩씩대는데, 점원이 날 이상한 사람 바라보듯 보고 있다.

    왜요, 뭐. 스피커 째려보는 사람 처음 봤습니까. 사람이 살다 보면 스피커도 째려볼 수 있는 거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카운터로 후다닥 들어가는 점원이다. 됐다, 피곤하게 기 싸움 해서 뭐해. 빵이나 골라야지. 애써 노래에 신경 끄고 빵을 고르려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액정을 보니 도란이 전화다.

    “이소 누님, 좋은 점심.”

    “오냐. 또 우리 엄마랑 같이 밥 먹고 있어?”

    “아니, 오늘은 본가에 좀 늦게 갈 예정.”

    요즘 들어 매일 본가로 출근 도장을 찍는 도란이다. 덕분에 우리 엄마는 그리도 좋아하는 도란이를 자주 볼 수 있어 마냥 기분이 업 되신 상태다. …나는 자주 못 봐서 쓸쓸해 죽겠는데.

    “그럼 혼자서 밥 먹고 있어?”

    “응. 집에서 대충. 이소 너는? 뭐 먹고 있어?”

    “나도 대충 빵이나 사 먹을까 싶어서 편의점 왔는데.”

    “…너 오늘 야근한다고 하지 않았어? 빵 말고 도시락 사 먹어. 저녁 되면 배고프겠다.”

    걱정이 가득한 도란이의 목소리에 내 입에서 생각도 거치지 않고 그러겠다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내가 대체 언제부터 도란이 말을 잘 들었다고! 속으로 울컥했지만, 도란이가 밝게 웃는 소리를 듣자 단번에 울컥했던 게 누그러졌다. 흑흑, 미치겠다. 나 진짜 중증인가 봐.

    …도시락 코너가 어디 있더라.

    밥을 먹고 온 후배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와서 내게 건넸다. 아무래도 아까 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게 신경 쓰인 듯하다. 고맙다며 커피를 건네받자 생긋 웃어 보이는 후배다. 요전에 낙하산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착하고 성실한 후배를 얻게 되다니.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저절로 떠오른다.

    “선배님, 점심은 드셨어요?”

    “응,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웠어.”

    고개를 끄덕이던 후배는 힐끔거리면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내 얼굴에 뭐 묻었나?

    “일이 잘 해결되셨나 봐요. 엄청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내가?”

    “네.”

    나한테 있었던 일이라고는 도시락으로 배 채우고, 란이랑 잠깐 통화한 게 전부 …아, 젠장. 집에 가면 토깽이 먼지를 좀 더 성실하게 정성들여 털어줘야겠다. 그렇게 간절하게 소원을 빌었는데, 왜 티가 팍팍 나는 거냐고.

    “선배님이 여전히 기분이 우울하셨으면, 저만의 기분 푸는 방법을 전수해드리려고 했었는데.”

    “보나 마나 오키드 작가 소설 읽기겠지.”

    “어떻게 아셨어요?”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되묻는 후배다. …그야 네 책상에 가득한 게 도란이 책이고, 네가 쉬는 시간마다 그걸 읽고 있는 걸 매일 보니까. 그나저나 괴기소설을 읽고 기분을 푸는 건 도대체 무슨 수로 가능한 거지. 한가해지면 물어봐야겠다.

    어쨌든 도란이의 충고 덕에 배도 든든해졌으니 열심히 밤까지 달려야겠다.

    한창 몰입해서 일하고 있는데 책상이 덜덜덜 떨렸다. 누구지 싶어 확인했더니 도란이다. 액정을 확인하자마자 입꼬리가 씰룩 올라간다. 누가 볼까 싶어 재빨리 입을 가리고는 스마트폰을 들고 휴게실로 나왔다.

    “응, 왜.”

    “이쏘, 카스텔라 먹을래?”

    “뜬금없이 웬 카스텔라?”

    “아, 나 지금 병원 왔는데 근처에 카스텔라 집이 있더라고. 아주머니 카스텔라 좋아하시니까 하나 사갈까 하는데, 너도 먹고 싶으면 하나 더 살까 싶어서.”

    도란이가 뭐라 말하긴 했지만, 내 귀에는 도란이가 병원에 있다는 말밖에는 안 들린다. 또 뭐 만들다가 다친 건지 걱정이 앞섰다. 어디 다친 거냐고 걱정스레 물었더니 다행히 그건 아니라며 웃는다.

    “다친 건 아니고 피어싱에 염증 생겨서. 요새 헤드셋을 자주 꼈더니 자극받았나 봐.”

    “…그러게 적당히 좀 하지. 많이 심해?”

    “아니, 약이랑 연고 처방받은 거 잘 먹고 잘 바르면 금방 낫는대. 염증보다 이어폰 껴야 하는 게 걱정이야. 이어폰은 귀 아픈데…. 그래도 뭐 곧 끝나니까.”

    “그렇다고 헤드셋 끼고 그러지 마. 헤드셋 낄 때는 피어싱 빼고!”

    “넵, 알겠습니다.”

    속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크게 다친 건 아니라니까 다행이다. 안도의 숨을 내쉰 뒤, 도란이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카스텔라 먹을 건지 묻는 도란이의 말에 잠시 고민했지만, 먹겠다고 대답했다. 카스텔라가 끌려서라기보다는 …도란이가 카스텔라를 들고 우리 집으로 올 테니까.

    얼굴 보면 또 심장 떨려서 안절부절못하겠지만, 그래도 어떻게 해. 보고 싶은데.

    “근데 이소, 요새 안 바빠?”

    “응? 갑자기 왜?”

    “…아니, 요새 너 내 전화 꼬박꼬박 잘 받길래.”

    뜨끔.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정확히 한방 얻어맞았다. 좋아하는 거 들키면 어쩌지? 들켰나? 이미 들켜버렸나? 온갖 잡생각이 머리에서 빠른 속도로 강강술래를 한다. 아직 제게 뒷감당할 용기가 부족합니다! 토깽 님! 아니, 아무나 제발 제가 평정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세요!

    “뭐, 뭐. 그야 네가 예전보다 연락을 자주 안 하니까.”

    “…오늘 6번째 통화하는 건데.”

    …아, 그랬나. 끽해야 두세 번 정도인 줄 알았는데. 헛기침을 큼큼하고는 애써 얼버무렸다.

    “뭐, 오늘은 좀 하긴 했네. 그래도 길게는 안 하잖아.”

    “너 3분도 길다고 끊어버리잖아. 오늘은 평균 10분 이상했는데. 4번째로 통화한 건 30분 넘게 했고.”

    얘 오늘따라 왜 이렇게 명탐정 뺨 때리고도 남을 정도로 꼼꼼하고, 예리하지. 설마 눈치챈 건가. 그렇게 티 나나? 짧은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풀가동해 고민하다가 버럭 하며 잡아떼기로 결론지었다.

    “뭐! 그래서 불만이야?”

    “아니, 바쁜데 통화 오래 하는 걸까 봐 걱정돼서. 나야, 이소 너랑 통화하면 좋지.”

    “…야, 너 그… 아니다.”

    좋다는 말 막 꺼내고 그러지 말라고 하려다가 혹시라도 들킬까 봐 지레 겁먹고 꾹 참았다.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통화를 끝내긴 했지만, 그래도 오늘은 도란이 얼굴 보겠구나 하는 생각에 기뻐하는 나다.

    아, 이런 내가 진짜 싫다.

    ============================ 작품 후기 ============================

    3분컵라면님// .../ㅅ/ (수줍) 저도 컵라면님, 조, 좋아합니다♥

    현이류님// 월요병 해소를 도와드리려고 했지만, 월요일의 끝에 올리게 되어버렸네요 '-T 글쎄요, 두 사람은 언제쯤 쌍방통행을 하게 될까요? (짓궂음)

    아, 이소가 괴로워하는 게 너무 좋다. 너무 즐겁다. 꺄르르륵 (사악)

    다음 편은 내일! 화요일입니다. 월,화,수 3일 연속 연재를 할 것인가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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