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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27화 (27/97)

00027 26. 고통의 입덕 부정기  =========================

토끼 인형이 안고 있는 장미 꽃다발을 멍하니 쳐다보다 이내 문을 쾅 닫고 거실로 나왔다.

침착, 침착하자, 권이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생각을 하고 있어. 예상하지 않은 일에 놀라서 심장이 두근거리는 거야. 절대, 절대로 아까 했던 생각 때문에 두근거린 게 아니라고.

그래, 상식적으로 어? 28년 동안이나 지긋지긋하게 알고지낸 소꿉친구를 좋… 아니, 일단 냉수 한 잔 마시고 속 차리자.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페트병 째로들이키니 흥분했던 게 좀 식는 느낌이다.

역시, 단순히 놀라서 그런 거라니까, 권이소. 연애 안 한 지 오래됐다고 놀라서 두근거리는 거랑 좋아해서 두근거리는 거 분간도 못 하냐.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봐. 네가 도란이를 좋아할… 아무래도 냉수 또 마셔야겠다.

페트병 2ℓ에 가득 들어있던 생수가 5분도 지나지 않아 바닥을 드러냈다. 가뜩이나 고기로 가득 찼던 배가 물까지 들어가니 황소라도 한 마리 삼킨 것처럼 빵빵해졌다. 물먹는 하마도 아니고 대체 이게 뭐야. 차라리 딴생각을 하자.

물이 가득 들어가 출렁거리는 배를 매만지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언제나 그렇듯 옆에 있던 쿠션을 꼭 끌어안고서 텔레비전을 켰더니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예능이 아니라 드라마가 나오고 있다.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릴까 하다가 조금 뒤에 좋아하는 예능이 나오니 그냥 보기로 했다.

드라마에 관심이 없어 구체적인 이유는 모르겠지만, 주인공으로 보이는 커플이 싸우고 있다. 아마도 여자가 남자를 떼어내려고 심한 말을 퍼붓는 것 같은데. 남자 기죽은 거 봐. 뭐, 저래도 드라마 특성상 결말은 해피엔딩,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겠지만.

두 배우의 열연에 몰입해서 보다가 도중에 리모컨을 찾아 꺼버렸다.

여자의 말을 듣고 상처받은 얼굴을 한 남자가 어디론가 가더니 갑자기 장미 꽃다발을 들고 나타났으니까. 필사적으로 안 들으려고 했는데, 당신을 좋아한다는 고백까지 듣고 말았다.

…망할. 애써 자각하지 않으려 했는데 또 떠올랐어.

아, 텔레비전 다시 켤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면 딱 봐도 아까부터 했던 그 좋… 아니, 잡생각을 계속할 것 같은데. 배가 빵빵해서 움직이기는 싫고.

뭘 해야 좋은가 고민을 하고 있는데, 현관에 던져놓은 가방에서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는 게 들린다. 귀찮은데 그냥 무시할까. 근데 도란이면 어쩌지? …잠깐만, 도란이면 어쩌긴 어째! 걔가 전화 거는 게 뭐가 대수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몸은 어느새 벌떡 일어나 현관까지 와 있는 나다.

흑흑, 이왕 온 거 누가 걸었는지 확인이나 해야지. 도란이면 좋… 지 않아! 하나도 안 좋아! 부들거리는 손으로 휴대폰 액정을 확인하니 하하, 망할 내 동생 이혁이네. 오븐에서 먹음직스럽게 부풀어 올라야 할 빵이 맥없이 푹 꺼지는 걸 보는 것 같다.

“뭐.”

“누나누나, 란이 형…”

“란이 뭐! 왜!”

“…아니, 란이 형이랑 같이 있냐고. 누가 폭력 고릴라 아니랄까 봐 성질은.”

가까이만 있었어도 하나뿐인 누님을 고릴라라고 칭하는 동생을 친히 한 대 팼을 텐데. 자취하면서 다른 건 하나도 아쉽지가 않은데, 이혁이에게 사랑의 매를 실시간으로 줄 수가 없다는 게 못내 아쉽다.

“란이 여기 없어. 왜.”

“아까 형이 누나 보러 간다고 했으니까 같이 있나 해서. 형이 전화를 안 받길래 누나한테 걸었는데.”

“몰라. 밥만 먹고 헤어졌거든. 씻는 중이거나 바빠서 못 받는 거겠지. 가뜩이나 심란해 죽겠는데 왜 전화해서 사람 피곤하게 만들어!”

“엉? 왜 심란한데? 형이랑 싸웠…”

“아니거든! 끊어!”

전화를 끊으려는데, 수화기 너머로 성깔 더럽다느니 하는 이혁이 목소리가 들린다. 진짜 저거 만나면 반 죽여 놓을 거야. 근데 지금은 그럴 기력도 없다. 혹시나 도란이한테 전화가 올까 싶어 스마트폰만 들고 소파에 도로 누웠다.

진짜로 바쁜 일이 있는 건지 자정이 가까워져 오는데도 연락이 없다. 평소에 재밌게 보던 예능도 스마트폰을 신경 쓴다고 번갈아 본 탓에 무슨 내용인지 흐름이 끊겨 재미가 없다. 멍하니 스마트폰만 바라보다 내일 출근해야 한다는 현실을 깨닫고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배도 꺼졌으니 씻고 잠이나 자야지.

슬리퍼를 질질 끌며 욕실로 향하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이 시간에 누구지 싶어 인터폰을 확인하니 도란이다. 응? 도란이?

평소 같으면 비밀번호를 따고 들어올 애가 초인종을 누르길래 무슨 일이 있나 했는데, 오히려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빤히 보는 도란이다.

“란아! 갑자기 웬….”

“…딱히 우울해 보이는 것 같지는 않은데.”

“응?”

뜬금없는 도란이의 말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자 도란이가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는다.

“아니, 혁이한테 부재중 전화가 온 거 보고 전화 걸었더니, 네가 무슨 일이 있는지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걱정돼서 왔어.”

“…아, 그래?”

나 걱정돼서 왔다는 말에 왜 이렇게 심장이 떨리지. 눈앞이 아찔할 정도로 떨려서 숨 쉬는 법조차 잊어버릴 것 같아.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무슨 일 있어?”

“아니, 전혀 없어. 내가 권이혁 전화 까칠하게 받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너 때문에 떨려 죽을 것 같아서 이런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다행히 아무렇지 않은 척 한 게 통한 건지 도란이가 안도했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건 그러네. 괜찮으면 됐어. 갈게.”

“…아, 란아. 잠깐만.”

“응? 왜?”

이대로 헤어지기가 아쉬워서 붙잡기는 했는데, 무슨 얘기를 꺼내야 할지를 모르겠다. 아무 말도 안 한다고 해서 무시하고 가버릴 도란이가 아닌 건 알지만, 초조한 건 어쩔 수가 없다.

초조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너무 두근거려서 그런 걸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생각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린다. 마치 화이트홀이 실존하는 것처럼 수많은 말들이 튀어나와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뒤섞여버려. 이대로 말을 내뱉으면 진짜 아무 말 대잔치 할 것 같다.

계속 생각해도 별달리 떠오르는 말이 없어서 한동안 침묵만 유지했다. 이럴 때는 엄마 닮아서 말주변이 없는 게 조금 원망스럽다. 내가 붙잡아놓고도 아무런 말이 없자 잠시 뭔가 생각하던 도란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맞아. 할 말 더 있었는데.”

“…어? 무슨 말?”

“혁이가 전해달라던 말이 있었거든. 그…”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는 도란이다. …권이혁. 너 또 뭔 개소리를 도란이한테 전하라고 했길래 애가 이렇게 웃어. 또 고릴라니 뭐니 하면서 선전포고라도 전해달라고 했냐니까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어째 내가 내 무덤을 셀프로 판 것 같은 묘한 이 기분은 뭘까.

“그게 아니라… 아주머니께서 장조림을 하셨는데, 이소 너 먹을래?”

“응, 먹을래. 근데 그게 그렇게 웃긴 일이야?”

“아니, 아주머니께서 혁이한테 그러셨대. ‘네 누나랑 란이 형, 둘이 같이 있을 테니까, 네 누나가 장조림 먹으려고 하는지 란이 형한테 물어봐달라고 해’라고. 근데 너랑 먼저 통화해놓고, 뒤늦게 연락된 나한테 너 먹을 건지 물어봐달라고 하니까 웃겨서.”

듣고 보니 그러네. 걔는 왜 나한테는 장조림 얘기도 안 꺼내놓고는 도란이한테 물어봐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나한테는 란이 옆에 있냐고 물어본 게 전부면서.

“더 웃긴 건 혁이한테 이소랑 통화했을 때 물어보지, 왜 나한테 물어봐달라고 하냐고 했더니 그제야 뭐가 이상한지를 깨닫더라. 혁이 진짜 귀엽지 않아?”

“아니, 그건 귀여운 게 아니라 모자란 거란다.”

단호하게 말하자 뭐가 그리 웃긴지 배를 부여잡고 큭큭대는 도란이다. 도란이는 웃지만, 난 띨빵한 내 동생의 앞날이 걱정된다. 엄마가 시켰다고, 응용력 없이 곧이곧대로 실행하다니. 단언컨대 걔 머리는 박치기용이지, 두뇌를 사용하는 용도로 쓰는 건 아닐 거야.

그래도 멍청한 내 동생 덕분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물꼬가 트였다.

“그런데 왜 이혁이 전화 안 받았던 거야?”

“아, 헤드셋 끼고 뭐 듣는다고 전화 오는지 몰랐어.”

“뭐 듣고 있었는데?”

“음치 클리닉.”

대체 노래도 잘 부르는 애가 음치 클리닉은 왜 듣고 있는 거야. 피아니스트가 기초부터 연습해야겠다며 어린이용 바이엘 1권 연주하는 거랑 매한가지잖아. 이해가 안 가긴 하지만, 친한 친구 축가인 만큼 잘 부르려고 노력하나보다 싶어서 넘어가기로 했다.

“이소야.”

“어?”

“토깽이 귀엽지.”

솔직히 보긴 봤지만, 정신을 저 너머에 놔두고 봐서 어떻게 생겼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새하얗다는 것밖에는 기억에 남는 게 없다. 그래도 준 사람이 물어보니까 좋게 대답해야겠지. 고개를 끄덕이니 도란이가 환히 웃는다.

장담하는데 토깽이보다 네가 웃는 게 몇 배는 더 귀여… 나 진짜 미쳤나. 참아라, 권이소. 인내해라, 권이소. 뇌내 필터링을 유지해! 생각하고 있는 거 내뱉지 마!

“꽃은? 마음에 들어?”

“응. 예쁘던데.”

“다행이다.”

왜 나는 도란이가 저렇게 배시시 웃을 때마다 심장이 뛰는 걸까. 이미 정답은 뻔히 알고 있잖아.

계속 이렇게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도 무리인 걸 알면서. 어차피 도란이랑 마주할 때마다 이럴 텐데. 그때마다 부정하면서 고통스러워할 바에야 차라리 확실하게 인지하는 게 나아.

내가 정말 도란이를 좋아하는 건지.

“란아.”

“응?”

“앞으로나란히.”

내 말에 갑자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순순히 양팔을 앞으로 뻗는 도란이다.

“팔 조금만 더 벌려.”

“…이렇게?”

“응.”

아, 진짜 미치겠다. 하라는 대로 다 하는 게 왜 이렇게 귀엽지. 저절로 튀어나오는 웃음을 부들거리며 꾹 참았다. 이미 좋아하는지 아닌지 인지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좀 더 확실히 해두자 싶어 그대로 도란이를 끌어안았다.

“…어? 이소야?”

“…응, 됐으니까 가봐.”

아주 잠깐 껴안았다가 도란이 품에서 벗어났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멀뚱히 서 있기만 하고 있던 도란이는 나를 빤히 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아니, 일단은 괜찮아졌어.”

“…뭐, 괜찮아졌다면 다행이지만. 갈게. 잘 자.”

“응, 너도.”

최대한 태연한 척 문을 닫고는 그대로 스르르 주저앉았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세상에. 잠깐 껴안았을 뿐인데 심장이 쿵쾅쿵쾅 아주 달나라까지 널뛰기를 한다. 미쳤다, 진짜 미쳤다, 권이소.

어떻게 28년 지기 소꿉친구를, 그것도 진짜 빼도 박도 못할 만큼 좋아하고 있잖아.

============================ 작품 후기 ============================

3분컵라면님// 너무 좋다고 해주시다니 ㅠㅠ 저도 제 작품 좋아해주시는 독자님들이 너무 좋아욧..*(응?)

현이류님// 재밌다고 해주셔서, 그것도 완결까지 함께해주시겠다니! 감사해요/ㅅ/ 저도 저런 소꿉친구 갖고 싶어요 (8-8)

쿵심쾅심하는 심장을 지켜 살아남아라, 권이소 수난일기. (두둥)

오늘도 재밌게 봐 주세요 :D 다음 연재는 음, 내일로 할까요? 화요일로 할까요? (고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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