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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24화 (24/97)
  • 00024 23. 그래도 부모님은 자식사랑 =========================

    술상은 자고로 식탁보다는 밥상에 준비해야 제맛이라는 아빠의 주장에 거실 테이블에 밥상을 차렸다. 근데 이거 안주가 아니라 식사용으로 만든 거 아니었나. 뭐, 술이라면 언제라도 오케이긴 하지만.

    전기 버너 위에 올려놓은 해물탕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니, 해물탕의 맛을 알아서인지 내 위장도 꼬르륵거리고. 옆에서 군침을 삼키는 아빠도 마찬가지인지 도란이를 도와 상을 차리는 엄마 몰래 한술을 뜨셨다.

    그 순간 귀신같이 나타나신 우리 김은재 여사님. 도란이가 들어간 부엌을 힐끔 살피더니 이내 아빠를 보고 반쯤 죽일 것 같은 포스를 내뿜으신다. 엄마의 포스에 입맛을 다시며 얌전히 숟가락을 내려놓는 아빠다. …역시 우리 집 실세는 김은재 여사님이시지.

    우리 집 서열을 다시 한번 깨닫는 그때, 도란이가 밑반찬을 들고 나왔다.

    자기가 부엌에 있는 동안, 거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까맣게 모르는 도란이는 시무룩한 우리 아빠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마를 힐끔 쳐다보니 어느새 요조숙녀처럼 호호거리고 웃고 계신다. 이쯤 되면 ‘도란 효과’가 솔직히 좀 무섭다.

    접시에 담아온 반찬들을 테이블에 놓자 푸짐한 저녁상 겸 술상이 차려졌다. 먹음직스러운 자태에 보자마자 술 생각이 간절하다. 술 셔틀은 언제 오는 거야, 대체.

    아빠도 나와 같은 생각 중인지 현관과 해물탕을 계속해서 번갈아 보고 계신다. 아, 소주랑 해물탕 한입으로 스타트 끊고 싶은데. 계속되는 기다림에도 응답하지 않는 현관문을 보고 마지못해 한술 뜨는데 누군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났다.

    왔구나! 술 셔… 아니, 내 동생!

    “란이 형!”

    “어? 혁아!”

    …지 누나보다 란이를 더 좋아하는 놈이라 예상은 했다지만, 이놈 새끼도 오자마자 란이 타령이냐. 망할 동생 새끼는 술은 대충 문에다 두고는, 우다다 달려와 란이를 와락 끌어안고 번쩍 들어 올린다. 얼씨구.

    “형형형형, 완전 보고 싶었어! 망할 실습만 아니었어도 형네 맨날 놀러 가는 건데!”

    “그러게. 엄청 오랜만에 얼굴 보는 것 같다. 학교는 다닐 만해?”

    “늘 하던 것처럼 무술 연습만 하면 되니까 누워서 껌 씹기? 뱉기?”

    “떡 먹기다 빙구 자식아!”

    오랜만에 보는 지 누나는 안중에도 없이 란이를 붙들고 이산가족 상봉을 하는 혁이 녀석 엉덩이를 힘껏 걷어찼다. 이혁이는 엉덩이를 붙잡고 이상한 괴성을 빽빽 질러대더니 나를 째려본다. 뭐, 왜.

    “무식하게 힘만 세 가지고… 왜 때려! 왜!”

    “어쭈, 하늘 같으신 누님한테 개기네? 오랜만에 뒈지게 처맞고 싶냐, 동생 새끼야?”

    “이씨! 이 괴력 고릴라가 진짜!”

    “…풋, 고릴…”

    우리의 싸움을 가만히 보고 있던 도란이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고서 웃음을 터트렸다. 이 인간, 보나 마나 지가 줬던 고릴라 옷 입었던 거 떠올렸네. 얄미워서 한 대 칠까 하다가 살벌하게 우리 남매를 노려보고 계시는 김 여사님의 후환이 두려웠기에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차를 가져온 도란이와 원래 술을 안 드시는 엄마 빼고 세 사람만 술 파티를 벌렸다. 크, 진짜 환상의 술안주네. 해물탕이 적당히 얼큰하고 개운해서 마시는 족족 해장 되는 느낌이다.

    초딩 입맛인 이혁이도 한 입 먹더니 화색이 돼선 도란이 손을 붙잡는다.

    “…형, 나랑 평생 같이 살자.”

    “음, 내가 대마법사로 전직하게 되면 진지하게 고려해볼게.”

    “앗싸! 2년만 기다리면 형은 내 꺼다!”

    …이 인간들이 쌍으로 뭔 헛소리를 하고 있어. 그런데 남정네 둘의 얘기를 듣고 있던 우리 엄마는 엄청 흡족해하신다. 우리 엄마 상상 이상으로 개방적이신걸.

    “아줌마는 란이가 우리 집에 온다면야 언제든지 환영이지. 아들로 입양하는 건 무리니까 우리 집에서 같이 살거나, 저거랑 결혼해서 우리 집 사위로 들어오면….”

    아니, 도란이만 옆에 붙어있을 수 있으면 방법은 뭐가 됐든 상관없다는 거구나.

    “엄만 무슨 그런 막말을 하는 거야! 형한테 실례잖아! 불쌍한 란이 형. 얼마나 충격일까, 흑흑.”

    “…진짜 나한테 죽고 싶냐, 권이혁.”

    이 집에서 내 서열과 인권은 어디에 있는가. 단언컨대 뽀삐보다 아래일 거다. 물론, 내 밑에는 이혁이가 자리하고 있겠지. 평소 같으면 엄마 말에 맞장구칠 아빠가 웬일로 별말씀이 없다. 소주를 원샷하신 아빠는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리셨다.

    “당신 그만해, 애들 곤란해 하잖아.”

    “왜 이래. 새삼스럽게. 이런 게 하루 이틀이었나.”

    “얘들이 한두 살 먹은 애야? 하지 말라면 하지 마, 그냥.”

    갑자기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웬일로 아빠가 정상적인 말씀을 하시긴 했지만, 뒷감당을 어찌하시려고. …봐봐, 벌써 엄마 표정이.

    다행히 도란이가 괜찮다며 엄마에게 살갑게 애교를 떤 덕분에 분위기는 금세 화기애애해졌다. 이럴 때 보면 은근히 란이 쟤 처세술의 달인인 것 같아.

    술자리가 무르익으면 익을수록 점점 말수가 적어지는 아빠지만, 오늘은 유독 분위기를 잡으신다. 아빠는 술잔을 비우고는 낮게 깔린 음성으로 도란이를 불렀다. 아빠에게서 느껴지는 익숙지 않은 진중한 분위기에 자체 음 소거가 된 우리 가족이었다.

    “란아, 일전에 아저씨랑 얘기했던 거… 아직 생각하는 중이니?”

    “…네, 신중하게 생각해보는 중이에요.”

    “…그래, 쉽사리 결정하기는 힘든 일이니까.”

    아빠는 도란이에게 술을 건네려다, 도란이가 차를 가져와 마시면 안 된다는 걸 떠올렸는지 자기 술잔에 소주를 따르셨다.

    “물론, 란이 네 생각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겠지만, 그래도 아저씨는 말이다. 이것도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한번 만나보는 게 어떨까 싶구나.”

    “안 그래도 소개받으면 만나보려고 생각했어요. …보지 않고 생각하려니 쉽사리 판단이 안 서서.”

    “그래, 일단 만나보렴. 그러고 나서 생각해 봐. 란이 너는 원체 속이 깊은 아이니까 아저씨는 네가 알아서 잘 판단할 거라고 믿는다.”

    “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그래, 무슨 말 할지 안다. 네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말하지 않으마.”

    …다 들리게 말해놓고 뭘 말을 안 해. 아빠 많이 취하셨나. 엄마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하는 건지 혀를 쯧쯧 차신다.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이혁이는 아빠랑 도란이를 번갈아 보더니 물음표를 가득 띄우고는 꼬치꼬치 캐물었다.

    “뭐야? 뭐야? 뭔데? 형 누구 만나? 소개받아?”

    “어…, 아마도?”

    “뭔데. 누구야, 누군데? 몇 살인데? 예뻐?”

    “푸핫, 본 적도 없는데 예쁜지 어떻게 알아.”

    아빠가 분위기를 잡는 바람에 잠시 우중충해졌던 분위기는 비글처럼 나대는 내 동생 때문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이혁이가 쉴 새 없이 떠드는 통에 음 소거 모드가 해제된 엄마와 나였다. 분위기 잡던 아빠도 도란이를 귀찮게 하는 이혁이를 타박하며 껄껄 웃으셨다.

    이후로 별다른 문제 없이 어버이날 술자리는 밝고 유쾌한 분위기로 마무리됐다.

    오랜만에 가족이랑 만나니 좋긴 하지만, 직장인의 삶이란 내일 출근을 저절로 걱정하게 되어버린다. 그래도 도란이 차 타고 편히 가니까 불행 중 다행인가.

    엄마는 도란이랑 내 손에 먹을 걸 가득 쥐여주었다. 그리고는 뭐가 그리 아쉬우신지 도란이 손을 쉽사리 놓지 못하신다.

    “도란이 네 아버지가 해외에 있어서 다른 날보다 오래 있긴 했지만, 그래도 보내려니 섭섭하네.”

    “저도 아주머니랑 헤어지려니까 아쉬워요. 대신 다음에 한 번 놀러 올게요.”

    “그래, 꼭 놀러 와. 알았지? 저 웬수년 아니 딸 집까지 잘 바래다주고.”

    “네, 걱정하지 마세요.”

    역시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가 보다. 웬수년이라는 게 튀어나오는 걸 보니. 불시에 들리는 정다운 호칭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우리 부모님께 서글서글하게 대하는 도란이를 보니 왠지 나도 부모님을 조금은 챙겨드리고 싶어 아주 오랜만에 두 분을 꼭 안아드렸다.

    그리고 이혁이에게 아까 못 때렸던 회심의 한 방을 날리고는 도란이와 집을 빠져나왔다.

    안주가 워낙 맛있어서 술은 먹는 둥 마는 둥 했는데, 도란이는 내가 취한 줄 아는 건지, 내가 걸음도 못 걷고 비틀댈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다. 우리 엄마였다면 내가 술 취해 고꾸라지는 걸 보고 그 자리에서 박장대소하겠지. 흑흑.

    “란이 너는 울 엄마한테 엄청 예쁨받는 거 같다. 아빠한테도 그렇고. 혁이도 너 엄청 따르잖아.”

    “왜, 서운해?”

    “아니, 서운한 거보다는 내가 얼마나 못했으면 천대받는 걸까 싶어서 좀 죄송했어.”

    “너 천대받는 거 아닌데.”

    도란이는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었다. …너는 내가 오늘 하루 얼마나 찬밥신세였는지 제대로 못 본 거니? 우리 엄마가 나랑 단둘이 있을 때 어떤지를 네가 봐야 하는데. 내가 퉁명스럽게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툴툴대자 잠시 고민하던 도란이가 입을 열었다.

    “사실… 너희 부모님 너 엄청 걱정하셔.”

    “우리 엄마·아빠가?”

    “응, 두 분이 말씀하지 말아 달라고 하셨는데. 실은 내가 네 위층으로 이사 간 거 너희 부모님이 부탁하셔서 그런 거야.”

    “헐? 왜?”

    “아무래도 여자애 혼자 가족이랑 멀리 사는 게 걱정되셨나 봐. 내가 너 이사하고 나서 연락을 자주 했던 것도 그 때문이고.”

    그러고 보니 내가 자취를 한 이후부터 지겨울 정도로 연락했었던 도란이다. 늘 붙어 있다가 멀리 떨어지니까 심심했나 싶었는데 우리 부모님이 부탁한 거라니…. 새삼 충격이다.

    “물론, 네가 웬만한 성인 남성 여럿은 두드려 패고도 남…”

    “너도 혁이처럼 맞아볼래?”

    “죄송합니다, 이소 누님. 어쨌든 네가 암만 유단자라도 부모님은 자식이 걱정되는 거잖아. 거기다 네가 술을 좋아하니까 더 걱정이 크셨을 거야. 아무래도 많이 취하면, …필름도 끊기고, 사고도 치고, 몸도 제대로 가누질 못하니까.”

    “…그래서 이사 온 거야?”

    “응. 나도 네가 걱정돼서 그러겠다고 한 거니까 괜히 신경 쓰지 마.”

    네가 지금 한 말 때문에 다른 의미로 엄청 신경 쓰이거든요. 그렇게 예쁘게 웃으면서 걱정된다느니 하는 말 막 내뱉고 그러지 말라고! 평소에도 이런 말 거리낌 없이 하는 거 알긴 아는데, 갑자기 그런 말 들으면 또 심장이 제멋…

    아니, 술 취해서 그런 거다. 이건 술 때문에 건강이 나빠진 거다. 술이 원수인 거다.

    “오늘도 아주머니가 줄곧 네 안부만 물어보셨어. 밥은 잘 챙겨 먹는지, 일은 잘하고 다니는지, 직장에서 속상한 일은 없어 보였는지. 덕분에 온종일 권이소 전문 리포터 된 것 같았지.”

    “…엄마는 왜 나한테 안 묻고 너한테 묻는 거래.”

    “아마 너처럼 쑥스러워서 그러시는 거 아닐까. 너 아주머니랑 엄청 닮았거든.”

    하긴… 난 아빠보다 엄마를 많이 닮았지. 말주변이 없는 것도, 다른 사람한테 살갑게 굴지 못하는 것도, 성격도, 생긴 것도. 딱 봐도 엄마 딸인 게 티가 날 정도니까.

    …역시 내가 먼저 엄마한테 자주 안부 인사 드려야겠다.

    새삼 왜 엄마가 나보다 도란이를 다정하게 대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귀찮을 텐데도 엄마 부탁이면 꼬박꼬박 들어주는 데다 무뚝뚝한 딸이랑은 다르게 살갑고, 다정하고, 무슨 이야기를 해도 잘 받아주니까.

    고마우셔서 그런 거구나.

    “고마워.”

    “응?”

    “…나 대신 우리 엄마 챙겨줘서 고맙다고.”

    “오, 권이소 씨. 갑자기 철 드셨네?”

    “시끄러!”

    하여튼 저건 고마워서 인사를 해도 금세 쏙 들어가게 만들어요. 그래도 밝게 웃는 모습이 나쁘진 않았다. 아까 아빠랑 얘기할 때처럼 심각한 표정 하는 것보단 낫지. 도란이랑 심각한 건 안 어울려서 그런다기보다는 우울한 것보다 밝게 웃는 게 훨씬 보기 좋으니까.

    늘 웃어줬으면 좋겠다. 아니, 도란이한테 늘 웃는 일만 있었으면 좋겠다. 어릴 때부터 녀석을 볼 때마다 생각했던 거였다. 예나 지금이나 웃는 모습이 가장… 귀여우니까.

    그래서 도란이가 심각해질 이야기를 안 꺼내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호기심이 이겨버렸다. 도란이의 웃는 얼굴을 빤히 보던 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근데 아까 아빠랑 얘기한 거 무슨 얘기야?”

    “…어, 글쎄.”

    “뭐가 글쎄야. 불과 한두 시간 전에 얘기해놓고.”

    “지금 그거 얘기했다간 운전대 잡은 손에 수전증이 덜덜덜 올 거 같아서 먼 미래로 패스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운전석에 타는 도란이다. 얘 요새 나한테 비밀이 많아지는 것 같은데.

    하긴… 아빠 말대로 한두 살 먹은 애들도 아니고, 언제까지 이렇게 붙어 다니면서, 숨기는 거 없이 지낼 수도 없는 거겠지. 왠지 외면하고 있던 현실을 고스란히 마주한 것 같아 씁쓸해졌다.

    ============================ 작품 후기 ============================

    이소 남매가 싸우면 그야말로 철권 현실판을 보는 것 같기에 도란이는 절대 끼어들지 않습니다. 그저 팝콘을 먹으며 관전할 뿐.

    참고로 이소네는 가족 모두 유단자이며, 무술 단을 딴 게 다섯 손가락을 가뿐히 넘습니다. (…)

    다음 연재는 아마도 가까운 시일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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