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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23화 (23/97)

00023 22. 이집 자식은 전데요.   =========================

오늘도 불쾌한 직장인의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아침을 대충 토스트로 때우려고 식빵을 토스터에 넣는데, 동시에 우리 집 문이 벌컥 열렸다.

뭐지, 요즘 토스터에는 자동문 기능도 있나. …잠깐, 이거 어째 도란이가 할 법한 생각 같은데.

“이소 대령! 긴급 지원 요청!”

“…이 미친놈이? 아침 댓바람부터 왜 남의 집에 쳐들어오고 난리야!”

이른 아침부터 밖에 나가는지 외출복을 차려입은 도란이가 다급하게 다가와서 뭔가를 내밀었다. 뭔가 싶어 보니까 헤어왁스다.

“벌써 4번째 실패야. 이소 누님, 제 머리 좀 손질해주세요.”

“…넌 네 머리카락도 제대로 간수 못하냐.”

“근 10년 만에 시도하는 거란 말이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그러고 보니 손질을 망쳐서 머리를 감은 것인지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적어도 머리는 말리고 와서 부탁해야 할 거 아냐. 한숨을 쉬며 시계를 보니 출근 시간까진 여유가 있어 손질을 도와주기로 했다.

드라이기를 가져와서 도란이의 머리를 드라이해주는데, 꼭 본가에서 키우는 파피용 뽀삐를 목욕시키고 말리는 느낌이 난다. 남의 머리를 말려준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좀 재밌기도 하고.

3년 전쯤부터는 머리를 기르고 다녔지만, 그전까지는 줄곧 숏컷을 하고 다닌 나였다. 덕분에 왁스 손질은 눈감고도 할 수 있다는 말씀. 어느 정도 볼륨감 있게 띄워주면 되려나.

이왕이면 제대로 해주자 싶어 고데기까지 세팅해서 손질하는데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 평소에는 귀찮다고 머리만 빗고 끝인 녀석이 무슨 바람이 분 거지.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나.

“근데 란이 너, 갑자기 머리 손질은 왜 하는 건데? 평소엔 안 하잖아.”

“왜 하기는. 당연히 예쁘게 보이려고 하는 거지.”

그 말을 듣자마자 뭔가가 속에서 꿈틀하고 튀어 올랐다. 왠지 모르게 도란이 머리를 손질하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누구한테.”

“아! 원래 손질할 때 머리카락이 뜯기는 느낌이 나는 게 정상이야?”

“누구!”

“…잠깐, 진짜 아파, 악! 김은재 여사님!”

망할 김은재가 대체 누구… 아, 어디서 들어봤다 싶었는데 우리 엄마네. 엄마 암쏘쏘리, 벗알러뷰. 이성을 되찾고는 꽉 잡고 있던 도란이 머리카락을 놓았다. 놓자마자 앓는 소리를 내며 자기 머리를 부여잡는 녀석.

내가 잡아봤자 뭐 얼마나 세게 잡았다고 엄살인가 싶어 손을 확인하니 도란이 머리카락이 가득하다. …재빨리 털어서 증거인멸.

…미안, 오다가 마트 들러서 검은콩이라도 사줄게.

불신의 눈초리를 하는 도란이를 겨우 달래서 앉혀놓고는 미안함을 가득 담아 제대로 손질해줬다. 완성하고 보니 꽤 만족스러운 결과물에 뿌듯해진다. 헤어스타일 좀 다듬었다고 인물이 사네, 살아. 크, 아직 권이소 솜씨 안 죽었구먼.

손질하는 내내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던 도란이도 결과물이 마음에 드는지 거울을 보고 감탄한다. 훗, 제 솜씨가 이 정도입니다.

“땡큐! 갈게! 출근 잘해!”

“아, 야!”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서 밖으로 나가려는 도란이를 다급히 붙잡은 나다. 우리 엄마가 도란이를 자기 자식들보다도 예뻐해서 가끔 둘이서만 만날 때도 있지만, 아침 댓바람부터 만난 적은 거의 없었다. 솔직히 아침부터 만나서 할 것도 별로 없고. 그래서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궁금해 물어보았다.

“우리 엄마랑 대체 아침부터 뭘 하길래 급하게 나가는 거야.”

“아니, 약속은 점심때인데 만나기 전에 할 게 많아서. 아버지 용돈도 보내드려야 하고, 아저씨 아주머니 선물도 준비해야 하니까.”

“엥? 왜 뜬금없이 우리 엄마·아빠한테 선물을 하려는 건데?”

내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날 빤히 쳐다보는 도란이. 왜, 뭐, 왜?

“저기 권이소 씨, 오늘이 며칠이게?”

“…오늘? 5월 8… 아?”

“역시나 까먹고 계셨네. 여사님께 일러야지.”

내가 우리 엄마한테 발차기로 맞아 죽는 거 보고 싶어서 그러냐! 나는 살기 위해 현관으로 나가려는 도란이를 붙잡고 말하지 말아 달라고 필사적으로 빌었다. 그러자 장난이라며 웃는 도란이. …저기요, 그 장난에 제 수명이 단축된 것 같거든요.

“어제 아주머니께서 안 본 지 오래됐다면서 보고 싶다고 전화 주셨거든. 마침 오늘 어버이날이기도 해서 아주머니랑 데이트하기로 약속 잡았지.”

“뭐야. 우리 엄마는 나한테는 문자 한 통도 안 하더니 왜 너한테는 보고 싶다고 전화까지 하는 건데?”

“아마 넌 직장에서 일하니까 부담 주기 싫으셔서 그러신 거 아닐까. 아무튼 아주머니랑 온종일 데이트할 예정이니까 시간 되면 저녁에 카네이션이라도 사서 와. 갈게.”

그렇게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나가는 도란이다.

아주머니께서 하늘나라에 가시고, 우리 부모님이 한동안 도란이네 집 살림을 도와줘서인지 도란이는 어버이날마다 우리 부모님께 소소한 선물을 드렸었다. 도란이와 달리 태어날 때부터 섬세함과는 담을 쌓은 지 오래인 우리 남매이기에 부모님은 도란이의 선물을 엄청 기뻐하시며 받았었다.

성인이 되고 언제부턴가 도란이가 어버이날을 챙기지 않았는데, 우리 부모님은 내심 서운하고 아쉬웠는지 어버이날만 되면 이렇게 도란이에게 연락해 약속을 잡으신다.

그러고 보니 도란이가 언제부터 어버이날 선물을 안 챙겼더라. 아, 제대하고 나서부터다. 하긴 그때쯤에는 원호 오빠가 어버이날에 우리 집에 들렀었지. …아씨, 왜 또 그 인간이 생각나냐. 갑자기 짜증이 확 밀려오네.

어쨌든 간만에 카네이션이라도 사서 본가에 들러야겠다. 문득 딸이라고 있는 게 오늘이 어버이날인지도 모르니까 우리 엄마가 도란이를 자식보다 애지중지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이거 자업자득인가, 흑흑.

어버이날이라고 일찍 퇴근시켜주신 덕분에 해가 지기 전에 본가에 들를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딸이 비싼 카네이션 바구니를 들고 오든 말든 도란이와 사이좋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계신 우리 엄마다. 게다가 뽀삐마저 엄마 무릎 위에서 나를 아는 체도 안 한다.

어째 제가 이집 딸이 아니고 쟤가 이집 아들 같습니다, 어머니.

우리 엄마는 도란이가 그렇게나 좋으신지, 도란이만 있으면 소녀 감성이 폭발하셔서 다소곳이 앉아 수줍은 요조숙녀처럼 웃으신다. 심지어 말투마저 온화하고, 부드럽게 변하시기까지 하시지. 우리 가족끼리 있을 때는 포스 좔좔 흐르는 조폭 마누라 같으신 분께서.

“왔어? 생각보다 일찍 왔네.”

“응, 회사에서 어버이날이라고 일찍 마쳐줬거든.”

“어, 딸 왔니. 앉으렴.”

…앉으렴. 웬수년이 아니라 딸. 뽀삐한테 시키듯 “앉아”라고 명령조로 말씀하실 우리 엄마가 도란이 있다고 나보고 “딸 왔니. 앉으렴.” 이래. 이게 이혁이가 이따금 써먹는다는 ‘도란 효과’인가.

평소와 다른 엄마를 보고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말투가 온화하다고 명령에 불복할 때의 응징도 온화해지는 건 아니기에, 별말 않고 얌전히 소파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솔직히 그들만의 세상이고, 난 추임새만 넣는 정도지만.

웃으며 우리 엄마의 얘기를 듣던 도란이가 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아저씨랑 혁이도 올 테니 저녁 준비해야겠네요.”

“어머, 아줌마가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니?”

“아니에요, 오늘은 제가 해드리기로 했잖아요. 편히 쉬세요.”

“고마워서 어째. 내가 집에서 누가 해주는 음식을 다 먹어보고. 자식새끼들도 안 해주는 걸.”

새끼에서 미묘하게 악센트를 주며 나를 째려보는 우리 엄마. 아아, 엄마의 눈초리가 따갑다.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꽂혀온다.

저라고 안 해주고 싶겠습니까. 도저히 남에게 먹일 수가 없는 음식이라 그런 거지. 도란이 쟤는 제가 만든 죽을 보고, 하얀색 이로치 메x몽을 연성했다며 지금까지도 주머니 괴물 창조자라고 놀려댄다고요.

거실에 단둘이 남자마자 다소곳이 오므렸던 엄마의 다리가 쩍 벌려졌다. 아, 도란이가 안보이자 동시에 사라지는 도란 효과. 아까까지만 해도 쉴 새 없이 얘기하던 엄마는 나와 단둘이 있게 되자 “일은.”, “밥은 먹고 다니냐.” 두 마디만 하시고 말씀이 없다.

나 역시 살갑게 구는 성격이 아니라 근황만 전하고 묵언 수행 중이다. 그래도 명색이 어버이날인데, 무슨 얘기를 꺼내야 하지 고민하고 있을 무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반가움에 고개를 돌렸더니 아빠가 들어오고 있다. 아빠는 내가 테이블 위에 놓아둔 카네이션 바구니를 보더니 놀라며 말했다.

“뭐야, 이번에는 란이가 이렇게 큰 카네이션 바구니를 사 온 거야?”

“…란이가 아니라 내가 사 왔거든. 아빠.”

“이상하네. 오늘 분명 해가 동쪽에서 떴었는데.”

“아빠!”

나 진짜 이 집 자식 아닌 거 아닐까, 알고 보니 도란이랑 뒤바뀌었다던가. 흑흑.

믿었던 아빠마저 오랜만에 온 딸내미는 안중에도 없고 도란이 타령이다. 부모님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내가 얼마나 안 챙겨드렸으면 이럴까 죄송스럽기도 하다. 그래도 아빠가 카네이션 바구니를 보고 좋아하시니 좀 뿌듯하긴 하네.

확실히 엄마보다 말수가 많은 아빠가 오니 우리 가족끼리도 간단한 대화까지는 되고 있다.

다른 가족은 엄마랑 딸이 있으면 수다가 끊이지 않는다던데 우리 가족은 정 반대다. 나랑 엄마만 있으면 별말 없이 각자 할 일에 열중하고, 아빠랑 이혁이만 있으면 둘의 관심사가 비슷하다 보니 낚시 채널이나 격투기 채널을 보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쉽게 말해 분위기 메이커인 이혁이나 말주변이 좋은 아빠가 없으면 엄마랑 나는 별 얘기를 안 나눈다. 그렇다고 사이가 안 좋은 건 아니지만.

“어, 아저씨 오셨어요?”

“그래. 맛있는 냄새가 현관에서부터 솔솔 나던데. 뭐 만드는 중이니?”

“네, 해물탕 끓이고 있어요. 오셔서 간 좀 보실래요?”

“오, 좋지. 혁이 보고 소주도 사 오라고 해야겠는데.”

아빠는 가방도 대충 벗어두고는 후다닥 주방으로 향했다. 엄마 역시 맛이 궁금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가셨다. …해물 킬러인 우리 부모님을 적절히 노린 메뉴선택에 존경을 표합니다. 아빠 대신 내가 이혁이한테 술 사 오라고 연락해놔야겠다.

이혁이한테 메신저를 보내는데, 연이은 엄마·아빠의 감탄이 들려온다. 그렇게 맛있나?

계속되는 칭찬에 내심 해물탕 맛이 궁금해 슬금슬금 주방으로 가서 해물탕을 조금 얻어먹었다.

“와, 엄마가 한 것보다 몇 배는 더 맛있는 것 같아! 역시 10년 넘게 도씨 집안의 살림을 책임진 내공은 확실히 다르네.”

진심이 가득 담긴 칭찬을 꺼냈을 뿐인데 도란이는 기쁘다는 듯 환히 웃고, 엄마는 도란이가 안 보는 사이 팔꿈치로 내 배를 가격했다. 오랜만에 맞았는데도 전혀 녹슬지 않은 엄마의 실력. 솔직한 감상 한 번만 더 했다간 저세상 구경하겠네.

…살아남으려면 란이에게 우리 엄마한테 점수 따는 법 좀 배워둬야겠다.

============================ 작품 후기 ============================

이소네 가족 첫 등장! 오늘도 재밌게 봐 주세요 ;)

다음 연재는 내일 목요일 입니다 (연속 3일 연재네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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