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22화 (22/97)
  • 00022 21. 머피의 법칙  =========================

    첫 단추부터 잘못 잠그면 그 앞에 펼쳐지는 건 안 해도 될 개고생이라고 했던가. 오늘의 내가 그런 상태다.

    평소보다 심한 생리통으로 벌벌 기면서 출근 준비를 끝냈지만, 완벽하게 지각. 그 덕분에 편집장님께 웬일로 지각을 했냐며, 꾸중 아닌 꾸중을 듣고 일을 시작하긴 했는데, 배가 너무 아파서 집중이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조퇴해야 하는 건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사건이 터졌다.

    몇 주 전, 우리 출판사에 신입이 하나 들어왔는데, 소위 말하는 낙하산 출신이다. 일 잘하고 성실한 낙하산이라면 크게 개의치 않겠지만, 성실은 개나 줘버렸고, 뺀질대는 건 탑이며, 몇 번이나 가르쳐줘도 도통 이해를 하지 못한다.

    심지어 편집자로 들어온 주제에 맞춤법도 젬병이다. 오, 세상에.

    편집장님도 함부로 못 건드는 윗사람 자제분이라서 그런지, 이 인간이 싸놓은 똥은 어쩌다 보니 내가 치우는 식이 되었는데, 오늘은 그야말로 대형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오늘 낙하산이 담당하고 있던 작가님이 잔뜩 화나신 상태로 자신의 작품을 형편없는 퀄리티로 만드는 우리 출판사를 못 믿겠다고 연락하셨다.

    놀라서 낙하산이 수정한 원고를 확인했더니, 맞춤법은 한글 프로그램 빨간 선으로 대충 수정했는지 군데군데 엉망인 게 보이고, 고친다고 고친 문장은 더 이상하지를 않나, 무엇보다 끝부분으로 갈수록 대충대충. 딱 봐도 성의가 없어 보였다.

    작가님께 출판사가 신뢰를 얻지 못한다는 것, 그건 여러모로 최악이다. 판이 좁은 문학계에서 소문이 퍼지면 차후 다른 작가님과의 계약에도 지장이 생긴다는 소리이니까.

    편집장님은 죄송하다며 연신 사과하셨고, 새로운 담당자를 붙여드리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배가 아파죽겠는데 조퇴도 못 하고, 망할 후배 하나 잘못 둔 죄로 일까지 떠맡게 되었으며, 후배 교육을 어떻게 했냐며 아파죽겠는데 된통 혼나기도 했다.

    “난 몇 번이나 꼼꼼하게 가르쳤다고! 그 새끼가 귓구멍에 캔디라도 쑤셔 박았는지 말귀를 못 알아 처먹는 걸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요!” 라고 신경질을 내고 싶었지만, 다달이 빠져나갈 세금 때문에 꾹 참았다. 더러운 사회생활.

    덕분에 남들은 다 퇴근했는데, 혼자서 처량하게 진통제에 의지해 야근하고 있는 나다.

    아, 배 아파. 배고파. 신경질 나. 집중 안 돼. 서러워.

    원고를 수정하다 말고 워드 프로그램에 정신 나간 년처럼 심경 고백을 쓰다 보니 두 배로 울적해졌다. 진짜 퇴사하고 싶다. 회사 동료 때문에 퇴사하고 싶다고 하는 게 뭔지 몰랐었는데, 오늘 확실히 알 것 같다.

    그 새끼가 안 그만두면 개 같아서 내가 이직할 거야.

    그래도 우리 출판사처럼 조건 좋은 곳도 이 업계에서 드문데. 젠장. 아, 진짜 싫어.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내가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거야. 텅 빈 사무실을 바라보니 서럽고, 괜히 울컥하고.

    다른 날이라면 해탈의 경지에 도달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지만, 하필이면 감정 기복이 심한 생리 첫날에 이런 일이 터지다니. 더럽고 치사해서 후딱 끝내놓고 집에 가서 치킨 뜯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데 주룩주룩 비까지 내린다. 하하, 우산도 없는데 망했어요. 비가 와서 그런지 생리통이 심해지는 것 같아, 빈속에 또다시 진통제를 삼키며 일에 집중하려는데 휴대폰 액정이 켜졌다.

    보니까 도란이 전화다. 진짜 입도 떼기 싫은데. 그래도 무슨 일인가 싶어 마지못해 받았다.

    “왜.”

    “이쏘, 어디야?”

    “회사.”

    “어? 퇴근 시간 지났잖아.”

    내 말이 그 말이다. 하하. 내 상황이 너무 짜증이 나서 헛웃음이 나온다. 미친년처럼 수화기에 대고 웃던 나는 한숨을 쉬고는 전화를 마무리지으려했다.

    “야근한다. 끊어.”

    “갑자기 웬 야근이래…. 늦게 끝나?”

    “몰라! 일찍 끝나든 늦게 끝나든 뭔 상관이야! 나도 모르겠다고!”

    사무실이 떠나가라 소리치며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고 나서야 방금 내가 뭔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오늘 하루 쭉 쌓아뒀던 짜증을 애먼 도란이한테 터트려버렸다.

    …아, 권이소 진짜 개 쓰레기.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제대로 폭탄을 투척하네. 란이 놀랐을까. 아니, 어쩌면 자긴 그냥 물어봤을 뿐인데 내가 갑자기 성질을 내서 화났을지도.

    진짜 화난건지 더는 전화도 안 오네. 다시 전화를 걸어 사과해야 하나 싶었지만, 이런 기분으로는 사과도 제대로 안 나올 것 같다. 뭣보다 일이 태산이니 이것부터 처리해놓고 내일 사과해야지.

    얼추 마무리를 지어놓고 시계를 보니 어느덧 10시 반이다. 배는 배대로 고프고, 비는 여전히 주룩주룩 내리고, 우산 사려고 편의점까지 뛰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착잡하다. 아, 몰라. 그냥 귀찮으니까 맞고 갈래.

    터덜터덜 아래로 내려가는데 회사 문 앞에 누가 서서 폰을 만지고 있는 게 보인다. 비 피하려고 피신 왔나. 힐끔 쳐다보며 가려는데 상당히 낯익은 얼굴에 우뚝 멈춰 섰다.

    “…란?”

    “어, 이쏘! 드디어 나왔네.”

    “야, 너 여기서 뭐 해?”

    “너 기다리고 있었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입을 벌리고 도란이만 쳐다보는 나다. 아까 란이가 전화했을 때가 8시였으니까. 2시간 반이나 지났는데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것도 비가 주룩주룩 내려서 날도 추운데?

    …이 멍청이가 진짜. 대책 없이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전화라도 주던가. 또 감기 걸려서 열 오르면 어쩌려고. 속상하고 걱정돼서 도란이의 볼을 어루만졌다. 볼이 살짝 차가워 괜히 더 속상했다.

    “바보야, 기다리고 있다고 전화를 해야 할 거 아냐! 네 폰은 폰이 아니라 게임기냐?”

    “이거 게임기 아니었어?”

    “야!”

    또다시 발끈해서 소리를 지르는데 도란이가 자기 볼을 감싸고 있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바쁜데 괜히 연락하면 업무 꼬일까 봐 그냥 있었어.”

    “그래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가뜩이나 춥고 비도 오는데.”

    “밖에서는 별로 안 기다렸어. 한 …20분? 그동안은 저쪽 카페에서 있었지.”

    그렇게 말하며 우리 회사 근처에 있는 카페를 가리켰다.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카페는 어느덧 불이 꺼져있었다. 도란이는 같이 있던 다혜 커플이랑 창가 쪽에 앉아 사무실 불이 언제쯤 꺼지나 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다혜랑 성준이는 어디 갔는데?”

    “걔네 둘은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 카페 문 닫을 때, 혼자 기다리겠다고 돌려보냈지.”

    “너도 가지 왜 기다리고 있어.”

    “아까 통화했을 때 네가 갑자기 화내길래. 무슨 일 있나 걱정돼서.”

    도란이의 말에 오늘 있었던 일들이 떠올라 감정이 북받쳤다. 눈물이 팽 돌아 입술을 꽉 깨무는데, 도란이가 웃으며 다가오더니 나를 꼭 껴안았다.

    “뭐, 뭐하는 거야!”

    “에너지 충전.”

    “…미친.”

    “오늘 고생했어, 권이소.”

    도란이가 내 귓가에 대고 나긋하게 중얼거렸다. 그 말 한마디에 아까까지 우울했던 게 온데간데없이 날아갔다. 위로하듯 등을 토닥이는 손길, 추운 날씨에도 선명히 느껴지는 따스한 체온, 무엇보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려서 머릿속이 새하얀 백지장처럼 되어버렸다.

    …그래도 좀 위로가 되긴 하네. 몸이 안 움직일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려서 문제지.

    나는 어느 정도 진정되자 괜찮으니 떨어지라며 도란이를 밀어냈다. 그런데 이 또라이가 안 떨어진다. 오히려 밀어내자 더 세게 안는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또 이상한 생각할 것 같으니까 제발 좀 놔줘!”라고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하고, 업어치기라도 해서 떨어트려야 하나 고민하는데 도란이가 칭얼거린다.

    “나도 위로해줘.”

    “…왜, 무슨 일 있어?”

    “응. 나 완전 발렸어.”

    “뭐? 왜. 누구한테.”

    “…배다혜한테 철권으로.”

    너네 셋이서 오락실 갔다 왔니. 아마도 제대로 발린 모양인지 걔는 밥 먹고 철권만 했냐며 투덜거리는 도란이다. …당연하지. 고딩 때, 내가 주말마다 오락실 끌고 가서 가르친 수제자인데.

    왠지 좀 미안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등을 두들겨주는데 도란이가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나 걔네 결혼식에서 축가 부르게 됐어.”

    “엥? 축가?”

    “응. 내기했거든. 성준이는 이겼는데, …구원투수로 나온 다혜한테 참패당해서.”

    도란이는 그렇게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정말 걔네 커플한테 여러모로 알뜰하게 헌납하는구나. 아니, 뜯기는 건가. 어쩐지 도란이가 조금 측은하다.

    “그래서 복수하려고 걔네 커플보고 뷔페에서 한턱 쏘라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다음 기회에네.”

    “…죄송합니다.”

    “미안하면 먹을 거 사줘. 오락실에서 너무 달렸더니 배고파 죽을 것 같아.”

    “오케이. 내가 치킨 쏜다.”

    우리는 도란이가 가져온 우산을 나눠쓰고는 빗길을 걸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워도 누군가가 옆에서 위로해준다면, 까짓것 하루 정도는 개고생해도 버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킨집에 가서 그 빌어먹을 낙하산 욕을 신명 나게 했더니 그동안 묵혀둔 체증이 싹 날아가기도 했고.

    그리고 며칠 뒤, 인내심 바닥인 낙하산은 뜬금없이 유학을 떠난다며 퇴사를 했다. 덕분에 낙하산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융통성 있고, 싹싹한 새 신입이 들어왔다.

    다만, 도란이의 열혈 팬이라, 내가 도란이 담당자라는 얘기를 듣고는 다음 소설은 어떤 주제인지, 얼마나 진행됐는지 틈만 나면 물어보는 게 문제였다. 도란이는 새로 온 신입이 네 팬이라고 얘기해줬더니, 신이 나서 1:1 팬 미팅이라도 해야 하나 설레발을 쳤다. 신비주의 드립치며 독자 사인회도 안 하는 주제에.

    그래도 낙하산한테 시달릴 때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행복하다. 앞으로도 직장에 뼈를 묻고 충성하겠습니다.

    ============================ 작품 후기 ============================

    빗자루계인님// [system]도란 님이 호감도를 획득하셨습니다. 저, 저도 외로워여 으엥 8-8 (부여잡음)

    진한비님// 도란이랑 이소 귀엽게 봐 주셔서 감사해요 /ㅅ/ 저도 얘네 볼때마다 엄마미소가 지어져요..*

    푸른달유에님// 헉, 한꺼번에 코멘트를 3개나 /ㅅ/ 이번 기일 편은 여러모로 짠내나지만 ㅠ_ㅠ 무릎베개가 신의 한수였다고 생각해요!(?)

    사실 이소가 폭발할 걸 예감했던 도란이는 성준이에게 재빨리 패스했고, 애꿎은 성준이의 고막이 터져버렸어요 (해피엔딩)

    저 드디어 타블렛 펜을 찾았어요! :D 낙서퀄이긴 하지만, 여우 잠옷입은 도란이를 그려보았답니다. 올릴까말까 고민하다가 올렸어요 (헿) 작가의 뜰에서 보실 수 있어요.

    [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은 작가가 팬아트를 그립니다(?)]

    다음 연재는 내일 수요일 입니다 :D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