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21화 (21/97)
  • 00021 20. 네가 울면 무지개 별장에 비가 온단다.  =========================

    도란이는 자신의 상처를 숨기고 싶어 했지만, 아저씨가 나중에 알게 되면 더 슬퍼하실 거라는 친구들의 설득에 어른들께도 사실대로 말하기로 동의했다. 나는 도란이를 집으로 데려가 부모님들께 손목의 흉터를 보여주며, 도란이가 어떤 상태인지 설명했다.

    우리 부모님은 도란이를 어루만지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왜 바보같이 참고 있었냐고 속상한 마음에 야단을 치기도 하셨다.

    아저씨는 상처투성이인 도란이의 손목을 붙잡고는 서럽게 오열하셨다. 아버지가 돼서 아들의 상태가 이렇게까지 안 좋은지도 모르고 있었다며, 아버지 자격이 없다고, 미안하다고 계속해서 되뇌셨다.

    그날 이후, 아저씨는 도란이의 심리 치료에 모든 걸 거셨고, 주변 사람들 역시 도란이가 나아지도록 노력했다. 다행히 도란이는 차차 안정을 찾아갔고, 1년 정도 지나자 전처럼 밝게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익숙하게 성묘상을 차리고 있는 도란이를 바라봤다. 그때를 생각하니 엇나갈 뻔한 자식을 바른길로 인도한 것 같아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나온다. 크, 장하다 권이소. 기특하다 권이소.

    도란이가 주스와 술을 복숭아나무 주변에 뿌리는데 물방울이 조금씩 내 몸에 떨어졌다. 뭐지, 쟤가 술을 나한테 뿌린 건가. 왠지 도란이라면 어떤 기행이라도 저지를 수 있을 것 같아 진지하게 의심하는데, 순식간에 거센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분명 일기예보에서 오늘 날씨 맑다고 했는데? 하긴, 기상청의 말을 신뢰한 내가 바보구나.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도란이도 놀란 건 마찬가지인지 입을 허하고 벌린 채로 말했다.

    “…헐, 나도 모르게 기우제를 한 건가.”

    “또 뭔 헛소리야!”

    “아, 기우제가 아니면 아까 이소 네가 운 것 때문에 그러나? 왜 그런 노래 있잖아. 네가 울면 무지개 연못에 비가 온단… 혹시 너 왕눈이?”

    “…됐다. 피신이나 하자.”

    상대했다간 비만 계속 맞을 것 같아 녀석의 팔을 잡고 별장으로 들어왔다. 빨리 피신한다고 했지만, 세차게 내리는 비에 옷은 이미 홀딱 젖어버렸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인 건 도란이도 마찬가지였다.

    온몸이 젖어서 그런지 추워서 으슬으슬 몸이 떨렸다. 봄이긴 해도 꽤 쌀쌀한 날이었다. 거기다 비까지 오니 기온이 낮아지는 건 당연했다.

    이러다 감기 걸리겠다. 나야 원체 튼튼하니까 자고 일어나면 감기고 뭐고 날아간다지만, 쟤는…. 기껏 낫게 했는데 또 열이 끓어오르면 골치 아픈데.

    나는 서랍장에서 뭔가를 찾고 있는 도란이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서랍 이곳저곳을 빠르게 뒤적거리던 도란이가 드디어 찾던 걸 발견한 건지 커다란 타올과 푹신한 까만 털로 도배된 옷을 가져왔다.

    “너한테 사이즈가 맞는 옷이 이거밖에 없네. 2층 가서 갈아입고 와.”

    “…응, 땡큐.”

    오랫동안 남자들만 들렀던 별장에 왜 내 사이즈에 맞는 옷이 있는 건지 조금 수상했지만, 일단 추우니까 감사히 받았다.

    2층에 있는 아무 방에 들어가 수수께끼인 검은 옷을 펼쳐보았다. 사이즈가 큰 스웨터 정도로 예상했었는데 한 벌로 된 동물 파자마 같은 디자인이었다.

    내심 무슨 옷일지 궁금해 서둘러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서자, 내 얼굴을 한 로랜드 고릴라 하나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뒤늦게 발견한 후드까지 쓰자 완벽한 킹콩이 되어있는 나다.

    이 인간이 진짜…!

    사태파악을 끝내고는 도란이의 이름을 신경질적으로 외치며 1층으로 후다닥 내려갔다. 나한테는 이상한 킹콩 옷을 건네준 주제에 자기는 꼬리가 도톰하고 큰, 귀여운 여우 파자마를 입고 있는 도란이다.

    “도란! 이게 뭐야! 죽을래?”

    “…풉, 푸하하하하하하하!”

    킹콩으로 탈바꿈한 나를 보자마자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웃어대는 얄미운 또라이 녀석. 엄청 잘 어울린다고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놀려댄다. 이제는 아예 바닥에 엎드려 흐느끼는 녀석을 씩씩거리며 걷어찼다.

    “아, 진짜 이게 뭐냐고! 어디서 이런 옷을 구한 거야 대체…. 나 이거 입기 싫으니까 네가 입고 있는 파자마라도 벗어서 내놔!”

    “어맛, 변태!”

    양팔로 가슴을 감싸며 나를 흘겨보는 도란이.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온다 진짜.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자 정자세로 고쳐 앉은 도란이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이건 너한테 사이즈가 안 맞아서 안 돼. 성준이 옷이라서 나한테도 크다고.”

    그러면서 말아 올린 소매를 내리는 녀석. 소매가 스르르 내려오자 도란이의 손이 모조리 덮였다. 확실히 내가 입으면 바닥에 질질 끌릴 것 같긴 하네. 근데, 잠깐만. 성준이 옷?

    “…대체 왜 성준이 옷, 그것도 잠옷을 네가 가지고 있는 건데?”

    “응? 아아, 이 옷, 내가 다혜한테 부탁받고 만든 거야. 걔네 커플, 셀프 웨딩촬영 계획 중이잖아. 특별한 커플 잠옷 같은 거 입고 찍고 싶다고 하길래 만들어주겠다고 했지.”

    “…헐.”

    인형 옷도 척척 만들고, 인형 집이나 미니어처, 심지어 간단한 가구까지 만들 정도로 손재주가 뛰어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사람 옷까지 만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것도 저렇게 시판제품 저리 가라 할 고퀄리티로.

    와, 무슨 일이든 꾸준히 하면 뭐가 되긴 되는구나. 망할 마리안느 2세로 인해 고딩 때부터 쌓아온 실력이 저 정도로 향상됐을 줄은. 거적때기 가지고 인형 옷이라 주장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나는 놀람 반 존경 반인 시선으로 녀석이 만든 옷을 바라봤다. 잠시 넋을 놓고 있는데 찰칵하는 셔터 소리가 들렸다. 뭐지 싶어 정신을 차리니 폰으로 킹콩이 된 나를 찍고 있는 도란이가 보인다.

    “야! 엽사로 영구박제하려고 그러지!”

    “아냐, 매력 있어서 찍은 거야. 진짜 귀여… 귀… 푸하하하하하!”

    다시금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자지러지는 도란이다. 내 꼴이 그렇게 우습냐. 물론, 아까 나도 거울 보면서 좀 웃긴 했지만, 그래도 이딴 옷을 건네준 당사자가 비웃으면 안 되지!

    “야, 커플 잠옷이면 다혜 거도 있을 거 아냐. 그거라도 내놔.”

    “…어, 그거 아직 미완성인데.”

    “아예 못 입을 정도야?”

    “응? 아냐. 꼬리랑 장식 몇 개만 달면 돼. 잠시만.”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공방으로 쓰는 차고로 가는 도란이다. 이윽고 빗소리와 함께 드르륵거리는 재봉틀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쟤가 만든 게 맞긴 맞나 봐. 재봉틀 소리에 귀 기울이며, 새삼스레 다시 감탄하는 나였다.

    …근데 저렇게 금방 만들 수 있으면서 나한테 이딴 옷을 입혀? 들어오면 나한테 죽었다, 도란.

    30분 정도 지나자, 도란이가 완성된 잠옷을 들고 왔다. 신명나게 때리려고 마음먹었었지만, 생각한 것 이상으로 옷이 귀여워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얌전히 갈아입었다.

    헉, 아까 킹콩이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예쁘고 귀여워. 내가 입어도 이 정도인데 다혜가 입으면 완전 깜찍하겠다. 다음에 나도 하나 만들어달라고 부탁해볼까.

    잔뜩 들떠서 거울을 보며 이리저리 살펴보다 문득 도란이가 다혜 커플의 결혼준비에 상당히 협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첩장도 그렇고, 잠옷도 그렇고.

    다른 친구들이 결혼할 때도 소소한 선물을 만들어주긴 했지만,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성준이와 워낙에 절친한 사이라 그런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다른 이유가 있지 않나 궁금해졌다. 1층으로 내려가 도란이에게 이유를 묻자, 조금 생각하더니 순순히 대답한다.

    “일단은 내가 걔네 커플이 사귈 수 있게 도와준 일등 공신이잖아?”

    “…어, 그래.”

    네가 한 건 성준이의 병신력을 참신한 방법으로 하루하루 업그레이드시켜준 것밖에 없는 것 같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일단은 넘어가자.

    “그리고 이소 네가 제일 아끼는 후배랑 내가 두 번째로 소중하게 여기는 친구의 결혼이니까 이것저것 챙겨주고 싶더라고.”

    “푸하하! 그렇게 자주 노는데 두 번째래. 성준이 또 삐지겠다. 설마 첫 번째는 나라서?”

    큰 덩치로 삐지는 시늉을 할 성준이가 생각나 저절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키득거리며 장난스럽게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도란이다.

    “응, 나한테 가장 소중한 건 이소 너니까.”

    그 한마디에 심장이, 아니 온몸이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했다. …너 대체 그거 무슨 의미로 말한 거야? 묻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화목하긴 하지만, 무술 집안이라 그런지 무뚝뚝한 우리 집과 달리, 도란이네 집은 화기애애하고, 애정표현에 스스럼이 없다. 그런 환경에서 커와서인지, 낯간지러운 감정표현에 서툰 나와 다르게 도란이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솔직하고 거침없었다.

    그래서인지 방금 같은 표현도 아무렇지 않게 하고는 했다.

    성준이나 내 동생 이혁이에게도 소중하다느니, 좋은 친구, 동생이라느니 말하는 걸 듣긴 했었다. 단순히 그런 의미로 말한 거겠지. 나와 달리 도란이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니까. 괜히 신경 쓰지 말자.

    티 내지 않으려고 애써 마인드컨트롤을 하는데 도란이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한다.

    “…이소 너 귀가 빨간데.”

    “뭐, 뭐? 내 귀… 귀가 뭐!”

    “너 추우면 귀가 빨개지잖아. 보일러 틀어줄까?”

    “아니, 됐… 아니, 응, 틀어줘.”

    진짜 식겁했네. 말 그대로 십년감수한 것 같다. 나는 보일러를 켜러 간 도란이가 돌아오기 전까지, 진정할 수 있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다행히 꽤 수그러들었지만, 아주 미세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간질거리는 느낌은 계속 남아 있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고, 벗어둔 옷은 아직 말리고 있다. 평소 같으면 이런저런 얘기를 할 도란이지만, 기일이라 그런지 별다른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덕분에 심심해서 도란이를 빤히 관찰했다.

    솔직히 보면 볼수록 의아했다. 기일이면 울적해 하긴 했어도 머리까지 차분하게 하고 오진 않았었는데.

    전역하고부터 머리 손질하기가 귀찮다는 이유로 펌을 고수했던 도란이였다. 머리색도 시시때때로 바꿔서 녀석이 그동안 했던 머리색을 정렬하면 일곱 빛깔 무지개, 아니 24색 크레파스도 만들 수 있을 정도다.

    저렇게 흑발에 생머리인 모습은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처음 봤다. 그렇다는 건 도란이가 기일이라고 헤어스타일까지 신경 쓰진 않는다는 얘기다.

    혹시 아저씨랑 무슨 일 있었나. 아까 도란이가 아주머니에게 아저씨에 관한 얘기를 할 때, 잠시 머뭇거렸던 게 떠올랐다. 해외공연 때문에 오지 못한 걸로 싸운 걸까. 슬그머니 걱정이 싹텄다.

    “란아, 있잖아. 왜 갑자기 헤어스타일을 바꾼 거야?”

    “어? 왜?”

    “아니, 너. 기일이라고 해서 딱히 단정하게 오지는 않았잖아. 브로콜리처럼 하고 온 적도 있으면서.”

    “…브로콜리라니 너무하네. 초록색으로 염색한 적은 있어도 브로콜리처럼 덥수룩했던 적은 없거든.”

    창문 앞에 서 있던 도란이가 툴툴거리며 다가왔다. 그냥 기분전환 삼아서 바꿔봤다는 녀석의 말에 아저씨와 무슨 일 있어서 그런 거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잠시 놀라던 도란이는 이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무슨 일이 있던 건 아니지만, …조금 신경 쓰이는 일이 있긴 해.”

    “왜, 무슨 일인데.”

    “…아직은 확실한 게 아니라 말하기가 좀 그래. 확실해지면 말해줄게.”

    “알았어.”

    뭔지는 몰라도 자기가 한 말은 지키는 녀석이니까 기다리다 보면 말해주겠지. 도란이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달래주고 싶어서 녀석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러자 피식 웃으며 내 손길에 얌전히 기대는 도란이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 걸까. 도란이는 꾸미지 않은 원래 머리가 가장 나은 것 같다. 바깥 활동을 자주 하지 않아 하얀 피부, 유독 까맣고 큰 눈동자와 차분한 흑발. 세 가지가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펌을 했을 때는 귀엽고 발랄한 소년 같았다면, 지금은 뭐랄까. 어른스럽고…ㅅ

    순간적으로 퍼뜩 떠오른 생각에 간신히 진정시킨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미, 미쳤구나, 권이소. 침착, 침착. 딴생각. 아니, 차라리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하자.

    “란이 너… 머리털 개털 됐다고 투덜대지 말고 그냥 이렇게 다녀. 기분전환이든 뭐든 형형색색 펌보다 낫네.”

    “그 인간 같아서?”

    “응?”

    “아냐, 이소 누님. 나 무릎 좀 빌려줘.”

    그렇게 말하며 도란이는 휴대폰 알람을 맞추더니 갑자기 내 다리를 베고 누웠다.

    “야! 뭐하는 거야! 안 떨어져?”

    “6시까지만 빌려주라. 요 며칠 밤낮이 바뀌어서 그런가. 긴장이 풀려서 졸ㄹ…”

    정말 졸렸는지 말을 하다말고 그대로 눈을 감는 도란이다. 장난치는 건가 싶어 이리저리 건드려도 보고 숨소리도 체크해봤지만, 새근거리는 게 진짜로 곤히 잠든 상태였다.

    무슨 애냐, 머리가 닿자마자 잠들어버리게. 어이가 없기도 하고, 동물 잠옷을 입고 웅크려 자는 모습이 귀엽기도 해 웃음이 났다. 날이 날이니만큼 오늘만 특별히 빌려준다.

    좋은 꿈 꿔, 또라이.

    ============================ 작품 후기 ============================

    베룹님// ㅠㅠㅠ 코멘트 많이 달아주셔서 감격.. 의외로 무대체질인 도란이라서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아마 물려받은 재능을 펼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본편은.. ㅠ_ㅠ..

    빗자루계인님// 헉 간만에 오셨는데 제 소설을... (감격) 어서오세요 /ㅅ/ 행복한 가족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독자님들을 슬프게 만들어버렸어 ㅠ_ㅠ..

    드디어 (짠내나는)기일 편이 끝났네요 (짝짝) 우중충한 내용이라 달리게 만들었어 (...)

    오늘도 재밌게 봐 주세요 :D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