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8 18. 복사꽃 필 무렵 =========================
우리가 도착한 곳은 한적한 교외에 있는 도란이네 별장이었다. 지금은 도란이가 공방으로 쓰고 있지만, 한때 도란이네 가족은 이곳에서 살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집을 구매하고, 이사계획까지 세웠었지만….
차에서 내린 도란이는 뒷좌석에 있는 인형 집과 인형 옷들을 꺼냈다. 트렁크에서도 과일이며, 과자 같은 여러 음식이 담긴 마트 봉지가 나왔다.
아무래도 혼자서 옮기기는 힘들 것 같아 짐을 나눠 들었다. “데려오길 잘했지?”라며 장난스럽게 말하자, 처음으로 피식 웃는 도란이다.
그 웃음에 안도한 나는 그제야 주변 경치를 둘러봤다.
언제 와도 아름다운 곳이다. 풀은 바람에 휘날려 춤을 추고, 곳곳에 피어난 봄꽃들은 초록색 도화지에 색색의 물감을 떨어트려 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뒤편에 자리 잡은 2층 목조주택은 한 폭의 그림처럼 주변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조금 걷다 보니 복사꽃이 만개한 두 그루의 복숭아나무가 보였다.
우연의 일치일까, 마치 키가 큰 나무가 작은 나무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 심었을 때는 저렇지 않았었는데. 먼 곳에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 신기하다.
다가갈수록 진한 복사꽃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도란이를 반기기라도 하듯 바람에 날아온 꽃잎이 도란이의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 모습에 어쩐지 가슴이 시큰거렸다.
키가 작은 복숭아나무 아래에 도란이가 인형 집을 내려놓았다. 나도 따라서 들고 있던 인형 옷들을 인형 집 옆에 놔뒀다. 고개를 숙이니 진해지는 복사꽃 향기에 어쩐지 고맙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작은 복숭아나무를 바라보던 도란이는 이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화야, 오빠 왔어.”
짧은 인사를 듣자마자 내 눈에서 후두두 눈물이 떨어졌다. 정작 도란이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아니, 전처럼 의젓한 오빠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리고 울보였던 어린 시절의 도란이가 점점 의젓해졌던 건,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동생 화가 태어나면서부터였다. 도란이는 동생이 태어난다는 얘기를 들은 그때부터 울지도 않고, 놀리는 아이들에게 대항했었다.
곧 태어날 동생을 위해 씩씩한 오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화가 태어났을 때는 울보가 아니게 된 도란이였다. 더는 놀림 받지도 않고, 낯가리지도 않았으며, 착한 성격 덕에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9살 차가 나는 동생을 위해 반년 만에 의젓한 오빠가 된 것이었다.
화가 태어난 이후로도 도란이는 언제나 좋은 오빠였다.
자기도 사랑받고 싶은 어린 애면서, 부모님이 화에게 애정을 쏟는 걸 한 번도 질투하지 않았던 착한 오빠였으며, 부모님보다도 화와 자주 놀아주고 챙겨주는 다정한 오빠였다.
그래서인지 화도 자기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며, 늘 도란이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치고받고 싸우는데 도가 튼 우리 남매가 허구한 날 ‘옆집 남매 반만 닮아봐라’라고 잔소리를 들을 정도로 사이좋은 남매였다. …그랬었는데.
화에게 얘기를 하듯, 복숭아나무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그동안 있었던 일들과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도란이다. 분명 슬픔이 담겨있지 않은 목소리인데도 이상하게 내 눈에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린 건지 얘기를 하다말고 도란이가 나를 돌아봤다.
“푸핫, 왜 이소 네가 울고 난리야.”
“…몰라. 보지 마. 하던 거나 마저 해.”
신경 끄라며 저리 가라고 손짓하는데 도리어 다가오는 녀석.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나보다 한발 빨랐던 도란이가 나를 끌어안고는 천천히 다독였다. 아, 진짜. 그치려고 했는데 다독이지 말라고!
내가 지금 애처럼 엉엉 우는 건 절대로 도란이 잘못이다. 그러니까 지칠 때까지 맘껏 울어버릴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도란이 품에서 실컷 울었다.
***
아, 눈 아파. 목도 아파. 꽤 운 것 같은데도 여전히 다독이고 있는 녀석을 슬며시 밀어냈다.
“그만. 이제 다 울었거든?”
“드디어 끝? …오, 30분 넘게 울었네.”
그러면서 차고 있는 손목시계를 보여주는 녀석. 누가 또라이 아니랄까 봐. 대체 왜 남이 우는 걸 스톱워치로 체크하는데! 씩씩거리며 따지자, 도란이가 생각보다 엄청 울길래, 문득 얼마나 울까 기록이 궁금해졌다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허. 상당히 어이가 없긴 하지만, 제가 알던 도란이로 빠르게 원상복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충 손으로 얼굴을 훔치는데, 도란이가 눈물을 닦던 내 손을 잡았다. 녀석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순간 엄청 놀라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 이젠 괜찮은 줄 알았는데 또 이런다. 정신 나간 심장이 또 제멋대로 세게 뛰어.
“그렇게 손으로 닦지 말고, 손수건 줄 테니까 이걸로 닦아.”
“…응.”
“닦아줘?”
“됐거든!”
녀석이 건넨 손수건을 재빨리 낚아채 대충 얼굴을 닦았다. 나를 보고 어깨를 잠시 으쓱이던 도란이는 이번에는 큰 나무 쪽으로 가서 섰다. 아까와 달리 도란이의 목소리에 애교가 묻어나왔다.
“안녕. 엄마의 영원한 귀염둥이 3호, 큰아들 왔습니다. 화한테 먼저 인사했다고 삐진 건 아니죠? 엄마도 알잖아요, 화가 자기한테 먼저 인사 안 하면 삐지는 거.”
“아, 맞다. 화 안녕. 오랜만.”
도란이의 말에 황급히 화에게 인사하는 나다. 자신에게 먼저 인사를 하지 않으면 잔뜩 토라지던 화가 생각났으니까.
밖에서는 안 그랬는데, 자기 집에서만큼은 무조건 화 자신이 가장 먼저 인사를 받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화는 심통이 나서 말도 안 섞고, 눈을 마주치려고 해도 이리저리 고개를 휙휙 돌렸다.
그래도 다른 사람은 토라지는 정도로 끝났지, 도란이가 그러면 집이 떠나가라 서럽게 울던 화였다.
어쩌다 도란이가 집에 화가 없는 줄 알고 아주머니에게 먼저 인사를 했던 적이 있는데, 그 모습을 본 화가 그 자리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며 숨넘어갈 듯 꺼이꺼이 울었다. 그런 화를 달래면서 쩔쩔매던 도란이가 떠올라 살짝 웃음이 터졌다.
“…음, 아버지는 해외 공연 때문에 못 오셨어. 어떻게든 기일을 지키려 했는데, 힘드셨다나 봐. 그러니까 엄마가 이해해줘요. 대신 엄마가 엄청 예뻐하던 이소 데려왔잖아. 뭐, 물론 얘도 오늘이 기일인지 까맣게 잊고 있긴 했지만.”
“야!”
“그래도 미안하다면서 자기가 먼저 따라오겠다고 자진해서 왔어. 그러니까 서운해하지 마요.”
“…병 주고 약 준다, 아주.”
도란이를 째려보며 툴툴거린 나는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직접 입으로 내뱉는 인사라 조금 쑥스럽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했다. 취직하기 전까지만 해도 매년 들렀는데, 일하면서부터 시간이 없어 마음만으로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었다.
생전에 나를 엄청 예뻐하셨던 분이어서 기일을 잠시 잊고 있었다는 게 너무나도 죄송했다. 진짜… 우리 엄마보다도 날 아껴주셔서 어릴 땐 이분이 우리 엄마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는데.
너무 죄송스러워서 눈물이 또다시 흘러내렸다. 하, 권이소. 오늘 진짜 원 없이 우네.
그래도 내 인생에서 그때보다 서럽게 울었던 적은 없긴 하지만. 나는 옆에 서 있는 도란이를 바라보며, 둘이서 서럽게 펑펑 울었던 그 날을 회상했다.
============================ 작품 후기 ============================
푸른달유에님// 친구로 오래 지낸 두 사람이라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연애라니. 상상만 해도 입꼬리가 올라가네요. /ㅅ/
분명 유쾌한 개그 로맨스 물인데 이번 주는 어째 ^ㅅT... 그래도 재밌게 봐 주세요 :D
다음 연재는 토요일! 그리고 일요일 외전 한편 입니다♡
(마왕의 남자에서도 안 했던 주 4회 연재 - 자유연재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