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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연애 시뮬레이션-17화 (17/97)
  • 00017 17. 두 번째 꽃구경  =========================

    의외로 했던 말은 잘 지키는 녀석이기에 언제부턴가 일할 때는 격일로 연락하긴 했지만, 그래도 일이 끝나기만 하면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하던 도란이는 요 며칠 통 연락을 하지 않고 있다.

    아니, 연락하긴 하지만, 안부만 묻는 메신저 두세 번, 어쩌다 짧은 통화 한번이 다였다. 우리 집에 찾아오지도 않아서 며칠째 입에 맞지 않는 배달음식과 인스턴트로 끼니를 때웠다.

    오래간만에 즐기는 혼자만의 시간에 편하기도 했지만, 녀석에게 시달리는 것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심심한 것도 사실이었다. 가상연애를 하기 전에도 연락은 자주 하던 녀석이라 걱정이 생기기도 하고….

    혹시 그 결혼이니 뭐니 하는 소문이 도란이 귀에도 들어간 건가. 그래서 일부러 피하나? 아, 진짜 이지윤. 똑바로 해명하라니까.

    일단 산처럼 쌓인 배달음식의 잔해, 일회용 용기 처리를 끝내놓고 이지윤 집으로 쳐들어가야지. 아니면, 도란이 집에 잠시 들리던가.

    손에 드는 걸 최대한 줄이기 위해 커다란 봉투에 일회용 용기를 꾹꾹 눌러 담았는데도 3 봉투나 완성되었다. 하하, 이것 참. 내 방대한 식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아 쑥스러운걸. 빨리 증거인멸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밖으로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우리 오피스텔은 다른 엘리베이터보다 문이 빨리 닫히는 편이었다. 그래서 봉투를 양손에 들고서 어떻게 하강 버튼을 눌러야 할지 고민하는데, 도착했다는 알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부랴부랴 짐을 들고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는데, 다행히 안에 있던 사람이 열림 버튼을 눌러주고 있는 건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응.”

    친절한 이웃의 배려에 감사하다고 인사를 건넸는데, 어째 말이 좀 짧다?

    뭣보다 짧은 대답이지만, 엄청 익숙한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들어 확인해봤더니 …뭐지, 분명 도란이인데, 도란이가 아닌 것 같은 이질감.

    봄 분위기 내겠다고 핑크 브라운으로 염색했던 머리카락이 시커먼 흑발이 되어 있지를 않나, 평소에는 입지도 않는 정장을 빼입고 있지를 않나. 뭣보다 날 보자마자 개드립을 치거나, 쉴 새 없이 떠들어야 정상인 애가 한마디도 없다.

    도란이를 힐끔힐끔 쳐다볼 때마다 녀석이 아플 때 잠깐 봤던, 진지했던 모습이 계속 겹쳐 보였다.

    진짜 소문이 퍼져서 난감해진 건가. 아니, 소문이 나도록 최초로 원인 제공한 건 자기면서 대체 왜 저러는 건데? 뭐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낯선 모습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나였다.

    “들어줄까?”

    “…뭐?”

    “손에 들고 있는 그거.”

    줄곧 아무 말이 없다가 1층이 가까워져 오자 먼저 말을 꺼내는 녀석. 평소와 달리 힘없는 목소리에 진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불안해졌다.

    괜찮다고 말하면 그대로 가버릴 것 같아 녀석의 양손에 봉투를 하나씩 쥐여준 나는 용기를 내어 대화를 시도했다.

    “올…뭐냐, 너. 그렇게 차려입고. 드디어 소개팅이라도 하러 가는 거야?”

    “아니, 꽃구경.”

    농담조로 말했다고 농담으로 받아치는 건가. 시커먼 정장 입고 꽃구경 가는 사람이 있을 리가 있나. 녀석이 내게 뭔가를 숨기는 것 같아 괜히 서운함이 느껴졌다.

    “웃기시네. 미친 것도 아니고 누가 꽃구경 가는데 칙칙하게 검은 정장을 입고 …아.”

    서운한 마음에 녀석에게 툴툴거리며 핀잔을 주던 나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검은 정장, 웬일로 침착해 보이는 녀석, 그리고 꽃구경. 내가 왜 그걸 생각 못 했지. 오늘이 며칠인지 떠올리고 나니 도란이에게 더욱 미안해졌다.

    아, 진짜 내가 미쳤지. 어떻게 그걸 까먹냐. 권이소 똥 멍청이.

    “미안, 아, 진짜 미안해, 란아. 잠시 잊고 있었어. 진짜 미쳤나 봐, 나. 어떻게 까먹을 수가 있지.”

    “아냐, 괜찮아. 너 요새 바빴잖아. 늦게까지 야근하고.”

    도란이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이젠 내가 괜찮지 않다. 도란이에게 내가 들고 있던 봉투도 넘겨주고는 황급히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란아. 좀 늦게 가도 괜찮으면 나도 준비하고 따라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안 따라와도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 빨리 준비할 테니까, 응?”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까 뛰지 말고, 천천히 준비하고 나와.”

    도란이가 서두르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미안함에 조급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시간이 없으니 기초화장만 대충 한 뒤 머리를 단정히 묶고, 도란이처럼 검은 정장을 입었다.

    후다닥 준비하고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도란이가 보였다. 그제야 조금 안심하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오피스텔 문 앞에 서 있는 도란이를 보니 잠시 침착해졌던 마음이 또다시 조급해졌다. 왕년에 육상부 에이스였던 실력을 발휘해 전력 질주하는데 미처 있다고 생각지도 못한 난간에 발을 헛디뎌 그대로 엎어졌다.

    다행히 바로 앞에 서 있던 도란이가 재빨리 붙잡아 준 덕분에 다치진 않았지만, 얼떨결에 내가 길바닥에서 도란이를 덮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그러게 서두르지 마라니까.”

    “아, 미안. 그래도 맘이 급한 걸 어떻게 하냐.”

    그렇게 말하고 일어나려는데 도란이와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에 부스스한 베이비 펌이 아닌 생머리, 그것도 흑발인 녀석을 봐서일까. 어쩐지 도란이가 성숙하게 느껴졌다. 꼭 어릴 적 모습만 기억하고 있던 아이가 어른이 된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것 같은 느낌.

    물론 원래 어른이긴 한데, 커가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보기도 했는데.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어른스럽다? 아니, 뭔가 좀 더 와 닿는 표현이….

    “왜 안 일어나고 가만히 있어. 어디 다쳤어? 못 일어나겠어?”

    “어? 아니… 그.”

    “무릎 좀 굽혀볼래?”

    멍하니 생각에 잠기느라 일어나지 못했던 건데, 도란이는 내가 어디 다친 줄 아는 건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얼떨떨한 상황에 휩쓸려 해명도 못 하고, 녀석이 시키는 대로 잠자코 무릎을 굽혔다.

    그러자 도란이가 한쪽 팔로는 나를 감싸고, 다른 팔로는 땅을 디뎌 천천히 일어났다.

    도란이가 나를 붙잡아서 일어난 덕에 같이 일어나긴 했는데, 이번엔 내가 도란이와 마주 앉은 채로 안고 있는 것처럼 되었다. 아니, 안고 있다기보다는 안긴 건가. 내 등을 감싸고 있는 도란이의 팔이 자꾸만 신경 쓰인다.

    “아, 힘들어.”

    도란이가 내 귓가에서 짧은 한숨을 내쉰 탓에 움찔하고 몸이 떨렸다. 내가 미쳤나. 도란이가 들러붙은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갑자기 왜 이렇게 신경을 쓰고 앉았냐고!

    이성의 필사적인 외침과는 다르게 몸은 주인의 말을 듣질 않았다. 나를 감싸고 있는 팔이 자꾸만 신경 쓰였고, 도란이의 숨소리가 들릴 때마다 온몸이 움찔거렸고, 심장은 존재감을 드러내듯 세게 뛰었다.

    누가 내게 슬로우 마법이라도 걸어놓은 것처럼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느리게, 그리고 섬세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멈췄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계속 이대로 있다간 심장이 터져버려 죽는 게 아닐까 두려움마저 느껴질 무렵, 도란이가 서서히 멀어졌다. 잠시 나를 살펴보더니 짧은 한숨을 뱉는 도란이다.

    “일단 옷은 해진 데 없이 무사한 것 같은데. 어디 다친 건 아니지?”

    “어. 괜찮아. 좀… 놀래서. 괜찮으니까 가자.”

    “응.”

    차로 향하는 도란이의 뒷모습을 잠시 멍하게 쳐다봤다. 나를 잡느라 등 부분에 흙먼지가 묻어 있었지만,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털어줄 수가 없었다. 그대로 닿게 되면 기분이… 엄청 이상해질 것 같았으니까.

    도란이의 차 안으로 들어가자 뒷좌석에 직접 만든 인형 집과 인형 옷들이 놓여있는 게 보였다. …저거 만드느라 바빠서 연락이 없었던 거구나. 그제야 녀석이 연락하지 않은 이유를 깨닫고는 조금 안도했다.

    운전하면서도 도란이는 말이 없었다. 음악도 틀지 않아 차 안은 침묵만 감돌았다.

    엔진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으니 괜히 아까 있었던 일이 떠올라 괴로웠지만, 그곳에 갈 때는 아무런 음악도 듣지 않는 도란이인 걸 알고 있어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래도 심심한 건 어쩔 수 없어 힐끔거리며 옆을 쳐다봤다.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도란이지만, 눈은 사색에 잠겨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 생각이 안 드는 게 이상한 거지. 나도 이런데 본인은 얼마나 싱숭생숭할까.

    도란이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다시 기분이 이상해져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빠르게 사라지는 창문 너머 풍경처럼, 아까 있었던 일이 기억 속에서 사라지길 바라면서.

    ============================ 작품 후기 ============================

    빗자루계인님// 주인공에게 설렌다. 소설 때문에 두근두근하다. 이런 말이 로맨스 작가에게 있어서 최고의 칭찬 같아요. 감사합니다 /ㅅ/

    오늘은 처음으로 아침에 올리네요 :D 상쾌한 모닝! 상쾌한 소설(?)

    다음 연재는 목요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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