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6 16. 소문은 날조되어 퍼져나가고 =========================
오늘은 하늘로 붕붕 날아갈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왜냐하면, 칼퇴를 했으니까!
어쩌다 보니 외근을 하게 됐는데, 생각보다 외근지에서의 일이 일찍 끝났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편집장님께 여쭤봤더니 바로 퇴근해도 좋다고 하셨다. 덕분에 생각지도 않은 달콤한 꿀 같은 자유를 맛보게 되었노니!
크, 오래간만에 즐기는 휴식이니 오늘만큼은 도란이한테 시달리지 말고 혼자만의 여유를 만끽해야지.
그렇게 생각하기도 잠시, 절묘하게도 폰 벨소리가 울렸다. 암만 녀석이라도 내가 일찍 퇴근했는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혹시 이 인간, 편집장님께 내 일거수일투족을 물어보고 그러는 거 아냐?
씩씩대며 폰 화면을 확인하니 바빠서 요새 통 연락을 하지 못했던 중학교 동창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인물에 당황하기도 잠시, 이내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오, 지윤 씨. 살아계셨습니까. 하도 연락을 안 주셔서 조금 서운할 뻔했습니다.”
“웃기시네. 내가 더 서운하거든? 야, 권이소. 너 왜 나한테 말 안 했냐?”
“뭘?”
“아니, 뭐. 너도 바빴으니까 까먹을 수도 있겠지. 어쨌든 권이소 축하한다! 너 드디어 걔랑 결혼한다며?”
…네? 이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래?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재차 물어봤더니 내가 얼마 뒤 결혼한단다. 그것도 도란이랑.
꿈인가 싶어서 볼을 꼬집어봤지만, 얼얼하니 아픈 게 분명 현실이다. 하도 어이가 없으니 미친년처럼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그걸 듣고는 지윤이는 결혼을 앞두니까 그리 좋으냐며, 어이 실종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야, 이지윤, 너 그거 누구한테 들었냐. 아니, 아니다. 너 오늘 시간 돼? 나랑 좀 보자.”
대체 어떤 인간이 이따위 헛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는 건지 알게 되면, 그 인간 내가 반 죽여 놓을 거다. 나는 이를 부드득부드득 갈며 지윤이와 약속장소로 향했다.
***
약속장소로 가니 지윤이가 나를 먼저 알아보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의 모습이 물론 반갑긴 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대체 누구한테 들었냐고 물어보았다.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잠시 쳐다보던 지윤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니, 내 초등학교 친구 중 하나가 너네랑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거든. 걔가 그저께 그러는 거야. 자기 고등학교 다닐 때, 남녀 둘이서 늘 붙어 다니는 걸로 유명했던 애들이 곧 있으면 결혼한다고.”
“…그래서?”
“그래서는 뭔 그래서야. 우리는 당연히 너네 얘기인 줄 알았지.”
“대체 왜 그게 나랑 도란이 얘기가 되는 건데!”
황당하다는 듯 말하자 도리어 나보고 자기가 황당하다고 주장하는 지윤이다. 너네 말고 붙어 다니던 애들이 누가 있냐고. 아니, 우리가 지겹도록 붙어있는 건 맞지만, 세상천지에 남자 여자 둘이 붙어 다니는 게 우리 둘만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오랜만에 만나서 실랑이하기도 뭣해, 소문의 근원지인 지윤이 동창에게 전화해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물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우리가 아니라 성준이랑 다혜를 말했던 거였다. 진상을 파악한 내가 매섭게 째려봤더니 누군지 자세히 말을 해야 할 거 아니냐고 말하며, 서둘러 전화를 끊는 지윤이다.
그러면서 나보고 뭐 먹고 싶으냐고, 자기가 쏘겠다고 말하는데 제가 지금 그게 입으로 넘어가게 생겼습니까. 마른하늘에 날벼락, 아니, 길 가다가 레고를 양쪽 발로 동시에 밟은 기분이거든요?
“야, 미친. 엮을 게 없어서 걔랑 나를 엮어?”
“아니, 우리도 나름대로 근거가 있어서 그런 추측을 한 거지!”
“뭐, 근거 뭐.”
“너, 메신저 프사도 도란이 걔 얼굴로 해놨지. 거기다 얼마 전에 너희 집 근처 벚꽃길에서 둘이 데이트하는 거 봤다는 애도 있었거든?”
오, 신이시여. 기가 차는 상황에 무교인데도 저절로 신을 찾게 된다.
이런 상황은 진짜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라 어이가 셀프로 실종신고를 내놓고는 저만치 사라져버렸다. 거기에 쐐기를 박는 지윤이의 말.
“걔가 그러잖아. 둘이 엄청 다정하게 붙어 있길래 일부러 아는 척 안 했다면서.”
“…다정은 무슨! 호랑이가 풀 뜯어 먹는 소리 하고 앉았네!”
여기가 식당 안이라는 사실도 깜빡 잊고는 우렁차게 소리를 지른 나다. 순식간에 내게로 시선이 쏠리는 게 느껴졌다. 점점 차오르는 쪽팔림에 최대한 이성을 유지하며, 침착하게 대응하자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단전에서부터 깊은 빡침이 끌어 올랐지만, ‘도란이를 대하듯 차분하게, 흥분하지 말고’ 라고 계속 생각했더니 놀랍게도 이성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오, 이거 28년 동안 알지 못했던 도란이의 순기능인데?
“뭐, 이번 일은 오해니까 그냥 넘어가지만, 앞으로는 란이랑 나랑 절대 엮지 마라. 난 걔랑 결혼, 아니, 연애할 생각도 전혀 없거든?”
물론, 돈의 유혹에 이끌려 말도 안 되는 가상연애는 하고 있지만. 그래도 엄연히 앞에 ‘가상’이 붙으니 이건 노카운트다. 그렇고말고. 세상에 가상연애하는 것도 연애에 포함되면, 소꿉놀이하는 애들은 엄마 아빠고, 병원 놀이하는 애들은 죄다 의사게?
…어째 도란이랑 어울리다 보니 녀석의 멍청한 발상이 점점 옮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뭔가 찝찝한 느낌이 계속 들어 똥 씹은 얼굴로 냉수를 들이켜는데, 지윤이가 뭐가 웃긴지 키득거리며 말한다.
“왜. 걔가 어때서. 네 프사… 좀 웃기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귀엽던데.”
“귀엽다고? 걔가?”
귀를 의심하는 말에 기가 차서 비웃음이 튀어나왔다.
물론, 어릴 땐 엄청 귀엽긴 했지. 나보다 키도 훨씬 작았고, 소심했고. 게다가 눈물도 많아서 아주머니를 쏙 빼닮은 큰 눈으로 어쩔 줄 모르면서 울먹거릴 때는 진짜, 크흑.
근데… 그랬던 애가 크면서 점점 미쳐가지고. 지금은 귀여운 건 온데간데없는 귀찮은 미친놈이 되어버렸네. 흑흑, 어릴 적의 도란아. 돌아와! 진짜 내가 다혜만큼이나 부둥부둥 귀여워해 줄 자신 있는데!
“응. 사진 보니까 지금도 여전해 보이던데. 걔 중3 때였나. 걔네학교 축제에서 여장한 걸로 엄청 유명했잖아.”
“…아, 그 미친.”
일부러 깊은 곳에 파묻어놨던 기억이 지윤이의 말 한마디에 벌떡 일어나 존재감을 드러냈다.
녀석은 매번 학교축제에 참가했는데, 좋게 말하면 개성 넘치고, 나쁘게 말하면 정신 나간 짓을 종종 저질러서 화제가 됐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그중 ‘○○남중 팜므파탈 사건’은 이 인간이 어쩌다 이런 또라이로 변모했을까 자각하게 해준 중요한 사건이었다.
***
녀석이랑 학교가 다르긴 했지만, 바로 옆에 붙어있던 남중과 여중이었기에 언제나 등하교를 같이했다. 평소처럼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면서 집으로 가는데, 도란이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이소, 나 여장한다.”
“어? 갑자기 왜?”
“축제 때 여장대회 하잖아. 우리 반 대표로 내가 뽑혔어.”
뭐, 조금 놀랍긴 하지만, 우락부락한 애들이 여장하는 것보단 낫겠지. 도란이가 자주 어울려 노는 애들이 여장하는 모습을 떠올렸더니, 도란이네 반 녀석들은 미적 감각이라는 게 있는 놈들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하라며 위로 겸 응원을 했는데, 잠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녀석이 자못 심각한 얼굴을 했다.
“있잖아.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애들이 내 이름 여자 같다고 엄청 놀렸었잖아.”
“…응, 그랬지.”
가뜩이나 또래보다 작고, 여렸던 도란이는 줄곧 놀림의 대상이었다.
눈물이 많아서 금세 울어버리는 녀석이 이름까지 특이하니, 남자아이들은 심심하면 이름을 가지고 놀려댔다. ‘남자 이름이 란이 뭐냐’부터 시작해서 ‘너희 엄마·아빠는 이름을 짓다 말았냐’라며 외자인 것 가지고도 엄청 놀려댔다.
그때마다 도란이를 달래고, 남자아이들을 응징하는 건 내 몫이었다. 혹시나 도란이에게 안 좋은 트라우마로 남은 건가 싶어 걱정스러웠다. 싫으면 그만두는 게 어떻겠냐고 조심스레 말하려는데, 녀석이 눈을 반짝이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자식들이 내 이름 가지고 여자 같다고 놀렸던 거, 어쩌면 내가 엄청 예뻐서 그런 거 아닐까?”
“…뭐?”
“그러니까 반 애들 대부분이 나한테 투표했지. 좋아. 이렇게 된 이상 ○○남중 역사상 최고의 팜므파탈이 되어주겠어.”
뭐라 말릴 틈도 없을 정도로 열의를 활활 불태우던 녀석은 실제로 여장대회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 …비주얼보다는 퍼포먼스로 차지한 것 같긴 하지만.
도란이네 남중 축제는 방과 후에 진행되었었다. 다른 학교 학생들도 축제를 구경할 수 있었기에 나도 자연히 녀석이 여장한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생각보다 잘 어울려 감탄하기도 잠시, 장기자랑 시간이 되자 감탄은 경악으로 변했다.
녀석은 청순한 비주얼과 어울리지 않는 섹시 댄스를 추다 말고, 여장대회에 참가한 다른 녀석을 박력 넘치게 벽치기로 가두더니 그대로 키스 퍼포먼스를 했다. 그 순간 강당은 그야말로 한바탕 난리가 났고, 내 멘탈도 시끄러운 주변의 비명과 함께 산산이 조각났다.
잘 키운 내 아들이 일탈을 저지르는 걸 눈앞에서 목격한 기분. 뭐라 설명 못 할 충격과 배신감.
구경하던 다른 애들에게도 여러모로 인상이 깊었던 건지 녀석은 압도적인 표차로 1등을 거머쥐었고, 녀석의 공언대로 한동안 ‘○○남중 팜므파탈’이라는 별명으로 명성을 얻었다.
실제로는 돌발행동이 아니라 다른 반과 미리 짜고 한 거라지만, 이미 와르르 무너진 멘탈은 해명을 들어도 수습되지 않아 그냥 그대로 기억 속에 고이 묻어둔 나였다.
***
기억하기도 싫은 끔찍한 기억을 고스란히 끄집어냈더니 착잡한 심경이 온몸을 싸고돌았다.
오늘은 좀 편히 쉴 수 있나 좋아했는데. 정신적으로 이렇게 피곤해지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이대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가는 K.O 상태가 될 것 같아 대충 마무리를 지으려 했다.
“어쨌든 그 또라이랑 나랑 엮지 마라. 애들한테도 당장 해명해.”
“왜. 이것도 운명인데 이참에 잘 해보지그래? 솔직히 난 왜 여태 너네 결혼 소식이 안 들리나 했다.”
“…엮지믈르그.”
이를 앙다물고 살벌하게 으르렁댔는데도 누가 내 친구 아니랄까 봐 전혀 쫄지 않는 지윤이다. 응, 그 깡다구 아주 마음에 안 들어. 때리고 싶을 만큼 미워죽겠어. 내가 씩씩대든 말든 지윤이는 꿋꿋하게 자기 할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왜. 걔가 어때서. 물론, 좀 애가 특이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뭐… 생긴 것도 봐 줄 만하게 생겼고, 너한테도 잘해주고, …어, 또 노래도 잘하잖아?”
“진짜 뜬금없네. 얼마나 칭찬할 게 없으면 거기서 노래 잘하는 걸 칭찬하냐.”
내 말에 자기도 무안하긴 했는지 지윤이는 잘 있다가 갑자기 헛기침을 했다. 그런 지윤이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나다.
“아니, 어쨌든 내 말은 걔도 꽤 괜찮다는 거지.”
“그렇게 괜찮으시면 네가 사귀시던가요.”
“아니, 난 됐어.”
오시면서 단호박이라도 한 트럭 삶아 드셨어요? 생각하지도 않고 됐다고 단호하게 대답하는 지윤이를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자기는 됐다고 단칼에 거절하면서, 왜 나는 엮고 난리야? 내가 무슨 폭탄처리반이야? 희생정신이 투철한 논개야?
“왜요, 괜찮다면서요.”
“그건 너한테만 해당하는 거고 나한테는 아니지.”
이건 무슨 도란이도 안 써먹을 정도로 되지도 않는 핑계래. 너무 어이가 없어서 이제는 헛웃음조차도 나오지 않는다.
“뭔 미친 소리야?”
“아, 그런 게 있어.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이후로 별다른 말을 하지 않길래 나 역시 해명 제대로 해놓으라며 엄포를 놓고는 이 이야기를 끝냈다. 진짜. 피곤하다, 피곤해.
하루빨리 가상연애를 쫑내지 않으면, 녀석이랑 살림 차렸다는 소문까지 퍼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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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자루계인님// 아마도 전 일요일에 볼 것 같아요 +_+ 계인님도 벚꽃놀이 즐기셨나요? :D
퍼져라 (짝) 퍼져라 (짝)
사실 도란이 키는 177로 작은 편은 아닙니다. 성준이가 지나치게 커서 상대적으로 작아보일 뿐 (...) 오늘도 재밌게 봐 주세요 :D